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아빠랑 같이 구경하는 게 재미없어 보이는구나.”
그렇지 않아도 천사처럼 착하게 생긴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짓자 파괴력이 엄청났다. 나는 당황해서 손을 마구 내저었다.
“아, 아니요? 재미있어요. 엄청 재미있는데!”
“하지만 아까부터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지 않니.”
그건 그 악덕 상인들의 복마전에서 아빠를 보호하기 위해서인데…….
“아하하……. 그치만 별로 좋아하는 것도 없고 해서요.”
아빠가 고개를 숙이고 나와 눈을 맞추었다. 애써 슬픔을 감추려는 듯한 표정은 처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빠는 양손으로 내 손을 꼭 붙잡고 천천히 말했다.
“안젤리카, 이젠 원하는 걸 참지 않아도 된단다.”
“그런 건 아닌데…….”
“……안젤리카.”
지금 아빠가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감이 왔다. 여기서 한 번만 더 고개를 저었다가는, 나는 어려운 가정 사정을 신경 써서 떼쓰지 않고 참기만 하는 기특한 아이가 되어 버린다.
안 돼, 그렇게 터무니없는 오해로 아빠를 슬프게 할 수는 없다.
아빠는 그냥 있어도 처연해 보인단 말야!
‘으윽……. 미남이 슬픈 표정을 짓는 걸 보니 가슴이 아파.’
어디 괜찮은 곳 없나? 지금 당장 갈 만한 곳이…….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수많은 상점 중에서 아무 곳이나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와, 저 가게 엄청 궁금하네? 아빠, 우리 저 가게에 가 봐요.”
책 읽는 것처럼 어색한 말투였지만, 아빠의 서글픈 눈빛을 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아빠의 손을 잡아끌며 후다닥 노점 앞으로 향했다.
그런데 내가 고른 곳은 하필이면 이 노점 구역에서 가장 저렴한 곳이었다. 노점에서는 간단한 간식거리를 팔았는데, 재료가 부실한 것이 단가를 아낀 티가 났다.
“안젤리카…….”
지금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불을 보듯 뻔했다.
‘우리 딸, 가정 사정을 생각해서 제일 저렴한 곳으로 오자고 했구나.’
……같은 생각이겠지!
아니, 아니, 아니! 대체 왜 나를 그렇게 대견한 듯 보는 거지? 이제껏 열심히 흑막의 외동딸다움을 어필했는데?
오해가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전에 바로잡아야 했다. 나는 재빨리 적당한 변명을 생각해 냈다.
“그게, 다들 이런 곳에 오면 밖에서 군것질거리를 사 먹는다고 하더라고요. 아빠랑 같이 이런 데 온 거 처음이니까……. 나도 한번 해 보고 싶어서요.”
“그래……. 안젤리카가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다.”
겨우 아빠가 쓸쓸한 표정을 거두고 노점에서 간식을 주문했다.
휴, 착한 아빠 데리고 다니기 진짜 힘들다…….
어쨌건 우리는 간식으로 구운 밀전병을 사서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밀전병은 약간 텁텁했지만 생각보다 맛있었다.
‘밀전병으로 틸라를 싸서 구우면 어떨까? 잘 어울릴 거 같은데……. 틸라가 달콤하니까 밀전병에는 소금을 넣는 거야. 다음에 케나스에게 한번 해 보라고 할까?’
“……안젤리카.”
“네?”
틸라로 새로운 요리를 만들 생각에 푹 빠져 있느라, 나는 그만 아빠의 부름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리렴. 마실 것을 사 오마.”
“네!”
아빠는 손수건으로 내 입가를 닦아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아빠를 기다리는데, 행인 중에 문득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어라?’
키는 나보다 한 뼘이 넘게 컸다.
이제 어린애보다는 소년이라고 불릴 듯한 나이의 남자애가 노점의 손님들을 피해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망토의 후드가 벗겨졌고, 그 바람에 드러난 금발이 오후의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초록빛 눈동자는 이른 봄의 풀잎처럼 싱그러웠다.
옷에는 덩굴무늬 장식이 달려 있었는데, 저 장식을 어디서 보았는지는 금방 기억이 났다.
‘저 문양은 엘레인 공작가에서 쓰는 건데. ……설마.’
세이르다.
세이르 뮨 엘레인.
그러니까, 내가 플레이한 <마.왕.꾸> 게임 속에서 안젤리카의 약혼자였던 소공작 세이르 말이다.
‘이런 곳에서 원작의 약혼자를 만날 줄은 몰랐네.’
아니, 게임상에서는 약혼식을 하던 중에 죽었으니 정확히는 약혼자가 될 뻔한 사이인가?
세이르에 대해 나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 마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못 먹는 감이랄까.’
세이르는 <마.왕.꾸> 게임상 무척 높은 스펙을 자랑하는 캐릭터였다. 외모도 화사한데 모든 능력치가 상위권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리어 왕국 국왕의 조카이자 미래의 엘레인 공작이니 능력, 신분, 돈, 외모 모든 부분에서 빠지는 곳이 없었다.
심지어 게임상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S급 성검의 소유자이기까지 하니,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세이르를 1순위로 영입하고 싶어 할 테다.
그런데 무슨 수를 써도 영입이 안 되었다.
흑막 루트에서는 알다시피 안젤리카와의 약혼식 날 사망한다.
정식 루트에서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도 열여덟 살이 되기 전에 사망해서, 능력이 좋아도 제대로 써먹어 본 적이 없었다.
이쯤 되면 게임사가 플레이어를 약 올리려고 만든 신 포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쓰지도 못할 캐릭터를 왜 엄청난 고스펙에 멋진 외모로 만든 거지? 하여간 망겜 아니랄까 봐.
‘가만, 그런데 왜 세이르가 여기 있지?’
현재 내가 열 살이니까 세이르는 열세 살이다. 열세 살이라면 엘레인 공작가의 저택에 있어야 하는데 왜 느닷없이 경매장에 나타난 걸까.
그때, 세이르가 다시 후드를 깊이 눌러써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노점을 구경하는 척 행인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가 슬그머니 인기척 없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점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고, 극도로 주위를 경계하면서 조심스레 움직인다. 아무래도 경매장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정말 수상한 광경이었다.
‘……아니야. 세이르가 어쩌건 지금 나랑 아무 상관 없잖아. 원작처럼 약혼을 할 것도 아닌데.’
신경 쓰지 말아야지. 여기서 가만히 밀전병이나 먹으면서 아빠를 기다리자.
“…….”
“…….”
안 되겠다, 너무 궁금해서 미치겠다!
근처의 주스 가게에서 주스 주문을 하는 아빠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듯싶었다.
생각해 봤는데, 나는 원래 호기심을 오래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잠깐만 보고 오자.
나는 살금살금 세이르의 뒤를 따라갔다. 세이르는 점점 인기척이 없는 곳으로 가더니, 경매장 건물 옆의 작은 문 앞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신중하게 주위를 살피며 뒤를 밟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저긴 뭘 하는 곳이지? 으으, 안 보여. 조금만 더 가까이…….’
고개를 쭉 빼고 더 자세히 살펴하려는 순간이었다.
“거기, 너. 뭘 하는 거야?”
“으, 으으, 으아악!”
대체 언제 알아차린 거지. 어느새 세이르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두 눈에 의심이 가득했다.
“……수상한 인간이군.”
세이르가 슥, 허리에 찬 검에 손을 올렸다.
아니, 얘 좀 봐. 두 번 수상했다간 바로 칼부림이겠네. 누구보다 수상한 인간에게 수상하다는 소리를 들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선량한 관광객이거든?”
“수상한 사람은 다들 그렇게 말하지.”
“아니, 아니, 아니! 이 먹다 남은 밀전병이나 들고 있는 나를 봐. 얼마나 선량해 보여?”
나는 괜스레 손에 들고 있는 밀전병을 한 입 먹었다. 그러나 세이르의 날카로운 눈빛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속고만 살았어?!”
“…….”
뭐지, 이 반응. 정말 속고만 산 건가.
“선량한 관광객이 살금살금 뒤를 쫓아 와?”
“뒤를 쫓다니,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 그보다, 너야말로 수상하지 않아?”
슥.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세이르가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잠깐, 그 성검 좀 집어넣고 이야기하면 안돼?”
“……뭐?”
세이르의 얼굴에 순식간에 경계심이 드러났다.
‘……아차.’
무슨 일인지 몰라도, 얘 지금 정체 숨기고 있는 거지. 그런데 ‘성검’이라고 아는 티를 냈으니, 이번에야말로 진짜 수상해져 버렸네.
“너, 대체 누구…….”
그때였다.
“안젤리카, 어디 있니?”
등 뒤에서 아빠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나, 나는 아빠가 불러서 이만!”
후다닥!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서 주스를 들고 있는 아빠에게로 갔다.
“아, 아빠! 이따 경매는 어디서 하는 걸까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슬슬 시간이 다 된 것 같구나. 자, 이 주스 마신 다음에 경매장에 들어가자꾸나.”
“네, 헤헤…….”
나는 주스 잔을 받아 들고 슬쩍 뒤를 보았다. 세이르는 이미 떠난 다음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