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32)화 (33/133)

32화

왕성 앞 마을에는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집집마다 뒷마당에 가득한 붉은 꽃 덕분에, 전에 왔을 때보다 마을이 훨씬 화사해졌다.

나는 이 풍경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붉은 꽃은 흑막 왕국과 비주얼적으로 잘 어울리잖아.

뭐, 그 실체는 그냥 달고 맛있는 틸라의 꽃이지만.

틸라 재배가 잘되었기 때문인지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밝았다. 다행이다.

앞으로 SSS급 흑막 왕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왕국민들의 지지율도 중요하다. 우후후, 그러니 점점 더 잘 살게 해줄 테니 각오하라고.

그럼 이제 모험가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할 텐데…….

“안젤리카 님, 어디로 갈 거야?”

마을의 중앙 광장에 멈춰 선 채 니키가 물었다.

예로부터 모험가 하면 마을의 여관에 모이는 법이다. 여관의 1층 식당에서 배를 채울 겸 방문했다가 정보를 얻고 의뢰를 받기도 하겠지.

이건 판타지 배경 게임의 상식이자 법칙이다.

그러니 왕국에 방문한 모험가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여관에 가야 할 텐데.

“니키, 여관은 어디야? 이 마을 여관으로 안내해 줘.”

“응? 그런 거 없는데?”

“뭐?”

“원래 여기는 구석이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잖아. 그런데 여관이 왜 있겠어?”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틸라 재배에 성공하기 전, 데네브 왕국은 외진 데다가 별다른 특색도 볼거리도 없었다. 자연히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시피 했으니 여관이 생길 리가 없었겠지.

맙소사, 판타지 배경 게임의 국룰인 여관이 없다니, 그럼 어디로 가야 하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안을 찾아냈다.

“그럼 식당으로 가자. 마을에서 제일 큰 곳으로.”

어쨌건 모험가들이 여기까지 왔으면 밥은 먹고 가겠지.

그러나 니키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식당도 없는데?”

“뭐라고? 왜?!”

“외식할 사람이 없는데 식당이 있을 리가 없잖아.”

‘이 마을, 생각했던 것보다 더 황량했구나…….’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상태창을 열었다. 그리고 [데네브 왕국 종합 정보] 메뉴에서 [상세 정보 보기]를 눌러 보았다. 곧 눈앞에 새로운 창이 나타났다.

[데네브 왕국 발전 현황 리포트

경제 : 2 레벨

※ 주로 틸라를 재배합니다. 풍작이 예상됩니다. 그 밖의 산업은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상업 : 1 레벨

※ 간신히 물물 교환을 하는 수준입니다.

기술 : 1 레벨

※ 마법? 그게 뭐죠?

문화 : 1 레벨

※ 왕국민들은 예술에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생각보다 처참한 상태창의 내용에 놀라 눈을 끔뻑였다.

‘간신히 물물 교환을 하는 수준이라고……?’

왕국에 방문하는 모험가가 늘어난 것은 분명 호재였다.

마침 틸라 재배가 풍작을 맞이해 마을의 재정 사정에도 여유가 있을 테다.

여관과 식당, 무기점, 잡화점, 포션 상점, 기념품 가게, 꽃집 등등……. 모험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를 왕창 열어서 한 몫 챙기기 좋은 상황.

그러나 간신히 물물 교환을 하는 수준의 상업 레벨로는 당장 모험가들로 돈을 벌 수가 없다.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보고만 있어야 하다니.

‘산 넘어 산이구나.’

나는 한숨을 삼키며 상태창을 끄고 니키에게 물었다.

“여관이랑 식당이 없으면 모험가들은 어디서 먹고 자?”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노숙이라도 하지 않을까?”

그때, 마을 광장의 벤치에 앉아 있는 모험가 세 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옆에 말을 묶어 두고 잠시 쉬는 중이었다.

마침 잘됐다. 평범한 아이인 척 저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데네브 왕국에 왜 왔는지 알아내야겠다.

저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테다.

살금…….

“안젤리카 님, 어디 가?”

“쉿! 니키, 조용히 따라와.”

“어? 어어, 알았어.”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모험가들에게 다가간 뒤 자연스럽게 말을 걸려는 찰나였다. 모험가 중 한 명이 불쑥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찌 된 게 밥 먹을 데 하나 없냐.”

“그러게나 말이다. 여관도 없어서 자려면 노숙해야 한대.”

“틸라를 재배하는 왕국이라고 해서 왔는데 별로 볼 것도 없고. 영 심심하네.”

“노잼 왕국…….”

“뭐 재밌는 일 좀 없나.”

“갈까? 배도 고픈데 사달멜리크로 가서 밥이나 먹자.”

“그래. 가자, 가. 에잉, 이런 노잼 왕국.”

모험가들이 벤치에서 일어나더니 말에 올라탔다.

“자, 잠깐만요. 언니, 오빠들, 잠깐……!”

애타게 불렀지만 이미 늦었다. 말을 탄 모험가들은 지체 없이 떠났고 이미 손톱만큼 작아진 다음이었다.

“……이럴 수가.”

“안젤리카 님,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저렇게 순식간에 떠나 버리다니.

이대로는, 이대로 가다가는…….

SSS급 흑막 왕국이 될 예정인 우리 왕국이 노잼 왕국이라는 오명을 쓸 테다.

안 돼. 모험가들을 공포에 떨게 할 멋진 흑막 왕국(예정)에 그런 멋없는 칭호를 붙일 수는 없다.

띠링!

절망에 빠진 내 앞에 새로운 상태창이 나타났다.

[<서브 퀘스트> 모험가 대발생!

‘소박한 왕국(E)’에 도달하여 왕국에 방문하는 모험가가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식당과 여관조차도 없는 썰렁한 광경에 모험가들이 실망했습니다.

왕국의 상업을 발전시켜 손님을 유치합시다.

남은 시간 : 66일

달성 조건 : 왕국의 상업 레벨을 2 이상으로 올리기

보상 : ???

실패 시 : 없음]

서브 퀘스트라 그런가? 보상은 ‘???’인 데다 실패 시 페널티도 따로 없었다.

장차 왕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차피 상업 레벨 업은 필수다. 이건 나중에 상황이 되면 클리어하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상태창을 끄려던 때였다.

마을 광장으로 한 남자가 말을 달려 들어섰다.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지 그는 말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광장을 가로질렀다.

문제는 남자가 서두르던 나머지 미처 나와 니키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퍽!

“아코!”

남자의 팔이 내 등을 쳤다. 어찌나 팔이 굵고 단단한지 살짝 부딪혔는데도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철퍼덕하고 개구리처럼 바닥에 넘어졌다.

“헉, 안젤리카 님, 괜찮아?!”

“아, 아야야…….”

“으아아! 아가야, 괜찮냐?”

나를 친 남자가 당황하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내 옷에 흙먼지가 묻은 곳을 털어 주면서 사과했다.

“미안하다. 아가가 작아서 아저씨가 못 봤다. 다친 데는 없냐?”

“아가 아닌데…….”

확실히 내 몸은 열 살짜리이긴 하지만, 아가 소리를 들을 만큼 작지는 않다고!

남자가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아가야, 그거 알아?”

“뭐를요?”

“귀여우면 다 아가야.”

내 참, 어이가 없었다.

“정말 미안하다. 울지도 않고 장하네.”

남자는 내가 정말 다치지 않았는지 살피며 거듭 사과했다. 나는 잠시 그런 남자의 모습을 관찰했다.

나이는 30대 중반쯤 될까.

얼굴은 서글서글하니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몸은 달랐다. 키가 크고 덩치가 우락부락했다.

온몸에 근육이 탄탄하게 잡혀, 팔뚝이 내 몸통보다 굵은 것 같았다.

그런 근육질의 몸을 제법 값나가는 갑옷이 감쌌다. 허리에 찬 검도 비싸 보인다. 꽤 강한 모험가가 분명했다.

이런 모험가가 우리 왕국에는 무슨 볼일일까? 나는 호기심을 느꼈다.

“좋아, 다행히 다친 데는 없네! 아저씨가 집에 데려다줄게.”

“아저씨 바쁜 거 아니야?”

옆에서 니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아까 어디를 급히 가는 것 같았지.

그러나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엉? 뭐, 그렇긴 한데 아가들이 먼저지. 너희, 집이 어디냐?”

“집은 저기, 저쪽…….”

나는 남자가 묻는 대로 왕성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려는 니키의 손을 황급히 붙잡아 내렸다.

“안 돼. 니키, 수상한 사람한테 집 알려 주면 안 된다고 했어.”

“수상하다니……. 아저씨는 수상한 사람이 아닌데.”

“아저씨는 모험가예요?”

“으하하핫! 그래, 그렇단다. 티가 나나? 나는 모험가 제랄드라고 한다.”

제랄드는 길드에 등록된 모험가임을 증명하는 증표를 보여 주며 씩 웃었다.

“모험가인데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모험이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그것이 바로 모험가지.”

니키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재차 물었다.

“그럼 모험은 왜 하는 거야?”

“그건 물론!”

“물론?”

니키와 내가 뜸을 들이는 제랄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언젠가 멋지게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서지!”

“네에에?!”

나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마왕이면 우리 아빠를 물리친다는 뜻이잖아!

너무 착해진 나머지 가끔, 아니 자주 까먹지만 우리 아빠는 <두근두근 마법 왕국 꾸미기> 내에서 대마왕이라고도 불렸다.

당연하다. 크로셀 데네브는 대마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강하고, 또 피도 눈물도 없었으니까. 그야말로 최강이자 최악의 흑막.

비록 지금은 버그로 착해져 버려서, 오늘 아침만 해도 내 머리카락을 묶어 주었지만.

그런 우리 아빠를 해치우겠다고? 나는 제랄드를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잠깐. 발상을 전환해 보자.

눈앞의 이 모험가, 제랄드는 꽤 강해 보이기는 했다. 저 근육 하며 번쩍번쩍한 장비 하며 보통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 아빠가 더 세다. 100% 우리 아빠가 이긴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적자의 등장으로 인해 아빠한테 흑막의 마음이 깨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용사와 마왕의 대결, 멋지잖아.

마왕이 이기겠지만!

좋아, 정했다.

우선 제랄드가 우리 왕국에서 뭘 하는지 파악하고, 그다음에 잘 유도해서 아빠와 만나게 하는 거다.

‘후후후…….’

내가 생각해 냈지만 실로 사악한, 흑막의 외동딸다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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