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지난번 퀘스트처럼 두 가지 루트가 있었다. 나는 각각의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루트 1. 패트릭을 만나기>
패트릭을 만나 정보를 주었습니다.
패트릭은 자신이 소유한 가장 희귀한 아이템을 출품할 것입니다.
보상 : 희귀 아이템]
[<루트 2. 로디를 만나기>
로디를 만나 정보를 주었습니다.
로디의 경매 참가 여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보상 : 플레이어 안젤리카의 마법 능력치 +10]
‘호오…….’
이렇게 루트가 나뉜다 이거지. 그렇다면 훌륭한 흑막의 외동딸이 되기 위해서 내가 선택할 루트는 바로 ‘저거’다.
역시나 내가 말한 시각까지 로디는 오지 않았다.
내 방으로 찾아온 아빠가 말했다.
“슬슬 돌아갈 시각이구나. 마차를 준비시킬 테니 잠시만 기다리렴.”
“아빠, 저 돌아가기 전에 부탁이 하나 있어요.”
“응?”
나는 눈을 빛내며 내 계획을 설명했다.
* * *
아빠가 ‘내 부탁’을 들어주러 간 동안, 나는 패트릭을 만나러 갔다.
왜 패트릭을 선택했느냐고?
당연하잖아. 마법 능력치 10을 올리는 것보다는 희귀 아이템이 더 좋으니까.
거기다, 로디를 선택해도 경매 참가 여부는 알 수 없다며? 나는 보상이 확실한 쪽에 투자하고 싶다.
얼마 전까지 실로프 상회의 자리였던 건물 맞은편. 적당한 계단에 앉아 턱을 괴었다. 잠시 행인 구경이나 하고 있자니 곧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며 걷던 패트릭이 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너, 그 과일 노점에서 본 꼬마 아니냐?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냥 앉아 있어요.”
“설마 나더러 로디 그놈을 도와주라고 하러 온 건가?”
순진한 어린애가 떼를 쓰려 한다고 생각한 걸까. 터무니없는 추측이다. 나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설마요. 로디 씨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그러면?”
“아빠가 복숭아 사러 가서 기다리는 중이에요.”
패트릭이 미심쩍어하며 나를 보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척 본론을 꺼냈다.
“로디 씨가 가게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아빠가 다른 복숭아 가게를 찾으러 갔어요.”
“어엉? 그놈이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재산을 다 빼앗겨서 과일 노점이 아니면 있을 곳도 없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몰라요. 무슨 경매에 나간다던가.”
“……!”
패트릭의 표정이 변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닦달한다.
“꼬마야, 자세히 좀. 무슨 경매? 무슨 물건을 낸다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우승하면 소원을 들어준다면서요. 되게 자신만만해 보이더라구요.”
“뭐, 뭐……!”
“정말 멋져요! 내가 우승하면 레몬케이크 한 판을 다 먹게 해 달라고 할 텐데!”
“나, 나는 바쁜 일이 생각나서 이만.”
패트릭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씩 웃었다.
‘내 참, 누가 삼류 악당 아니랄까 봐 겁은 많네.’
패트릭은 로디가 경매에서 우승하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겠지. 만에 하나 로디가 소원권을 손에 넣으면, 자신을 수사해 달라고 할 테니까.
아무리 자치회가 매수되었더라도, 우승자가 공개적으로 밝힌 소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단순히 소원권을 손에 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치회가 수사하는 척하다가 적당히 뭉갤 가능성이 있다. 거기다 패트릭이 재빨리 성녀의 거울을 숨길 수도 있다. 그래서는 이미 늦는다.
‘패트릭이 성녀의 거울을 내놓게 만들어야 해.’
불안해진 패트릭은 ‘성녀의 거울’을 경매에 내놓겠지. 그거라면 로디가 뭘 내놓든 우승할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즉, 내가 히든 퀘스트의 1번 루트를 따름으로써…….
희귀 아이템도 얻고 패트릭도 끌어내고, 일석이조다.
나는 정말 똑똑해, 음하하!
* * *
“지금쯤은 돌아갔으려나…….”
허름한 과일 노점의 가판대를 정리하면서 로디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머릿속으로는 오늘 아침 자신을 찾아왔던 분홍빛 머리카락의 소녀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소녀는 사달멜리크 경매에 참가하자고 제안했지만, 도무지 의욕이 나지 않았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뒤로는 쭉 이런 상태였다.
“정리하고 들어가자…….”
가판대를 천으로 덮은 뒤 돌아가려던 로디가 흠칫 놀랐다.
인기척도 없이 누군가가 바로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남자를 보고, 로디는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크로셀 님.”
“알아봐 주니 영광이군.”
서늘한 분위기의 남자가 생긋 웃었다.
크로셀 데네브.
변방의 작은 데네브 왕국을 혼자서 이끄는 젊은 왕.
로디는 길에 쏟아진 복숭아를 크로셀이 주워 준 순간부터 그를 알아보았다. 예전에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크로셀이 손에 든 물건을 내밀며 말했다.
“안젤리카가 자네에게 이걸 가져다주라더군.”
“죄송하지만 저는 이미…….”
“나는 우리 천사가 실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네.”
부드러운 어조였다. 그러나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결국 로디는 크로셀이 내미는 물건을 받아들었다.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원만하게 거절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채였다.
손가락보다 조금 긴 금속 막대기가 하나. 그리고 종이 한 장이 다였다.
그리고 종이의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어떻게 거절하지 하는 생각 따위는 새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이건……. 이게 진짜입니까?”
크로셀이 생긋 웃었다.
“글쎄, 우리 딸이 나한테는 비밀이 많은 편이라.”
좋을 대로 생각하라는 투다.
“다만. 안젤리카가 자네를 참 마음에 들어 하거든.”
“…….”
“그러니 부디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사달멜리크 경매가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
아빠와 나는 경매가 열리는 행사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로디와 패트릭이 경매에 참가할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지난번, 내가 패트릭을 만나러 간 동안, 아빠는 로디에게 보물찾기 막대(일회용)과 유물이 묻힌 장소를 전달했다.
그러니 로디도 오늘 올 거다.
……오겠지? 그게 얼마나 귀중한 정보인데!
경매는 저녁에 열린다. 왕성에서 점심을 먹고 곧장 상업 도시로 왔더니 아직 경매가 시작될 때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모처럼이니 주위를 좀 둘러볼까?”
“네, 좋아요!”
나는 아빠와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사달멜리크 경매는 상업 도시 최대의 행사다. 그런 만큼, 본격적인 경매가 시작되기 전부터 상업 도시의 번화함을 즐기려는 방문객들로 행사장이 북적거렸다.
행사장 주변에는 이런 방문객들을 붙잡기 위한 노점이 많았다. 간단한 먹거리부터 제법 비싼 아이템까지 종류도 다양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그러나 잊지 말자. 이곳은 복마전.
“자, 자, 보러 오세요, 오세요. 마석 떨이합니다. 지금 아니면 이 가격에 못 사요!”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어엉? 환불해 달라고? 지금 여기 흠집 다 내놓고 환불? 환부울?”
뜨내기들을 벗겨 먹는 데는 이골이 난 상인이 양쪽으로 즐비했다. 이곳에서 조금만 어수룩하게 굴었다가는 상인 놈들에게 뜯어 먹히기 딱 좋았다.
그리고 내 옆에는 최강이자 최악의 흑막……이 될 예정이지만, 아직까지도 너무 착한 아빠가 있다.
이곳은 아빠에게 너무 위험하다. 나는 아빠 옆에 철썩 붙어서 날카롭게 주위를 경계했다.
아빠는 바로 앞에 있는 한 가게를 가리키며 물었다.
“안젤리카, 저 가게는 어떠니?”
‘저긴 하급 아이템의 등급을 속여서 파는 것 같은데?’
“네? 저런 건 별로……. 다른 데로 가요.”
이번에는 아빠가 제법 붐비는 가게 하나를 보았다.
“그래? 그러면 저기는 어떨까? 사람이 굉장히 많구나. 인기가 많은 상점인가 봐.”
‘설마, 저기는 미끼 상품을 헐값에 팔면서 피라미드 상법에 가입시키는 악덕 상회?’
“에, 에이, 저런 건 사 봐야 쓸데도 없어요.”
나는 황급히 아빠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빠는 다시 깔끔한 분위기의 가게로 나를 데려갔다.
“그렇구나……. 여기도 여러 가지 물건을 파는구나.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골라 보렴.”
‘이쪽은 물건은 멀쩡해 보이는데……. 강압적으로 권유하면서 끼워팔기를 하잖아?’
“으음, 아니요. 마음에 드는 거 없어요.”
이런 대화를 하면서 걷다가 어느 순간, 길 한가운데에서 아빠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아빠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만 돌리고 말했다.
“안젤리카, 별로 재미없니?”
“네?”
아빠는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선명한 푸른색 눈이 우울한 기색을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