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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43)화 (44/133)

43화

틀림없다. <마.왕.꾸> 게임 전체를 통틀어 S급 성검을 소지한 사람은 단 한 명, 세이르 뮨 엘레인뿐이니까.

“여기서 세이르랑 또 얽힐 줄은 몰랐네…….”

나는 사실 원작의 약혼자(가 될 뻔했지만 약혼식 날 같이 죽은) 세이르와 별로 얽히고 싶지 않다.

세이르는 유일한 S급 성검 소지자일 뿐만 아니라, 리어 왕국 현 국왕의 조카다. 왕족이란 말씀. 미래엔 엘레인 공작이 되실 몸이다.

더군다나 우리 왕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정치 지형이 복잡한 리어 왕국에서 계승 순위 3위이기도 하다.

‘세이르하고 얽히면 완전 복잡한 일이 생길 듯한 느낌!’

하지만 나는 마법 도구 공방을 꼭 열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이르의 S급 성검이 필요하다.

세이르를 찾아가서 성검을 빌려달라고 말해 볼까?

나는 마법 도구 공방을 개방하기만 하면 된다. 깨끗하게 쓰고 돌려줄 테니, 딱 5분만 빌려달라고 하는 거야.

아니면 세이르를 데네브 왕국에 초대해도 좋겠지.

“……아!”

“피이잇?”

그때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상업 도시 사달멜리크의 경매장 앞에서 세이르랑 만났었지. 무슨 목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청나게 수상한 느낌이었다.

문제는 내가 세이르에게 얼굴을 보인 데다 경계를 샀다는 사실이다.

“……수상한 인간이군.”

“나는 선량한 관광객이거든?”

“수상한 사람은 다들 그렇게 말하지.”

“으으, 틀렸어……. 안젤리카야, 대체 왜 그랬니.”

한번 의심을 산 이상, 머나먼 공작가까지 찾아가 봤자 성검을 빌려주기는커녕 싸움을 걸어올지도 모른다. 데네브 왕국에 초대해도 응하지 않겠지.

이 대륙에는 왕위 계승권자가 허락 없이 다른 나라 국경을 넘으면 구금할 수 있다는 법이 있다.

몇십 년 전에 여러 나라가 왕위 계승권자를 놓고 하도 싸워 대는 통에 생긴 법인데, 사실 현재는 거의 사문화되었다. 의사 허락 없이 목욕하기 금지법 같은 느낌.

그래도 응하기 싫은 초대를 거절하는 핑계로는 딱 좋달까.

“그러면 남은 방법은…….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피이이……?”

그래, 이 방법이라면 흑막답고 멋지다.

나는 곧장 아빠를 찾아갔다.

“아빠, 저예요!”

“우리 천사, 어서 오렴. 이런, 안젤리카, 뺨에 먼지가 묻었구나.”

“헉, 정말요? 아까 헛간에 들어가서 묻었나 봐요.”

“잠시만 가만히 있으렴. 자, 다 닦았다. 이제 예쁜 얼굴이 잘 보이네.”

“고마워요, 아빠! 그보다 저 할 말이 있어요.”

“그래, 우리 천사가 아빠한테 무슨 말일까?”

“아빠, 세이르 소공작을 납치합시다!”

……단번에 거절당했다.

* * *

“안젤리카 님, 여기 주문하신 재료 가져왔습니다…….”

“응, 고마워. 거기 놔 줘.”

나는 로디에게 짧게 대답한 뒤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할 일이 많았다. 저녁 전까지 전부 끝내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내가 있는 이곳은 왕성 서재. ……의 바닥.

나는 바닥에 재료를 늘어놓고 어떤 물건을 제작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책상에 앉아 작업했었는데, 여러 재료를 쓰다 보니 바닥이 더 편했다.

“어디 보자,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바닥에는 편안한 침대, 책이 가득한 책장, 푹신한 소파, 놀이 기구 등을 손바닥만 하게 축소한 모형이 놓여 있었다.

나는 이 모형들을 상자에 잘 담았다. 다음으로 로디에게 구입한 아이템 축소&확대 마법이 걸린 마석을 상자에 장착했다.

‘마법 도구 공방이 있으면 훨씬 잘 만들 수 있는데…….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인가.’

옆에서 내 모습을 지켜보던 로디가 불쑥 물었다.

“왕녀님, 대체 뭘 만드시는 건가요……?”

“보면 몰라? 완벽한 인질 생활을 위한 감옥 패키지야.”

“네……?”

로디가 귀가 안 좋나? 나는 로디를 위해 또박또박 힘을 주어 다시 말했다.

“아이 참, 못 들었어? 완벽한 인질 생활을 위한! 감옥 패키지!”

“아야야, 제 청력은 멀쩡해요. 제 말뜻은, 그러니까 그걸 왜 만드시냐는 건데요…….”

“세이르를 납치해야 하니까.”

“…….”

로디가 일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지 안 물어봐?”

“딱 봐도 귀찮을 것 같고……. 사실 그렇게까지 궁금하진 않아요…….”

“이미 늦었어. 그냥 들어. 한번 들어가면 한 달은 나오고 싶지 않을 만큼 편안한 감옥을 제공한다고 꼬드기면, 세이르가 넘어오지 않을까?”

로디는 숨 쉬는 것도 귀찮아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세이르 소공작을 납치해야 하는지는 안 물을게요……. 귀찮아질 것 같으니까. 그런데 엘레인 공작령에 있는 세이르 소공작을 어떻게 데려오시려고요……?”

“……아.”

그 생각을 못 했네.

데네브 왕국에서 엘레인 공작령까지는 꽤 멀다. 개구멍으로 살짝 나가서 세이르를 납치해 돌아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빠한테 ‘세이르를 납치하러 엘레인 공작령에 다녀올게요!’ 했다간 또 거절당하겠지.

‘크흑,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하기만 했어도 간단했을 텐데!’

이런 말을 해서 무엇 하겠나. 전부 내 무능의 소치인 것을.

“세이르를 어떻게 데려올지는 나중에 생각하려고!”

“네에……. 뭐, 잘되시길 바랄게요…….”

로디가 영혼이 1g도 담기지 않은 응원을 해 주었다.

그때, 로코가 감옥 패키지를 만들다 남은 재료 위에서 날개를 푸드덕거리다 미끄러졌다. 나는 깜짝 놀라 로코를 안아 들었다.

“로코, 너……! 거기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아! 못에 찔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피이이…….”

“왕녀님, 귀여운 박쥐가 생기셨군요…….”

어라, 그러고 보니.

시스템이 내게 알을 준 김에 얼결에 로코를 맡아서 키우고 있긴 하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로코의 동족이 있지 않을까? 만약 동족이 있다면 로코를 보내 줘야겠지?

로코가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을 수도 있잖아.

“피이이?”

로코가 무척 귀엽게 울며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원래 박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로코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로디에게 물었다.

“로디, 혹시 이런 박쥐형 몬스터 본 적 있어? 일단 내가 키우고는 있는데, 나는 박쥐 싫어하거든. 만약 동족들이 사는 곳이 있으면 보내 줄까 하고.”

“흐음, 글쎄요…….”

로디가 로코의 작은 얼굴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초면이군요……. 이런 박쥐 몬스터가 사는 곳은 들어 본 적 없어요.”

“휴우…….”

“……왕녀님?”

“크, 크흠!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하긴 <마.왕.꾸>에서도 로코의 동족은 등장하지 않았다. 내 곁에 있으면 등 따시고 배부른데 굳이 야생으로 돌려보낼 필요는 없겠지.

나는 박쥐를 좋아하지 않지만, 로코는 내가 좋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지, 뭐.

“피이이?”

그러고 보니 전에 로코에게 침대는 만들어 줬지만, 로코가 갖고 놀 만한 장난감이 마땅치 않았다. 심심할 텐데.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로디에게 물었다.

“로디, 주문하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얘가 갖고 놀 만한 장난감 주문할 수 있을까?”

“가능하지만…… 시간이 좀 걸려요.”

“왜? 바빠?”

“그게, 이야기하려면 좀 긴데요…….”

로디에게는 미안하지만 긴 이야기를 전부 다 듣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완벽한 인질 생활을 위한 감옥 패키지를 한시라도 빨리 완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손을 움직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럼 결론만 말해 줘.”

“엄마가 불러서요…….”

“……뭐?”

퍽 뜬금없는 말이었다. 나는 로디의 말을 해석하기를 포기하고 다시 말했다.

“미안.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말해 줄래?”

“전에, 알레사 백작이 상업 도시의 자치회를 조종할 작정이라고 알려 주셨죠…….”

‘알레사 백작의 음모’ 이벤트 이야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응, 그랬었지. 어떻게 됐어?”

“일단 알레사 백작의 음모는 막을 수 있었어요……. 당분간 자치회는 별일 없을 거예요.”

“와아, 잘됐다!”

적어도 알레사 백작이 상업 도시 사달멜리크를 손에 넣어 사사건건 귀찮은 시비를 걸어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구나.

나는 진심으로 잘됐다고 생각하며 박수를 짝짝 쳤다.

그런데 분명 좋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로디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제가 여기저기 손을 쓰다가 그만…….”

“그만?”

“상업 도시 사달멜리크의 암흑가를 이끌게 되었거든요…….”

“뭐…… 뭐어어?”

나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상업 도시 사달멜리크의 암흑가는 크고 막강하다. 거대한 도시를 어둠 속에서 뒷받침하는 조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런 암흑가를 로디가 이끌게 되었다고? 갑자기? 저 매가리 없고 만사가 귀찮아 보이는 로디가?

놀라운 이야기다. 어쩌면 진정한 흑막이 될 자질이 있는 사람은 로디가 아닐까.

“…….”

‘아니, 아니야. 그런 생각 하지 말자. 진정한 흑막은 우리 아빠가 될 테니까. 로디 실로프에게 질 수는 없지.’

누가 질 줄 알고!

내가 때아닌 경쟁의식에 가슴을 불태우는 사이 로디가 말을 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 귀에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가출한 건 좋지만 가끔은 집에 좀 오라고 잔소리를 해서요.”

“그렇구나. 로디의 어머니는 어떤 분인데?”

“휴양 도시에서 작게 숙박업을 하세요. 엘나스 호텔이라고 하는데요…….”

로디의 말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작게 숙박업을 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엘나스 호텔이면 그 동네에서 제일 비싸고 유명한 호텔이잖아!

이 대륙에 존재하는 다섯 개의 자유 도시 중, 기후가 따뜻한 해안가에 위치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휴양 도시 엘나스.

그리고 그 휴양 도시 엘나스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엘나스 호텔.

한때 그 호텔에 성녀가 머물렀다나. 그래서 여명교 신전에서 호텔을 성지(聖地)로 지정했다.

이 부분은 <마.왕.꾸> 본편도 아닌 설정집 구석에나 적혀 있을 정도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엘나스 호텔은 게임 내 성능도 엄청났다는 거지.

<마.왕.꾸>에서 캐릭터를 보내서 숙박시키면 100% 회복은 물론이고 스테이터스가 대폭 상승한다.

거기다 낮은 확률로 희귀 특성을 얻을 수 있는 이벤트까지 발생하는 좋은 장소다.

하지만 워낙 비싸서 돈이 아주 많지 않으면 이용하기가 힘든 곳이기도 했다.

‘가만, 그러면.’

로디의 아버지 쪽은 대형 상회, 어머니 쪽은 고급 호텔을 경영한다는 이야기인가? 로디 본인은 비밀 상점 주인이자 암흑가를 이끌고?

이거 완전 힘숨찐에 흑막 속성이잖아? 이러다 진짜 로디가 흑막이 되는 거 아냐?

“…….”

아무래도 요즘 로디랑 너무 친하게 지낸 거 같다. 거리를 둬야겠다.

‘진정한 흑막이 될 사람은 우리 아빠야. 누가 질 줄 알고!’

다시 한번 무익한 경쟁의식에 가슴을 불태우는 내게 로디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왕녀님, 엘나스 호텔에 놀러 오실래요……? 왕녀님이라면 무료 초대권 30명까지 드릴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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