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로디를 쳐다보았다.
로디가 이런 말을 하는 의도를 알 수 없어서였다.
“제가 경매에 내놓은 고슴도치 신의 신상……. 왕녀님이 알려 준 위치를 파 보니 바로 나오더군요.”
“와아, 잘됐네! 걱정했었어.”
나는 웃으며 박수를 짝짝 쳤다. 안경 너머의 갈색 눈이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신상에 대한 정보를 왕성 문서 보관고에서 찾으셨다고 하셨죠…….”
“어, 그…… 그런데?”
“왕녀님이 찾으신 보물 지도를 한번 보고 싶군요…….”
“글쎄, 동화책을 찾으려다가 언뜻 본 게 다라. 이젠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어.”
나는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뗐다. 그러자 로디는 낮은 목소리로 긴 설명을 늘어놓았다.
“고대 왕국 시대에는 신상에 신의 파편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답니다……. 그래서 신상에 대해 문서로 기록을 남기는 것을 금했고, 신관들을 통해 구전으로만 전했죠. 그런데 어떻게 보물 지도 따위에 신상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을까요.”
나는 아이다운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젤리카는 어려서 로디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완벽한 어린애 연기였다. 그러나 로디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갑자기 어린애 흉내를 내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왕녀님이 갑자기 저를 찾아와서 경매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보통 열 살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괜스레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왕녀님은 마족이라도 되시는 건가요?”
“……뭐?”
갑자기 이야기가 터무니없는 곳으로 튀었다. 무슨 재미없는 농담인가 했는데 로디의 표정은 줄곧 진지했다.
<마.왕.꾸>의 세계관에서 마족은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존재다. 고대 왕국의 시대에는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살았지만 지금은 마계로 돌아갔다나 어쨌다나. 게임을 실행할 때 나오는 오프닝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재미도 없고 스킵은 안 되는데 길기만 한 오프닝이었지…….’
아무튼.
나를 마족 따위라고 의심하다니. 내 참, 나는 그런 것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다. 바로 <마.왕.꾸>의 슈퍼 플레이어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로디의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질려 갔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의심은 풀어 주기로 했다.
“마족은 아니야.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휴우, 다행입니다. 정말 마족에라도 홀린 거 아닌가 했다니까요…….”
진짜 무서웠는지 로디는 잠시 눈을 감고 중얼중얼 기도를 올리기까지 했다. 기가 막혔다.
“뭐……. 왕녀님이 누구든 좋아요. 왕녀님 도움을 받은 김에 자치회를 완전히 갈아 엎었고…….”
“갈아 엎었다고?”
“후후, 네……. 패트릭에게 빼앗긴 아이템을 돌려받으려는데 자꾸 방해하길래……. 패트릭의 로비를 받은 사람들을 정리했어요.”
로디의 얼굴이 후련해 보였다.
사달멜리크 경매가 끝나고 겨우 2주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사이에 패트릭 일을 처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치회까지 건드렸다니 놀랍다.
역시 의욕을 되찾은 로디는 내가 원하던 인재가 맞았다. 나는 씩 웃으며 물었다.
“로디, 내가 마족인지 아닌지 궁금해서 온 거야?”
“그럴 리가요. 살짝 의심하긴 했지만……. 저는 왕녀님에게 관심이 있어요. 정확히는 왕녀님이 하려는 일에요…….”
“…….”
“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왕녀님과 손을 잡고 싶다고 할까요…….”
나는 찻잔의 차를 마시는 척하며 넌지시 로디를 살폈다. 로디의 말이 무척 놀라운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틸라를 유행시킨 뒤 비싸게 팔기 위해 사달멜리크에서 로디를 찾았다. 로디는 우리 왕국과 계약을 맺었으니 내 목적은 이미 이루어진 셈이다.
단순히 우리 왕국과 계약을 맺는 데 그치지 않고, 로디가 나를 도와주면 확실히 이득이기는 하다.
<마.왕.꾸>의 세계는 무척 하드코어 하다.
이 세계에서 왕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우수한 조력자 캐릭터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은, 나와 손을 잡아서 로디에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제 의욕도 생겼겠다, 로디 실로프는 ‘반짝이는 상재’를 지닌 능력 있는 상인이다.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사달멜리크의 자치회를 건드린 점만 해도 그렇다.
비록 말투는 기운이 없고 몸은 비실비실해서 잘 매치는 안 되지만 말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어떤가.
물론 나는 <마.왕.꾸>의 슈퍼 플레이어이자, 최강이자 최악의 흑막인 크로셀 데네브의 외동딸이지만!
이 남자는 그 사실을 모른다. 지금의 나는 왕녀라고 하나 그냥 열 살짜리 어린애일 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약한 어린애.
어쩔 수 없이 내 행동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그의 의중을 확인하듯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상업 도시의 상인들은 계약과 돈의 흐름에 따라 움직일 뿐, 어느 왕국과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뭐, 확실히 그런 편이긴 한데요……. 법률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그런 건 재미없잖아요.”
로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후후……. 유물에 대해 알려 주신 것도 그렇고, 왕녀님은 더 많은 정보를 알고 계신 것이 틀림없겠죠. 그러면 미리 왕녀님께 줄을 대어 놓는 것이 현명하겠죠…….”
“…….”
“물론, 비밀이 많아 보이는 왕녀님 자체에도 관심이 있답니다…….”
로디의 갈색 눈이 반짝거렸다.
비록 몸은 흐느적거리고 얼굴은 졸려 보이는 데다 목소리는 힘없지만, 내 앞에 있는 이자가 본디 상인이라는 실감이 났다.
솔직히 좀 당혹스러웠다.
그래도 기껏 로디 실로프가 나와 손을 잡고 싶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느긋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로디가 짐작하는 대로,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그중에는 로디가 관심 있을 법한 것도 있겠지.”
“흥미롭네요…….”
“그런데 로디는?”
“네?”
“거래는 서로 오고 가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야. 로디는 나한테 뭘 줄 수 있을까.”
“으으음…….”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로디가 곧 답을 내어 놓았다.
“그거 아세요? 박쥐는 소란스러운 밤의 주인이랍니다.”
“……응?”
내가 전에 로디를 만났을 때 말한, <두근두근 마법 왕국 꾸미기> 게임 속 비밀 상점의 암호였다.
게임에서 키보드로 입력할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육성으로 말하자니 꽤 부끄러운 암호다.
“최근에 비밀스러운 부업을 하나 시작했답니다……. 일종의 비밀 상점이랄까요. 쉽게 구하기 힘든 희귀 아이템을 취급합니다…….”
“방금 한 박쥐 운운하는 말은?”
“네, 비밀 상점의 암호예요. 저는 이미 경매 일로 왕녀님께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그러니 왕녀님이라면 언제든지 비밀 상점에 의뢰를 넣으실 수 있어요. 할인도 해 드릴게요…….”
로디가 갑자기 비밀 상점을 시작하다니. 돌고 돌아서 다시 원작의 흐름으로 돌아왔다.
그건 좋은데…….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저기, 로디 다 좋은데.”
“네……?”
“암호 좀 다른 걸로 바꿔 줘.”
“왜요? 저는 전에 왕녀님이 말한 이 문구가 마음에 들었는데요…….”
“으으…….”
비밀 상점을 이용할 때마다 암호를 말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해지는 느낌이었다.
‘주인장, 늘 마시던 것으로.’라든지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라든지 더 자연스럽고 평범한 암호 없어?
내가 곤혹스러워하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로디가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또 하나, 왕녀님께 드릴 게 있어요.”
“응?”
로디는 품에서 금속 뚜껑이 달린 자그마한 손거울을 꺼냈다. 얼결에 그것을 받아 드니 곧장 상태창이 떴다.
[<성녀의 거울>
고대의 성녀가 축복했다고 전해집니다.
진실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패트릭에게 사기당해서 빼앗겼던 성녀의 거울이다. 이 아이템을 되찾았구나.
하지만 이 아이템을 왜 나한테 주려 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눈을 잠시 깜빡이고는 물었다.
“왜 이걸 나한테 줘?”
“원래 이 거울을 사고 싶어 했던 손님에게 팔려고 했었는데요……. 손님이 이젠 필요 없다고 해서 돌아왔거든요.”
“그럼 로디 거잖아?”
패트릭이 적법한 취득 절차 없이 경매에 냈으니, 자연히 경매는 출품 취소가 되었을 거다.
사달멜리크 경매는 매달 열린다. 다음 달에 다시 출품하면 꽤 큰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말했지만 로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녀님이 제게 주신 보물찾기 막대와 정보의 값은 치러야지요. 받아 주세요. 성녀님이 축복한 거울이라 소유자에게 진실을 보여 준다는 전설이 있답니다…….”
“흐음…….”
나는 거울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전설은 전설일 뿐인지 내 얼굴만 비쳤다.
뭐,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지. 꽤 예쁜 디자인이라 마음에 들고.
“고마워. 그럼 잘 받을게.”
그때, 노크와 함께 응접실 문이 열렸다.
“죄송해요. 안젤리카 님, 제가 너무 늦었죠!”
“안젤리카, 로디 씨와 아주 사이가 좋아졌구나.”
“……아빠! 오셨어요?”
아빠가 내 옆에 앉더니 나를 앉아 무릎 위로 올렸다. 나는 꺄르르 웃으며 아빠의 목에 매달렸다.
사라가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복숭아가 담긴 접시를 내 앞에 내려놓고, 새로 차를 끓여 주었다. 얼음을 넣어 차갑게 식힌 차는 상큼하고 맛있었다.
“안젤리카, 아 하렴.”
아빠는 포크로 복숭아 한 조각을 찍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슬쩍 맞은편을 보았다. 로디가 내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