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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44)화 (45/133)

44화

“어? 초대권을 준다고? 정말?”

엘나스 호텔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인기가 좋아 예약하기가 힘든 호텔이다.

순간 혹할 뻔했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흑막계의 라이벌이 보인 호의를 덥석 물 수는 없었다.

“아니야, 바쁜데 호텔은 무슨. 그보다 거기 비쌀 텐데 30명씩이나?”

“휴우……. 이렇게라도 실로프 여사의 돈을 털어먹고 싶었는데…….”

“아항.”

“집에 가기 싫어요…….”

어지간히도 어머니와 사이가 나쁜가 보다. 나는 마음만 받겠다고 말하려다가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가만, 올해 몇 년도지?”

“네……? 그야 대륙력 677년이죠.”

“그렇지, 대륙력 677년! 휴양 도시에서는 곧 새벽별 축제가 열리지?”

“네, 맞아요. 하아, 진짜 집에 가기 싫다…….”

“대륙력 677년 여름 새벽별 축제!”

“왕녀님……?”

대륙력 677년의 새벽별 축제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문득 떠올랐다.

세이르는 기본적으로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엘레인 공작령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 안 되는 예외가 바로 대륙력 677년 휴양 도시의 축제 기간이다.

축제 기간 동안 세이르는 휴양 도시에서 머문다. 이유는 모른다. 어차피 세이르는 신 포도 캐릭터라서 자세히 알아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축제라도 즐기러 가나 보지.’

중요한 건, 축제 기간이라면 머나먼 엘레인 공작령까지 가지 않아도 세이르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즐거운 축제 기간이라면, 세이르도 내게 경계를 풀지 않을까? 적어도 내 제안을 들어 보기라도 하겠지.

“로디, 나도 엘나스에 가야겠어. 초대 고맙게 받아들일게.”

“저야 좋지만……. 갑자기요?”

“우후후후…….”

이거다! 멋진 계획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기다려라, 세이르 뮨 엘레인!

* * *

나는 곧장 아빠를 찾아갔다.

“아빠, 저예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빠는 오늘도 다정하고 상냥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안젤리카, 세이르 소공작을 납치하겠다는 이야기라면, 안 된단다.”

탁!

나는 박력 있게 아빠의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내려놓았다. 아빠는 이번에도 제안서인 줄 알고 그 종이를 곱게 접어 내게 돌려주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안서가 아니다. <데네브 왕국 발전을 위한 제안서~세이르 납치 편~>은 내 머릿속에 잘 들어 있다.

“아이 참,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에요.”

“그럼 이건……? 엘나스 호텔 초대장?”

나는 활짝 웃으며 선언했다.

“아빠, 아빠에게는 휴식이 필요해요!”

“휴식, 이라고……?”

퍽 뜻밖인 말이었는지 아빠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네, 아빠, 우리 놀러 가요!”

실은 요즘 우리 아빠, 크로셀 데네브가 많이 바쁘다. 앞서 말했다시피 현재 우리 왕국이 물이 오른 상태이기 때문이다.

왕국이 발전하면 자연히 통치자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지는 법이다. 더군다나 왕성의 고용인 수가 최소 수준이니 아빠가 직접 처리해야 하는 일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아빠가 일을 많이 하는 것 자체는 싫지 않다. 워커홀릭은 흑막의 미덕이니까.

일 안 하는 흑막 본 사람? 없을걸. 일 안 하는 흑막이면 그냥 한가하고 나쁜 사람이잖아!

그래도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 아빠는 벌써 며칠째 집무실에 틀어박히다시피 한 상태였다. 심지어 아빠는 너무 착한 나머지 직접 처리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도맡았다.

이대로 계속 과로하다가 저 잘생긴 얼굴이 상하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러니 이참에 아빠를 일과 격리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초대장은 어디서 난 거니?”

“로디에게 받았어요.”

“엘나스 호텔이라. ……좋은 곳이지.”

아빠는 이미 가 본 적이 있나? 그렇다면 설득이 쉬울 것 같다.

그러나 아빠는 내가 내민 초대장과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번갈아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아빠는 가기 힘들 것 같구나.”

아빠가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 나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 온 말을 입에 올렸다.

“호텔에 손님이 너무, 너어무 없어서, 꼭 많은 사람이 와 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이대로 계속 손님이 없으면 호텔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대요. 가요? 네?”

엘나스 호텔에 손님이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뭐 어떤가. 중요한 것은 아빠를 쉬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빠는 다시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구나. 모처럼 초대를 받았으니 안젤리카가 혼자 다녀오는 것은 어떻겠니? 호위를 붙여 주마.”

솔직히 내가 혼자 가는 쪽이 더 편하기는 했다. 내 최우선 목적은 어디까지나 세이르와 만나는 거니까.

하지만 나는 아빠와 함께 가고 싶었다. 아빠를 이대로 두었다가는 워커홀릭 흑막이 아니라 그냥 워커홀릭이 될 것 같았으니까.

다른 데도 아니고 휴양 도시의 엘나스 호텔이라고? 해변이 아름다운 대륙 최대의 휴양지! 놀기 좋은 곳!

거기다 곧 열리는 새벽별 축제도 아주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았다.

<마.왕.꾸>에서 이 축제 마지막 날 밤에 크로셀을 보내면 이벤트 그래픽이 한 장 뜨는데, 그 이벤트 그래픽이 정말 끝내주게 예뻤다.

“……, 네가 이 풍경을 봤다면 좋아했을 텐데.”

“…….”

“미안하다.”

뭐 이런 뜬금없는 대사가 뜨는 버그가 딸려 오기는 하지만. 괜찮다. 이 버그 망겜이 버그투성이인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모니터 너머로 봐도 그렇게 멋진 그래픽이었는데 실제로 보면 얼마나 더 끝내줄까? 그러니 아빠를 쉬게 할 겸 꼭 함께 가고 싶었다.

아빠를 설득하려면 역시 이 방법밖에 없나.

‘내키지 않지만…….’

아니야. 할 수 있어, 안젤리카. 쪽팔림은 한순간. 딱 한 번만 쪽팔리면 되는 거야.

목표 달성을 위해 쪽팔림쯤은 참아 넘기는 비정한 흑막의 외동딸이 되자.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단단히 각오를 다진 뒤 입을 열었다.

“아빠가 같이 안 가면 나도 안 갈래요!”

“안젤리카…….”

“요즘 나랑 놀아 주지도 않고! 계속 일만 하고!”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돌려주지 않겠다는 듯 품에 꼭 껴안고 외쳤다.

“아빠 미워요!”

뺨이 화끈화끈했다. 이 나이 먹고 생떼라니. 민망해서 아빠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쪽팔림을 무릅쓰고 생떼를 부린 보람이 있었다. 아빠가 금방 내게 항복한 것이다.

“안젤리카가 정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다, 같이 가자꾸나.”

“와아, 너무 좋아요!”

나는 서류를 내려놓고 활짝 웃으며 아빠의 품에 안겼다.

다행이다. 아빠를 서류 더미에서 구해 낼 수 있겠어.

내 생각에, 우리 아빠는 딸을 참 잘 둔 것 같다, 음하하.

* * *

마차가 휴양 도시 엘나스의 입구를 지나 달렸다.

나는 창문을 열고 바깥을 구경했다. 화려하게 꾸며진 거리, 행인들의 표정이 모두 밝았다.

코끝에 닿는 공기에는 소금 냄새가 섞여 있었다.

“우와, 바다 냄새가 나!”

“어머, 정말이네요. 바다가 가까운가 봐요.”

“정말 기대된다, 그치?”

우여곡절 끝에 떠나게 된 휴가.

이 휴가에는 아빠와 나, 사라 외에도 왕성의 꽤 많은 인원이 동행하게 되었다. 로디가 정말로 많은 인원을 초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떠나온 동안에는 왕성 증축 공사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드디어 F급 낡고 좁은 왕성에서 탈출이다.

[그저 그런 왕성(E) 완성까지 남은 시간 : 7일]

7일이면 휴가를 즐기기에도, 세이르를 만나기에도 딱 좋은 시간이다.

잠시 뒤, 마차가 엘나스 호텔에 도착했다. 엘나스 호텔은 그 명성에 걸맞은 넓고 화려한 정원에 감싸여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꽃이나 세련된 조각 따위에서 이 호텔에 많은 공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었다.

마차에서 내려 정원 산책로를 지나면 호텔 입구가 나왔다. 손님들이 호텔로 향하며 정원을 만끽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이쪽이에요, 여러분…….”

그런데 엘나스 호텔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를 안내하는 로디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처음에는 앞서 걷던 로디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윽고 열의 끝 쪽이 되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불렀다.

“로디?”

“에휴우……. 가고 싶지 않아요…….”

급기야 그는 호텔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이렇게 말하며 슬쩍 사라지려 했다.

“크로셀 님, 왕녀님, 저는 이만 돌아갈 테니 휴가 편안히 보내시길…….”

달칵.

그때, 호텔의 정문이 열리더니 직원 여러 명을 대동하고 여성 한 명이 나왔다.

“저희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엘나스 호텔의 오너 알렉산드라 실로프라고 합니다.”

저 사람이 로디의 어머니인가.

성인인 자녀가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이는 외모였다. 몸에 걸친 드레스와 보석은 화려했고, 눈매는 날카롭다.

알렉산드라는 직원들에게 짐을 안으로 나르라고 지시한 뒤, 아빠를 보고는 눈가를 찌푸렸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을까. 데네브 왕국 안에 틀어박혀서 꿈쩍도 않으시더니.”

나는 깜짝 놀라 아빠와 알렉산드라를 번갈아 보았다. 설마 이 사람, 아빠와 아는 사이인가?

아빠는 당황하지도 않고, 그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우리 천사가 오고 싶다고 해서.”

“……천사?”

알렉산드라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아빠와 알렉산드라를 번갈아 보았다. 늘 상냥하던 아빠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이렇게 냉랭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아빠, 알렉산드라 씨와 아는 사이예요?”

“아니, 모르는 사이란다.”

“그럼요. 저는 아버님과 잘 아는 사이랍니다. 오래된 인연이지요.”

아빠와 알렉산드라가 거의 동시에 상반된 답을 내어놓았다.

“……하아.”

아빠가 짜증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우와, 처음 보는 표정이라 신기하다. 심지어 아빠는 얼굴을 찌푸려도 잘생겼다.

내가 빤히 바라보자 아빠는 금방 표정을 풀고 빙그레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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