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4장. 모험가 대발생!
“응? 그게 정말이야?”
왕성 정원의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사라를 향해 고개를 들고 되물었다. 그만큼 방금 사라가 한 말이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사라는 상냥하게 웃으며 내게 다시 설명해 주었다.
“네. 요즘 왕국에 모험가가 많이 늘어났답니다.”
“갑자기 왜? 이런…….”
볼 것도 없는 황량한 왕국에.
……라고 말하려다가, 황급히 뒷말을 삼켰다.
그래도 이제 F급 찢어지게 가난한 왕국이 아니라 E급 소박한 왕국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SSS급 흑막 왕국으로 성장할 텐데 나부터 비하할 수는 없지!
“요즘 틸라가 아주 인기가 많대요. 틸라를 재배하는 우리 왕국도 덩달아 인지도가 생겨서, 호기심 많은 모험가들이 찾아오는 모양이에요.”
“그렇구나. 흐음…….”
<두근두근 마법 왕국 꾸미기>에서 모험가 캐릭터들은 중요한 요소다.
플레이어는 다양한 모험가 캐릭터를 고용해서 미개척지로 파견한다. 모험가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지역의 정보나 보물을 찾아서 돌아온다. 탐험에 성공하면 좋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지만, 실패하면 반대로 페널티를 얻는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정석 플레이 때의 활용법이고.
흑막 플레이에서는 조금 다르다.
흑막 플레이에서 반드시 거쳐 가는 필수 테크트리 중에 던전 운영업이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던전에 적당한 보물을 숨긴 뒤 함정을 만들고 몬스터를 풀어 둔다. 그러면 보물을 노리고 모험가들이 부나방 떼처럼 달려든다.
그 모험가들을 던전에 가둬서……. 뭐, 쉽게 말하자면 모험가들을 삥 뜯는 것이다.
‘후후후……. 모험가들이 느끼는 커다란 공포와 절망이 그대로 포인트로 전환되는, 실로 흑막다운 사악한 방법이지.’
마침 데네브 왕국의 남쪽에는 고대 던전이 하나 있다. 이 던전에 적당한 미끼를 설치하면 왕국에 나타난 모험가들을 삥 뜯을 수 있을지도.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계획을 보류했다.
‘아니야, 아직 일러.’
던전을 운영하는 일은 손이 많이 간다. 몬스터를 조달해야 하는 데다가 함정을 설치하고 보물도 넣어 둬야 하고 등등……. 틸라로 벌어들인 돈이 있긴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원작, 그러니까 <마.왕.꾸>를 플레이할 때도 던전을 열 때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빨라도 안젤리카가 열세 살은 되었을 때였으니까.
‘……아!’
가만, 흑막(이 될 예정)인 아빠가 있으니까 더 간단한 방법이 있잖아?
“그래서 안젤리카 님, 마을에 모험가가 늘어 위험할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마을에 나가실 때 꼭 저랑 함께 가셔야…… 안젤리카 님?!”
“사라, 나 먼저 갈게!”
나는 얼른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사라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시는 건가요, 안젤리카 님!”
“아빠한테!”
나는 잠시 내 방에 들렀다가 아빠가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문을 두 번 노크한 뒤 안쪽을 향해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저 왔어요. 안젤리카예요!”
“우리 천사 왔구나. 얼른 들어오렴.”
오늘도 아름답고 다정하고 상냥한 아빠가 천사처럼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나는 후다닥 아빠에게 달려가며 눈을 빛냈다.
지난번 같은 실패를 반복할 수는 없다.
로디를 경매에서 이기게 하는 데 몰두하느라 그만 제일 중요한 목적을 까먹어 버렸다. 바로 아빠를 흑막으로 만드는 것 말이다.
이번에는 다르다.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한다는 목적도 달성하고 말겠다.
그리고 목적 달성을 위한 완벽한 계획이 지금 내 손안에 있다.
“아빠, 이걸 봐 주세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아빠에게 내밀었다. 조금 전 방에서 급하게 쓰느라 글씨는 비뚤비뚤했지만 내용은 완벽하다고 자부한다.
“안젤리카, 이건 뭐니?”
“우헤헤, 보시면 알아요!”
아빠가 살짝 눈가를 찌푸리고 비뚤비뚤한 내 글씨를 읽었다.
“데네브 왕국 발전을 위한 제안서…… 모험가 편?”
“네! 요즘 모험가가 많이 늘었다고 들었어요. 그 모험가들을 어떻게 할지 방법을 생각했어요.”
“안젤리카……. 정말 대견하구나.”
“얼른 다음 장을 넘겨 보세요, 아빠.”
아빠는 내가 건넨 종이의 뒷장을 펼쳤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건……. 악몽을 불러일으키다니……?”
“네! 왕국에 방문한 모험가들에게 환영 마법으로 공포를 심어 주는 거예요!”
“…….”
아빠는 말없이 양손으로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서랍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어 안에 든 것을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얼결에 받아먹고 보니 말린 레몬에 설탕을 입힌 과자였다. 새콤달콤해서 맛있었다.
“맛이 어떠니? 우리 천사가 오면 주려고 준비해 두었단다.”
“맛있어요! 그보다 아빠, 환영 마법으로 모험가들을…….”
“많이 있으니 하나 더 먹으렴.”
“네? 그럼 하나만 더…….”
바삭.
바삭바삭.
아빠가 자꾸 권하는 바람에 결국 말린 레몬 과자 한 봉지를 다 먹어 버렸다.
“아빠, 그래서 말인데요…….”
“안젤리카, 머리카락이 헝클어졌구나.”
“어? 정말요? 아까 뛰어와서 그런가 봐요.”
“그러다 넘어지면 어떡하려고, 조심해야지. 아빠가 다시 묶어 줄 테니 가만히 있으렴.”
“네? 아, 네…….”
아빠는 섬세한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완벽하게 땋아 주었다.
그 후 이번에야말로 본론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안젤리카, 아빠랑 카드 게임을 하지 않겠니?”
이번에는 아빠가 서랍에서 카드 한 벌을 꺼내며 말했다. 재미있을 것 같지만, 지금은 그보다 시급한 주제가 있었다.
“아니요. 아빠, 그보다 모험가들이…….”
“사실 아빠는 이제껏 카드 게임을 해 본 적이 없단다.”
아빠가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고용인들은 내가 어렵겠지. 안젤리카가 아빠랑 같이 카드 게임을 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으윽, 아빠가 서글픈 표정을 짓자 파괴력이 엄청났다. 내가 그런 아빠의 부탁을 거절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뭐, 그냥 카드 게임이니까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좋아요. 그럼 같이 해요!”
“안젤리카, 고맙구나. 자, 그럼 이쪽에 앉으렴.”
종목은 원 카드로 정했다. 규칙이 간단해서 초보자도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임은 종류를 막론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 아무리 아빠가 초보자라고 해도 냉정한 승부의 세계에서 봐줄 수는 없다.
그런데…….
“다시! 다시 해요. 이건 말도 안 돼요!”
“그럼 다시 섞으마. 자.”
“으으……. 한 번만 더…….”
놀랍게도 아빠는 카드 게임을 엄청나게 잘했다. 천부적인 원 카드 플레이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내리 열 판을 진 다음, 이번에는 내가 카드를 섞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스물한 번째 판. 드디어 내게 기회가 왔다.
“어, 하트 A! 이겼다. 와아!”
“하하하……. 안젤리카, 축하한다. 그보다 슬슬 배가 고프겠구나. 아빠랑 같이 점심 먹으러 갈까?”
“네, 좋아요!”
결국 나는 아빠와 한참 동안 카드 게임을 한 뒤 점심을 먹고 그림을 그리다가 정원을 산책한 다음 간식까지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안젤리카 님, 재밌게 놀고 오셨나요? 이제 목욕하고 주무실 준비를 할까요?”
나는 사라가 하는 말을 듣고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앗……! 이게 아닌데!’
아, 이번에도 내 완벽한 제안서가 까인 거구나. 직접적으로 까면 내가 상처받을까 봐 착한 아빠가 말을 돌린 거였어.
중간부터는 카드 게임에 열중하는 바람에 전혀 눈치 못 챘다.
현란한 손 기술로 나를 현혹하다니……. 무섭다, 이 흑막(이 될 예정)!
후우, 뭐…….
그렇게 쉽게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최강이자 최악의 흑막(이 될 예정)의 외동딸인 내가 쉽게 포기할 수는 없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우선, 왕국에 나타난 모험가들이 어쩌고 있는지부터 알아봐야겠다.
* * *
“니키, 잠깐 이리 와 봐.”
나는 왕성의 낡은 성벽 앞에서 니키를 향해 손짓했다. 틸라 밭을 살피고 있던 니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안젤리카 님?”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검지를 펴서 입술 앞에 대고 소곤거렸다.
“쉿! 조용히. 다른 사람 눈에 띄면 안 돼.”
“어, 어어…… 아, 알았어!”
니키가 조심조심 내게 다가왔다. 긴장한 표정과 지나치게 큰 동작 때문에 오히려 수상해 보인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으음, 이래서 괜찮을까? 그래도 이 일의 적임자는 니키밖에 없다.
“니키, 이거 봐.”
나는 낡은 성벽의 한 곳을 가리켰다. 절묘하게 수풀에 가려진 위치에 개구멍이 있었다. 개구멍은 작았지만 나나 니키 정도의 아이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정도는 되었다.
‘아무리 F급 낡고 좁은 왕성이라지만 개구멍이 있다니, 우리 왕국 이대로 괜찮은가.’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몰래 왕성에서 나가는 데는 이 개구멍이 딱이었다. 후후, 미리 이 개구멍을 찾아 두길 잘했다.
“나가자.”
“뭐? 안젤리카 님, 몰래 마을에 가려고? 혼나는 거 아냐?”
“괜찮아. 저녁 먹기 전에만 돌아오면 돼. 얼른!”
나는 니키의 손을 잡아끌고 개구멍 앞으로 간 다음, 먼저 머리를 집어넣었다.
‘미안, 사라.’
그치만 모험가들이 어쩌고 있는지 살펴보려면 몰래 나가는 쪽이 편하단 말야. 니키도 같이 가니까 한 번만 봐줘.
“빨리 와, 니키.”
“어어, 안젤리카 님, 같이 가!”
니키가 허둥지둥 개구멍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우리는 곧장 왕성 앞 마을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