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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33)화 (34/133)

33화

마음을 정한 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제랄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제랄드 아저씨, 바쁜 거 같던데 어디 가는 길이었어요?”

“어? 그건 말이다.”

나는 옆에 있는 니키를 가리켰다.

“얘가 길 잘 알아요. 얘한테 물어보세요.”

“그럼 아가야, 토마스라는 사람은 어디 사는지 아냐?”

“토마스? 저기 오른쪽에 있는 빨간 지붕 집이야.”

“고맙다. 잠깐만 기다려라.”

제랄드는 말의 등 위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들고 토마스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문 앞에 상자를 놓고 벨을 눌렀다. 잠시 뒤, 집에서 토마스가 나와 제랄드가 내민 서류에 사인하고 상자를 가져갔다.

대체 뭘 하는 걸까? 택배 배달로밖에 안 보이는데.

비슷한 일이 몇 번 더 반복되었다. 제랄드는 니키에게 길을 물어본 뒤 집집마다 물건을 배달하고 돌아왔다.

뒤늦게 나는 제랄드의 상태창을 확인해 보았다.

[이름 : 제랄드

직위 : 일반 모험가(C)

소속 : 에메랄드 모험가 길드

레벨 : 31

특성 : 성실한 배달원(D)]

내 예상대로 그는 레벨이 제법 높은 모험가였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성실한 배달원(D)’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진짜 택배 배달을 하는 게 맞았다는 이야기다.

“제랄드 아저씨, 모험가라고 했는데 왜 택배를 배달해요?”

“……!”

제랄드가 흠칫 놀랐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말이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슬픈 사연이 있다.”

“궁금해요. 이야기해 주세요. 니키, 니키도 궁금하지?”

“어? 어어, 궁금해!”

내 재촉에 니키가 얼떨떨하게 맞장구를 쳤다. 나와 니키의 눈빛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제랄드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언젠가 마왕을 해치우는 용사가 되고 싶었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로 슬픈 이야기는 아니었다.

제랄드는 세계의 신비를 밝혀냈다고 하는 전설 속의 모험왕을 동경해서 모험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멋지게 세계를 탐험하고, 언젠가는 마왕을 해치우는 훌륭한 용사가 되리라.

부모는 제랄드에게 형처럼 상회에 들어가 상인이 되거나 잡화점이라도 차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시 젊고 혈기 넘쳤던 제랄드는 호기롭게 생각했다.

상인? 잡화저엄? 그런 안정적인 일에는 로망이 없다. 한 번 사는 인생, 원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꿈은 오직 모험!

낯선 세계의 문을 두드리고, 나쁜 놈들을 물리치고, 경이로운 신비를 발견하는 모험가만이 그의 길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냉정했다.

나는 거기까지 듣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요? 나쁜 사람들이 괴롭히기라도 했나요?”

“아니, 그건 아니다. 세상이.”

“세상이?”

“세상이 너무 평화로워…….”

“네?”

모험가가 된 제랄드는 스릴 넘치는 모험과 멋진 탐험, 정의를 관철하기 위한 싸움을 기대했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도 평화로웠고, 모험가가 활약할 장소는 적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일이 없었다.

모험가 길드에 이름을 걸어 놓고 있었지만 들어오는 의뢰는 적었다. 겨우 의뢰를 받아도 사소한 트집이 잡혀 보수가 깎이기 일쑤였다.

잡다한 물건 배달 따위의 의뢰를 받을 바에야 자유롭게 모험을 떠나고 싶었지만, 동료가 모이지 않았다.

“응? 던전 탐험? 요즘 시대에? 난 됐어.”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봐. 모험가라면 탐험을 해야지!”

“아, 나 경비 일하러 갈 시간이네. 그럼 이만.”

“잠깐만……!”

모험가 동료들은 쉬운 의뢰만 받아 돈을 버는 데 열중했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다나.

“모험가의 탐험 정신은 다 어딜 간 건지……!”

제랄드가 분노 섞인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에게도 냉정하게 다가왔다.

아무리 괜찮은 실력과 좋은 장비를 갖추었어도 의뢰가 없으면 돈을 벌 수 없다.

단골 여관과 식당에서는 제랄드에게 빨리 외상값을 갚으라고 성화였다. 큰맘 먹고 구입한 고성능 장비의 할부 값도 남아 있었다.

결국 제랄드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의뢰를 받기 시작했다. 대부분 물건 배달이나 건물 경비 등, 경이로운 모험과는 하등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제랄드가 무거운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잡화점이나 차릴 걸 그랬어. 이층집을 지어서 1층은 잡화점, 2층은 살림집으로 하는 거지.”

“그런데 왜 안 차렸어요?”

“아저씨는 리어 왕국 출신이거든. 거기는 가겟세가 비싸서 잡화점을 차릴 돈이 없었어.”

“저런…….”

나와 니키는 제랄드 아저씨의 어깨를 토닥토닥해 주었다.

“그래도 요즘 뜨는 데네브 왕국에 오면 멋진 모험 거리가 있을 줄 알았는데.”

제랄드는 스릴 넘치는 모험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듯 턱을 괴고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민들이 붉게 꽃을 피운 틸라를 가꾸는 평화로운 풍경만 보였다. 어디에도 모험의 ‘모’ 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크흑, 모험의 멋짐을 모르는 사람들이 불쌍해!”

제랄드가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지만 공허할 따름이다. 저 모습을 봐서는 마왕을 물리치는 용사가 되기는 요원할 듯했다.

우리 아빠를 해치울 일은 없을 것 같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할지…….

이렇듯 제랄드 아저씨는 고민이 많아 보였지만, 그보다 가장 큰 문제는…….

“안젤리카.”

“……!”

나는 깜짝 놀라 어딘가에 몸을 숨기려 했다.

그러나 마을 광장은 황량한 나머지 몸을 숨길 만한 물건 하나 없었다.

“안젤리카 님, 부르는데.”

“꼬마 아가씨 부르는 거 아냐?”

니키는 물론이고 심지어 제랄드도 눈치라고는 없었다.

나는 몸을 숨기려는 무의미한 노력을 그만두고 고개를 돌렸다. 아빠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젤리카, 여기 있었구나. 니키도.”

어떻게 알았지? 절대 안 들키도록 조심해서 나왔는데!

“아빠, 그게……. 요즘 모험가가 늘어났다고 해서, 궁금해서 나왔어요.”

“안젤리카가 말없이 없어지면 아빠가 슬프단다. 아빠가 싫어서 없어진 줄 알았다.”

그럴 일은 없다.

왕국에서 도망치라는 퀘스트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고 왕국을 SSS급으로 발전시킬 때까지 절대 떠날 수 없었다.

심지어 아빠를 싫어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크로셀 데네브는 <마.왕.꾸>를 플레이할 때 내 최애캐였다고.

그런데 아빠는 깊은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안심한 듯도 슬픈 듯도 한 묘한 표정이었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아빠는 나를 너무 과보호한다.

아니, 이건 과보호라기보다는, 뭐랄까.

꼭 내가 없어질까 봐 걱정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빠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으윽, 시무룩한 아빠의 표정을 앞에 두니 양심이 아파 왔다.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앞으로 미리 말하고 나올게요.”

“그래, 꼭 그러렴.”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생각나 황급히 덧붙였다.

“아, 아빠, 니키한테 화내지 마세요. 니키는 그냥 내가 억지로 데리고 나온 거예요.”

“아빠가 화낼 리가 있겠니. 자, 들어가자. 니키도 같이.”

아빠는 나를 안아 들려다가, 내 옷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넘어진 탓에 스커트 자락에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안젤리카, 옷은 왜 더러워졌니? 무슨 일 있었니?”

그때 제랄드가 앞으로 나섰다.

“그게, 제가 서두르다가 따님이랑 부딪혔어요. 죄송합니다.”

“당신은……?”

한순간에 아빠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웃지 않는 크로셀 데네브는 굉장히 서늘해 보인다.

깜짝 놀란 제랄드가 황급히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제랄드라고 합니다. 수상한 사람은 아니고요. 에메랄드 길드 소속 모험가입니다.”

“아. 그렇군.”

“언젠가 마왕을 해치우는 용사가 되고 싶지만……. 오늘은 그냥 물건을 배달하러 왔슴다. 하하하핫!”

제랄드는 넉살 좋게 웃고 있었지만 나는 심장이 콩닥콩닥했다.

대놓고 언젠가 아빠를 물리치겠다고 하는 모험가에게 아빠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래. 자네도 다시 이곳에 왔군.”

응?

아빠는 잠시 의아한 말을 했지만, 곧 경계를 거두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제랄드와 악수를 나누었다.

“하는 일 잘되길 바라겠네.”

거기다 흑막다운 면모를 보이기는커녕 제랄드에게 덕담까지 하는 거 아닌가.

‘에휴, 그럼 그렇지.’

오늘도 우리 아빠는 다정하고 상냥했다.

* * *

“왕녀님,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도 기운 없어 보이는 로디가 서 있었다. 틸라를 추가로 매입하기 위해 방문한 모양이다.

“아, 로디구나.”

나는 다시 고개를 창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턱을 괴고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어두우신데요…….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있지, 아주 큰 고민이.”

창밖의 풍경은 오늘도 변함없이 평화로웠다.

날씨는 맑았고 하늘은 푸르고 햇볕은 따사로웠다. 그러나 내 마음은 먹구름이 낀 것처럼 우중충한 상태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무슨 고민이길래 그렇게 한숨이세요?”

“궁금해? 듣고 싶어?”

“아니요……. 사실 그 정도로 듣고 싶은 건 아닌데요…….”

“이미 늦었어. 그냥 들어.”

“네에…….”

누군가와 이 고민을 나누면 마음이 가벼워질지도 모른다. 나는 창가에 둔 발 받침대에서 내려온 다음 이 무거운 심정을 토로했다.

“아빠가 너무 착해서 고민이야.”

“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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