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던전 앞의 풍경은 휴양 도시 엘나스에나 있다는 유원지를 연상시켰다.
던전의 입구 쪽에는 모험가들이 세 줄로 나뉘어 섰는데, 각각 초급 코스, 중급 코스, 고급 코스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제랄드는 안내에 따라 초급 코스의 맨 끝에 섰다. 줄은 금방 줄어들어 머지않아 제랄드의 차례가 왔다.
‘에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빨리 끝내고 나와서 남은 배달이나 마저 하러 가야겠어.’
그런 생각으로 들어간 던전.
시끌시끌한 바깥과 달리 안쪽은 제대로 된 고대 던전이었다. 이끼가 낀 돌벽에는 냉기가 흘렀고, 좁고 어두운 통로는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통로 저편에서 불어온 습한 바람이 뺨에 닿았다. 제랄드는 검을 꼭 움켜쥐었다.
‘언젠가 마왕을 물리칠 내가 이런 데서 쫄 수는 없지.’
던전은 일직선 구조였다. 좁은 통로가 일자로 쭉 이어졌고, 중간중간에는 작은 방들이 있었다. 제랄드는 묵묵히 걷다가 첫 번째 방에 발을 디뎠다.
드르륵!
그 순간,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갇혔다.
그리고 바닥이 열리더니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
제랄드는 곧장 검을 꺼내 들고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몬스터의 면면을 보고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애걔?”
가장 처음 나타난 몬스터는 슬라임 세 마리였다.
제랄드의 레벨에 비하면 턱없이 약한 몬스터다. 맥이 빠질 정도였다. 제랄드는 거침없이 검을 휘둘러 슬라임들을 물리쳤다.
“이야아압!”
검격 한 방에 슬라임들이 쓰러졌다.
그런데 의아한 일이 있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다시 바닥의 문이 열리더니 슬라임들이 사라진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드르륵!
슬라임이 사라지니 다시 철문이 열렸다. 제랄드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 다음 방으로 향했다.
두 번째 방에서는 고블린 두 마리가 튀어나왔다. 슬라임보다는 강하다고 하나 제랄드보다 약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흐아아압!”
제랄드는 곧장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고블린의 체력을 95%쯤 깎았을 때 바닥의 문이 열렸고, 고블린이 도망쳤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강해지는 몬스터들을 쓰러뜨리다가 이윽고 레벨 10짜리 소형 골렘을 쓰러뜨렸을 때.
던전의 마지막 방이 눈앞에 보였다.
“……드디어 끝인가.”
제랄드는 마지막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탕!
마지막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자동으로 문이 닫혔다.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제랄드가 당황할 무렵이었다.
“윽……! 뭐, 뭐야?”
파아앗!
갑자기 방에 불이 켜졌다. 제랄드는 강한 빛에 놀라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뒤 조심조심 눈을 떴다.
방의 중앙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가 제랄드를 보고 입을 열었다.
“크크큭……. 결국 여기까지 도달하였는가, 모험가여.”
그런데 어째 남자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제랄드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저기, 저번에 마을에서 뵌 분 맞죠? 분홍색 머리카락인 귀여운 따님이 있으시던.”
“크흠, 흠. 아닐세. 나는 이 던전을 지키는 사악한 마왕일세.”
“맞는 거 같은데…….”
자신이 착각했을 리 없다.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남자. 그는 제랄드가 이제껏 만나 본 어떤 사람보다도 아름다웠다.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으니까.
거기다 남자는 자기 입으로 사악한 마왕이라고 했지만, 별로 사악해 보이지는 않았다.
얼굴을 검은색 안료로 분장하고 검은색 망토를 걸쳤으나 심각하게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님은 잘 있죠? 아주 똑똑하고 귀엽던데. 그렇게 예쁜 따님이 있어서 아주 좋으시겠어요.”
“안젤리카는 잘 있…… 크흠, 흠.”
남자는 뒷말을 삼키더니 등 뒤의 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벽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응? 방금 한 말을 따라하라고? 그런데 안젤리카, 꼭 ‘크크큭’ 하고 웃어야 하니? 그래…… 알겠다.”
다시 남자가 제랄드를 보고는 위엄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말투는 꼭 책을 읽는 양 어색하고 뻣뻣했다.
“크흠, 크흠! 크크큭, 모험가여! 이 던전을 지키는 몬스터들을 해치운 그 힘, 부디 나를 즐겁게 해 주었으면 좋겠군.”
“…….”
“그러나 이 던전의 심연은 깊다. 어, 그리고 다음이…… 아. 더 강한 몬스터들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지.”
“네?”
“모험가여, 더 깊은 어둠에 도전하겠는가?”
제랄드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가 활짝 웃으며 옆에 놓인 봉투를 집어서 건넸다.
봉투 안에는 작은 휘장과 티켓, 그리고 초급 포션 따위가 들어 있었다.
“초급 코스 클리어를 축하하네. 이건 기념품과 중급 코스 도전권일세.”
“네, 초급 코스 체험 완료되었습니다. 모험가 님, 이쪽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벌컥 하고 오른쪽 벽의 문이 열리더니 안내원이 나타났다. 안내원을 따라 던전에서 나온 뒤 제랄드는 생각했다.
상당히 어이없기는 하지만…….
“이거 재밌잖아?”
점진적으로 강해지지만 해치우기 버겁지 않은 수준의 몬스터. 스산한 분위기가 흐르고 실감 나지만 그리 위험하지 않은 던전 내부. 심지어 이렇게 보상까지 받을 수 있다.
안전하게 모험 기분을 느끼기에 딱이지 않은가!
“크하핫! 형씨, 멋진 경험을 한 모양인데?”
호객꾼이 씩 웃으며 말을 걸었다.
“여기는 대체 뭡니까?”
“데네브 왕국의 왕녀님이 준비하신 프로젝트지. 중급 코스부터는 동료와 파티를 짜서 도전하는 것도 가능해. 어때, 도전하겠나?”
호객꾼이 가리킨 곳에는 동료를 모집 중인 모험가들이 몇 명 있었다.
모험가 동료와 던전 탐험! 이 얼마나 달콤한 울림인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론이죠!”
제랄드는 신난 걸음으로 모험가들에게 다가갔다.
* * *
“후후, 후후후…….”
나는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북적거리는 고대 던전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안젤리카 님, 이거 먹을래? 남았대.”
“어, 니키, 고마워.”
니키가 내게 구운 틸라를 한 봉지 건넸다. 달콤한 냄새를 맡으니 속이 출출해졌다.
난 잠시 니키와 나란히 앉아 구운 틸라를 나누어 먹었다.
아차, 다른 데로 샐 뻔했네.
나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고대 던전을 체험하는 모험가들의 표정이 밝았다.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앙케이트 결과도 ‘또 방문하고 싶다.’가 99%로 긍정적이었다.
데네브 왕국의 남쪽에 위치한 ‘오싹오싹! 스릴 넘치는 모험이 기다리는 고대 던전(E)’를 활용하기 위해 야심차게 시작한 프로젝트.
이른바 ‘난이도별 고대 던전 모험 코스’는 완전히 대박을 냈다.
이렇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약간 과거로 되돌려야 한다.
니키와 함께 왕성 개구멍으로 빠져나갔다 돌아온 날 밤.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하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잠을 청한 나는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모험가들, 사실 별로 모험할 생각이 없는 거 아냐……?”
마을에서 만난 모험가 제랄드(택배 배달 겸업 중)만 해도 그렇다.
말로는 모험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진심으로 목숨을 걸고 위험한 모험을 떠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만 마음속에 모험에 대한 어렴풋한 동경을 품고 있을 뿐.
모험가라면 으레 마을의 여관 겸 주점에서 수상한 소문을 듣고 모험을 떠나야 하는 거 아냐? 고대의 신비도 파헤치고, 마을 사람도 돕고, 음모도 저지하고 뭐 그런 거 있잖아.
‘그 판타지 게임 국룰인 설정은 어디 갖다 버리고……!’
이게 다 세상에 멋진 흑막이 없어서 그래!
아쉬운 마음에 판타지 꼰대 같은 발언도 해 봤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이래서는 기껏 몬스터와 함정, 보상을 준비해 놔도 모험가들이 던전에 들어가려 하지 않을 테다.
여하튼 정리하자면.
왕국에 있는 캐릭터가 강렬한 감정을 느끼면, 그 감정이 포인트로 변환되는 것이 <마.왕.꾸>의 왕국 포인트 시스템이다.
참고로 나는 시스템의 판정 기준이나 자세한 포인트 계산법까지 다 외우고 있지만 이것도 ‘그게 뭔데, 오덕아’ 같은 소리나 들을 테니 넘어가자.
요는 모험가들에게서 포인트를 뜯어내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 것.
여기서 나는 발상을 전환할 필요성을 느꼈다.
꼭 모험가들을 공포에 떨게 하지 않아도 된다. 스릴, 흥분, 신남 따위의 감정도 강렬하기만 하면 포인트를 얻을 수 있으니까.
그리하여 나는 관광형 고대 던전을 오픈하기로 마음먹었다. 말 그대로 관광지. 안전하고 즐겁게 던전을 체험하는 것이다.
원작의 테크트리도 일부 따라가고, 돈도 벌고, 모험가도 만족할 테니까 개이득이다.
그렇다고 해도 원래는 이렇게까지 본격적인 유원지 분위기를 내려던 건 아니었는데…….
“크하핫! 안젤리카 님, 요즘 멋진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계신다고 들었슴다!”
최근 새로운 인격에 눈을 뜬 왕성 경비병, 트리스탄이 나를 찾아왔다.
“응, 그런데?”
“안젤리카 님은 제가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신 은인임다! 제가 도움을 좀 드려도 될까요?”
도와줄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말해 봐.”
“관광업을 쉽게 봐서는 안 됩니다. 어중간하게 오픈했다간 묻힐 뿐이에요. 안젤리카 님이 지금 계획하고 계신 프로젝트는 현재로서는 많이 약함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모험가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좀 더 특별한 요소가 필요할 테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데네브 왕국 발전을 위한 계획서~고대 던전 편~>의 내용을 고쳐 썼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좋은 아이디어임다. 거기다 여기에 이런 걸 이렇게 하면…….”
“으음, 그래도 고대 던전인데 리본 장식이랑 꽃가루는 좀 그렇지 않아?”
“아니요! 휴양 도시 엘나스에 지지 않는 관광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조건 튀어야 합니다!”
“어……. 그렇게까지 거창하게 만들 생각은 없는데.”
“야망을 크게 가지셔야 합니다, 안젤리카 님!”
“여기서 야망을 더 크게?!”
그냥 분장 도구로 자신감을 북돋아 줬을 뿐인데, 갑자기 야망 넘치는 관광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거야?
‘무섭다, 그 분장 도구…….’
심지어 다 쓸 만한 조언이라는 점이 더 무섭다.
‘분장 도구에 이렇게 엄청난 힘이 있는데,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하다니…….’
정말 서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