47화
니키는 여러 가지 음식을 수북이 담은 접시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 접시를 내게 내밀었다.
“안젤리카 님, 내가 메뉴를 전부 먹어 봤는데 여기서 이거랑, 이거, 이게 제일 맛있어. 포장할 거면 이거 가져가.”
“……전부?”
나는 음식이 차려진 식당을 잠시 둘러보았다.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엄청난 가짓수의 음식이 있었다. 저 음식을 전부 맛보았다니 언제 봐도 참 대단한 애다.
어쨌건 메뉴를 전부 먹어 봤다는 니키가 추천하는 음식이니 믿을 만하겠지.
“고마워, 잘 받을게.”
로코도 주머니에 잘 있고, 가방에 음식이 든 종이봉투와 ‘완벽한 인질 생활을 위한 감옥 패키지’도 넣었으니 준비는 끝났다.
다음은…….
“아빠, 저 잠깐 나갔다 오려고 하는데…….”
“그래? 무슨 볼일이 있니?”
“어디를 가냐면……. 그건 비밀인데요.”
아빠가 쓸쓸히 웃으며 말했다.
“우리 천사는 아빠한테 비밀이 많구나.”
시무룩.
실재하지 않는 강아지 귀가 축 쳐지는 환상을 본 듯했다. 아빠의 모습에 나는 크게 당황하다가 에두른 핑계를 입에 올렸다.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식사를 잘 못하는 애를 만나서……. 먹을 걸 가져다줄까 하고요.”
“안젤리카 님……!”
사라가 감동한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만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애틋하고 감동적인 스토리 한 편이 재생되는 중이 분명했다.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이대로라면 나는 휴가를 즐기러 와서도 이웃을 염려하는 기특한 아이가 되어 버린다. 나는 그냥 세이르의 염세주의를 낫게 해서 성검을 손에 넣으려는 것뿐인데.
실상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간지러운 오해를 사다니 민망해서 견딜 수 없다. 나는 얼른 고쳐서 말했다.
“그, 그런 거 아니고. 여기 음식이 엄청 맛있으니까! 걔한테도 먹여 주고 싶어서요.”
“그래, 좋은 생각이구나. 우리 천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잘 다녀와라.”
아빠 역시 이상한 오해를 한 모양이다. 더 묻지 않고 따뜻하게 웃으며 나를 배웅해 주던 아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친구가 생겨서 좋겠구나, 안젤리카.”
아니,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 * *
“세이르, 안녕?”
“…….”
초록빛 눈을 한 소년의 시선이 따갑다.
세이르가 그렇게 쳐다보거나 말거나 나는 밖에서 창문을 열고 방 안으로 침입했다. 어제와 달리 완벽하게 착지해, 꼴사납게 넘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잘 있었어? 우후후……. 내가 뭘 가지고 왔는지 보면 깜짝 놀랄걸.”
나는 가방 안에서 주섬주섬 종이봉투를 꺼냈다. 세이르는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어제 분명히,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못 들었어?”
“아니, 들었지. 잘 들었어.”
“그런데?”
“나는 이 방에 무단으로 침입했어. 침입자가 말 듣는 거 봤어?”
“…….”
세이르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이었다. 어제의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미소보다는 차라리 저 ‘얘는 대체 뭐지?’ 하는 표정이 보기 좋다. 이제 좀 제 나이 같네.
“이것 봐, 쨔잔!”
나는 종이봉투에 든 음식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하나같이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들이다.
그러나 세이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채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끌어 반강제로 테이블 앞에 앉혔다.
“성장기 어린이는 잘 먹어야 해. 그래야 키가 크지.”
“너는 성장기 어린이 아니야?”
내 키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 말이었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나도 곧 클 거거든. 1년 뒤에는 세이르가 나를 올려다보게 될걸?”
세이르는 여전히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나한테 왜 관심을 가지는 거지?”
“나는 평소에 집안에서만 지내서 또래 친구들을 잘 만나지 못하거든. 휴양 도시에 와서 또래를 만나니까 너무 반가운 거 있지!”
“…….”
맙소사. 웃으라고 한 말이었는데 세이르의 입술은 미소조차 머금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다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고?”
“이 별장, 담벼락에 개구멍이 있더라고?”
“……응?”
“나는 개구멍만 보면 들어가고 싶어지는 병이 있어서.”
“…….”
농담이었는데 이번에도 세이르는 웃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연다. 아마 그가 진짜 하고 싶은 질문이었겠지.
“나를 왜 도와주려는 거야?”
“응? 그야 당연히 원하는 게 있으니까지. 말 안 했던가? 세이르, 염세주의 꼬맹이치고는 순진하구나.”
“염세주의, 꼬맹이……?”
그런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본다는 반응이었다. 저런, 앞으로 자주 듣게 될 거다.
나는 이 염세주의 꼬맹이에게 중요한 조언을 해 주기로 했다.
“세이르, 원하는 것 따위는 없고, 순수하게 너를 위해서 도와준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조심해. 그런 사람이 제일 위험한 법이야.”
“뭐? ……아하하! 아하하하!”
내 말에 세이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세이르?”
“……하하, 아하하하!”
어라? 내가 한 말 중에 우스운 부분이 있었나?
아까는 안 웃더니 왜 진지하게 말하니까 웃는 거야? 염세주의에 빠지면 이상한 데서 웃음이 많아지고 그래?
내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세이르는 눈물까지 흘리며 한참이나 웃어 댔다. 그리고…….
띠링!
[세이르 뮨 엘레인의 상태 이상 ‘염세주의’의 레벨이 99 → 89로 하락합니다.]
갑자기 염세주의 레벨이 10이나 내려갔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잘된 일이다.
겨우 웃음을 그친 세이르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안젤리카라고 했지. 네가 누군지 생각났어. 안젤리카 데네브. 데네브 왕국의 왕녀.”
“딩동댕, 정답입니다!”
“전에 만났었지. 사달멜리크의 경매장 근처에서.”
“……앗.”
나는 화들짝 놀라 눈만 데구루루 굴렸다. 세이르가 나를 못 알아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치챘구나. 기껏 좋은 분위기였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리겠다.
“그게, 아하하. 그때는 우연! 진짜 우연! 네가 뭘 하는지는 진짜 못 봤으니까, 저기.”
허둥지둥 변명하는 나를 보고 세이르는 피식 웃었다.
“뭐, 됐어. 그때 일을 떠올리지 않아도 너는 충분히 수상하거든.”
“아니, 내가 어디가 수상…….”
……수상했네? 엄청 수상했군. 이 화제는 넘어가자.
세이르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데네브 왕국의 왕녀가 내게 뭘 원하는 걸까.”
“내가 원하는 건 네가 갖고 있는 성검이야.”
“성검……?”
세이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벽장문을 열었다. 그러곤 낡은 검집에 든 검을 하나 꺼내 왔다.
“설마 이걸 말하는 거야?”
[성검 루크바트(S)
성스러운 힘을 지닌 검입니다.]
칼날이 새까맣고 곧은 한손검이었다. 검은 무척 낡아서, 겉만 보고는 S급 성검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상태창에는 분명히 검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 검이 확실하다.
“응, 맞아. 아, 달라는 건 아니고. 그냥 잠깐만 빌려주면 돼. 쓸데가 있어서.”
“내가 싫다고 하면?”
그때는 돈으로 설득해야지. 세이르의 경계심이 좀 누그러질 때까지는 비밀이지만.
“음식 다 식겠다. 일단 그거 먹고 이야기해.”
“하아……. 그래, 알겠어.”
에휴, 밥 한번 먹이기 정말 힘들다.
겨우 세이르가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갓 구운 빵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제일 먼저 따끈따끈한 빵에 살구잼을 바르더니 조심스럽게 한 입 삼킨다.
“……음.”
“맛있지?!”
“먹을 만하네.”
“에이, 엄청 맛있으면서 아닌 척하기는. 이거도 먹어 봐.”
나는 구운 치즈를 넣은 샌드위치를 집어 세이르에게 내밀었다.
세이르가 샌드위치를 맛보는 순간, 초록빛 눈동자가 살짝 부드러운 빛을 띠었다.
[세이르 뮨 엘레인의 상태 이상 ‘염세주의’의 레벨이 89 → 84로 하락합니다.]
세이르는 점점 손이 빨라지더니 곧 샌드위치 하나를 다 먹었다.
역시 맛있는 음식은 효과가 있다. 얘한테 음식을 꾸준히 먹이기만 해도 염세주의 레벨을 많이 낮출 수 있겠다.
“맛있지? 막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아?”
“아니, 그 정도까지는……. 어쨌든 고마워.”
“다 원하는 게 있어서 하는 일이니 그런 말 안 해도 돼. 내일도 가져올게.”
이 말에는 세이르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오지 마.”
물론 나는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사실은 기대하고 있으면서?”
“아니, 안 하거든.”
“내일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를 들고 올게.”
“너, 사람 말 너무 안 듣지 않아?”
* * *
“안젤리카, 친구는 잘 만나고 왔니?”
“……아빠!”
세이르에게 음식을 주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아빠가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빠에게 다가가면서 중요한 사실을 정정했다.
“친구 아닌데…….”
“하하, 그래, 그래.”
그다지 내 말을 믿지 않는 기색인 아빠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2층의 내 방으로 향했다.
커다란 창문으로 아름다운 도시와 푸른 바다를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방. 아빠는 발코니의 소파에 조심스레 나를 내려놓고 옆에 앉았다. 그리고 다정하게 묻는다.
“어떤 친구인지 아빠도 궁금하구나.”
대답을 피하면 아빠가 슬퍼할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으음……. 마음이 비뚤어진 애 같아요.”
“하하, 그러니?”
“성격도 좀 이상하고……. 염세주의에 심취해 있다고 할까.”
“친구가 우리 천사를 속상하게 하는 모양이구나.”
“꼭 그런 건 아닌데…….”
나는 잠시 세이르에 대해 생각했다.
만사에 관심 없다는 듯한 그 뚱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퀘스트니 성검이니 하는 문제를 떠나서도 염세주의 레벨이 내려갔으면 좋겠다.
아빠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낮게 속삭였다.
“안젤리카, 아빠가 처리해 줄까?”
“네?”
처리? 뭘?
일순 아빠의 목소리가 차갑게 들린 건 기분 탓일까. 아빠는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그 친구 일로 안젤리카가 속상하다면, 아빠가 도움을 줄 수도 있단다.”
“네? 아니에요.”
“아빠가 못 미덥니……?”
시무룩.
아앗, 다시 아빠에게 버추얼 강아지 귀가 보이는 것만 같다. 나는 잔뜩 당황해서 손을 마구 내저었다.
“네? 아니, 아니요. 못 미더운 건 아닌데!”
그야 아빠는 여전히 착하고 조금도 흑막이 되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세이르는 일단 다른 나라의 소공작이란 말이지. 내가 세이르에게 접근하는 것과 아빠가 직접 접근하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만에 하나, 리어 왕국 쪽 사람들에게 들켰을 때 나만 있으면 변명이 가능하다. 애들끼리 어쩌다 친해졌다고 우기지 뭐.
하지만 아빠가 있으면 국제 문제가 돼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