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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39)화 (40/133)

39화

아참. 아빠한테는 아직 알에서 로코가 태어난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지. 아빠가 얘를 마음에 들어 해야 할 텐데.

나는 로코를 아빠한테 인사시키기 위해 양손으로 감싸 쥐고 품에 안았다.

“아빠, 얘는 어제…….”

“……안젤리카.”

아빠가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로코를 소개시켜 줄 만한 분위기가 아니다. 나는 박쥐를 앞주머니에 넣은 뒤 대답했다.

“네!”

아빠는 무릎을 굽히고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푸른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왕국 남쪽의 고대 던전을 열었더구나.”

헉, 아직 말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던전이 여기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당연한 일인가.

고대 던전을 개방하기는 했지만 아직 몬스터는 배치하지 않았다. 던전을 멋지게 완성한 다음 ‘쨔쟌!’ 하고 보여 줄 생각이었는데.

서프라이즈에 실패했겠다,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아빠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빠의 눈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다시는……. 안젤리카,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단다.”

위화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무슨 뜻인지 묻기도 전에 아빠가 말을 이었다.

“안젤리카가 여러 가지로 애쓰고 있는 건 알아. 안젤리카가 바라는 일이라면 뭐든 들어주고 싶지만, 네가…… 나쁜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

“……아빠.”

“아빠는 이제 절대 너를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럴 바에야 그냥 계속…… 이 왕성에서 조용히 사는 게 낫단다.”

“…….”

다소 의문스러운 아빠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벤트가 있었지.’

고대 던전을 개방하는 것은 원작 <마.왕.꾸>에서도 반드시 거쳐 가는 테크트리다. 보통 안젤리카가 열세 살이 넘었을 때쯤이면 고대 던전을 열 수 있었다.

그런데 던전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모험가들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가 필요하다. 모험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던전에 들어갈 만한 보상 말이다.

보통은 적당히 값나가는 보석이나 아이템 따위를 넣어 둔다.

그런데 내가 마지막으로 한 게임 플레이, 즉, 흑막 엔딩을 보기 위한 졸렬 플레이에서는 달랐다.

이때의 미끼는 사람이었다.

약혼식에서 죽을 때 빼고는 게임상에서 거의 존재감이 없던 흑막의 외동딸. 그러니까, 안젤리카 데네브 본인이다.

안젤리카는 모험가들에게 접근해서 약간의 친분을 쌓는다.

다음 날, 모험가들은 안젤리카가 던전으로 납치당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던전 안에서는 끊임없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모험가들은 안젤리카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던전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전부 함정이었다.

모험가들은 다시는 던전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던전 안은 허약한 안젤리카에게도 위험한 공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모험가들이 던전 안에 들어선 순간 크로셀이 안젤리카를 꺼내 주어야 하지만…….

하필이면 그때 까다로운 돌발 이벤트가 뜨는 바람에 늦고 만다.

뒤늦게 던전에서 나온 안젤리카는 ‘상태 이상 : 병약 상태, 신경 쇠약, 악몽’을 얻어 며칠 동안 앓아눕는다.

그 직후, 크로셀은 안젤리카를 세이르 소공작과 약혼시키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한 졸렬 플레이 속의 이야기. 현실이 아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자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아빠는 꼭 그 이벤트 내용을 알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하하, 그럴 리가 없지.’

일어나지 않은 일을 후회할 수는 없으니까.

이 세계에 빙의한 김에 못 본 흑막 엔딩에 도달할 생각이긴 하지만, 원작의 플레이를 모조리 답습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내가 열네 살 때 죽으니까? 뭐, 그것도 물론 중요한 문제지.

버그를 회피해 흑막 엔딩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만 게시판에서 본 공략대로 졸렬한 플레이를 해 버렸지만.

역시 흑막은 멋져야 하는 법이다.

‘졸렬함’이라니 우리 아빠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 1위가 아닌가.

방금 아빠가 한 말대로 조용히 사는 거?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

틸라 농사가 성공한 덕분에 왕국이 당장 파산할 정도로 어렵지는 않으니까. 계속 농사만 지어도 그럭저럭 왕국이 굴러갈 테다.

그러나 그건 나의 방식이 아니다. 한번 게임을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나는 아빠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빠가 걱정하시는 건 알아요. 위험한 일을 할 생각은 없어요.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빠는 반신반의하는 반응이었다.

“안젤리카, 로디 실로프에게서 몬스터의 핵 여러 개를 받았더구나. 던전에 그걸 사용하려는 게 아니란 말이니?”

“몬스터를 던전에 풀어놓으려는 건 맞아요.”

“그러면……!”

아빠의 낯빛이 단숨에 어두워졌다. 나는 틈을 두지 않고 이어 말했다.

“하지만 모험가들을 던전으로 유인해서 그들에게 겁을 주고, 골드와 아이템을 뜯으려는 건 아니에요. 그런 건 멋지지 않으니까요.”

“그러면 안젤리카, 무얼 하려는 거니?”

그때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아빠의 걱정을 덜어 줄 겸 더 멋진 던전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랄까.

이름하여 <데네브 왕국 발전을 위한 제안서~고대 던전 편~>!

나는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치며 제안했다.

“아빠, 그럼 아빠가 직접 상황을 지켜보는 건 어때요?”

“내가…… 직접?”

“네, 아빠가 던전에서 지켜보다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저를 구해 주면 되잖아요!”

“그래, 알겠다. 대신 절대 위험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네! 후후, 분명 만족하실 거예요!”

* * *

오늘도 데네브 왕국에 택배 배달을 하러 온 모험가 제랄드는 마을 광장에 내리자마자 깜짝 놀랐다.

늘 조용하던 데네브 왕국의 마을이 오늘따라 시끌벅적했다.

“어, 택배 아저씨! 마침 잘 왔수다.”

자주 택배를 시키던 단골 토마스가 제랄드를 알아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택배 아저씨가 아니라 모험가라니까. 그보다 오늘은 왜 이리 북적거려요?”

“이거 받으쇼. 지금 가면 딱 오픈 시간이겠네.”

“아니, 잠깐! 토마스 씨, 택배 가져가야죠!”

애타게 불렀지만 토마스는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진 다음이었다.

제랄드는 방금 토마스가 건넨 전단지를 읽어 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오싹오싹! 스릴 넘치는 모험이 기다리는 고대 던전……?”

갑자기 웬 고대 던전일까. 제랄드는 더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전단지를 꼼꼼하게 훑어 내렸다.

[오픈 기념! 10회 패키지 결제 시 특별 할인 혜택.

초보자도 도전 가능!

클리어 시 호화 보상 증정!

지금 당신의 모험심을 시험하세요!]

등등…….

상투적인 광고 문구만 가득할 뿐.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건지는 불분명했다.

그러나 제랄드는 가슴속에 어떤 뜨거운 감정이 흘러넘치는 것을 느꼈다.

[지금 당신의 모험심을 시험하세요!]

전단지의 마지막 줄 문구가 마치 빛을 내는 듯 눈에 아로새겨졌다. 꼭 자신의 마음을 읽고 쓴 듯한 문구가 아닌가.

“지금인가…….”

지금이 바로, 모험가가 된 이래로 쭉 동경했던 멋진 모험에 뛰어들 때가 아닌가?

좋아, 가 보자. 이곳이야말로 나의 위대한 모험의 출발점이 될 테다.

그런데…….

“어엉?”

전단지에 표시된 던전 위치로 간 제랄드의 눈앞에 예상에서 까마득히 벗어나는 광경이 펼쳐졌다.

스산하고 음침한 던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알록달록한 깃발과 리본 장식으로 화사하게 꾸민 던전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뿐이랴.

“자, 오세요! 얼른 오세요! 곧 입장 마감합니다!”

입구에서 큰 소리로 외치며 호객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호객꾼에게 자꾸만 시선이 갔다. 신기하게 존재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왜인지 왕성의 경비병 옷을 입고 있었지만…….

“거기 형씨도 참가할 거임까?”

그때, 제랄드를 발견한 호객꾼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니요, 저는 그냥 잠깐 구경만…….”

강한 호객 행위는 쥐약이다. 거기다 멋진 모험을 기대하고 왔는데 어째 분위기가 미심쩍다.

제랄드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호객꾼이 더 빨랐다.

“에이,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려고? 보아하니 꽤나 실력 있는 모험가 같은데.”

“네? 제가 그래 보이나요?

“으하하핫! 그럼, 그럼! 그 장비도 그렇고 눈빛이 보통 사람하곤 다르구만! 우리는 당신 같은 용사를 찾고 있었어.”

“하하……. 감사합니다.”

칭찬을 들어서 기분 나쁜 사람은 없을 테다. 여태껏 들어 본 적 없는 칭찬에 제랄드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어때, 형씨. 데네브 왕국까지 왔으니 기억에 남을 체험을 하고 가야 하지 않겠어? 내가 특별히 싸게 해 줄게.”

“아니요, 그건 좀.”

칭찬은 칭찬이고 거절은 별개다. 제랄드는 단호하게 거절하려 했지만 호객꾼은 끈질겼다.

“뭐? 알았어, 알았어. 금화 한 닢에 어때?”

“생각 없어요.”

“에이, 기분이다. 은화 50닢! 형씨한테만 특별히 은화 50닢에 줄게. 형씨같이 실력 있는 모험가가 있어야 분위기가 산다고.”

실력 있는 모험가.

그 말에 제랄드가 움찔했다. 저도 모르게 입술 끝이 위로 올라간다. 호객꾼은 그 틈에 “한 분 들어가십니다!”라고 외치며 제랄드의 등을 밀었다.

얼결에 안으로 들어왔는데,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났다.

냄새가 나는 쪽을 보니 나른한 인상의 상인이 밀전병에 싸서 구운 틸라를 팔고 있었다. 주문이 꽤 밀렸는지 옆에서 요리사가 끊임없이 불 위에 재료를 올리는 중이었다.

이 분위기는, 그러니까…….

“……유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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