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처음에 나는 로디와 아빠의 대화를 가만히 듣기만 할 생각이었지만, 결국 갑갑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자치회에 신고는 안 했어요?”
“그건요…….”
“아까 그 아저씨가 나쁜 거잖아요. 자치회에서 조사하면 빼앗긴 아이템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해 봤답니다. 하지만 패트릭은 자치회에 연줄이 있거든요……. 제 말은 들어주지 않았어요…….”
상업 도시의 자치회가 항상 공정한 기관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부당하다.
“실로프 상회의 예전 손님들에게 증언을 모으면요? 그러면 도움이 될 수도…….”
“괜찮아요…….”
“하지만 원래 로디 씨의 물건이잖아요? 이건 너무해요!”
로디는 기운 없는 얼굴로 웃었다. 모든 의지가 다 꺾인 듯한 모습이었다.
[이름 : 로디 실로프
직위 : 실로프 상회의 주인(E)
소속 : 실로프 상회
특성 : 반짝이는 상재(봉인 중)
상태 이상 : 의욕 상실(Lv.9)
※ 상태 이상으로 인해 특성이 봉인 중입니다.]
나는 로디의 상태창을 보았다. 반짝이는 상재를 지녔지만, 의욕이 꺾여 힘을 잃은 상태였다.
“꼬마 아가씨는 데네브 왕국의 왕녀님이죠?”
“나를 알아요?”
“그럼요. 분홍색 머리카락의 천사 왕녀님은 유명하니까요. 깨어났다는 건 몰랐지만요…….”
엑, 설마 고작 나무에 머리를 부딪쳐서 쓰러진 일이 왕국 밖까지 소문이 난 건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로디는 내 소문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기운 없는 동작으로 짓무른 복숭아가 담긴 상자를 들어 아무렇게나 올려놓을 뿐이었다.
“왕녀님의 다정한 마음씨는 감사해요……. 하지만 이대로 됐어요. 저는 이제…… 너무 피곤하군요.”
* * *
결국 아빠와 나는 로디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사라와 만나기로 한 여관으로 갔다. 사라가 활짝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오셨군요, 크로셀 님, 안젤리카 님. 가신 일은 잘되셨나요?”
“아니, 조금 일이 생겨서. 오늘은 이대로 쉬고, 내일 다시 가 봐야 할 것 같군.”
“네, 그럼 여관 주인에게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안젤리카 님, 시장하시죠?”
“으응…….”
“잠시만 기다리시면 식사가 준비될 거예요. 자, 저랑 같이 식당으로 가실까요?”
“으으응…….”
여관 1층의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가 나왔다.
케나스가 만든 요리보다는 못하지만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는데, 영 손이 가지 않았다.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느라 꽤 출출했는데도 말이다.
“안젤리카 님, 식사가 입에 안 맞으세요?”
“으응…….”
“이 스튜는 어떠세요?”
“으으응…….”
내가 계속 숟가락을 쥔 채로 생각에 잠겨 있자, 아빠가 부드럽게 물었다.
“아까 그 상인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구나.”
“……네.”
나는 계속 로디 실로프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 기운 없는 목소리와 지친 눈빛을 떠올리니 잘 알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와서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왜 악랄한 짓은 패트릭이 했는데 로디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걸까.
이게 아닌데.
뭔가 잘못되었는데 해결 방법을 모르겠어서 가슴속이 갑갑했다.
워낙 착하고 다정한 성격이니까 아빠도 로디를 신경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아빠는 냉정한 반응이었다.
“안젤리카의 착한 마음은 알겠지만, 본인이 문제를 해결할 마음이 없으면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단다.”
나는 살짝 놀랐다. 아빠의 푸른 눈이 무척 차가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진심일 리 없잖아요. 그렇게 부당한 일을 당했는데 괜찮다니…….”
아빠가 내 접시 위에 빵 한 덩이를 올려놓았다. 나는 마지못해 빵을 찢어 입에 넣었다. 빵은 무척 부드러웠지만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아빠가 말했다.
“사람은 아주 간단히, 다시 일어설 힘을 잃어버린단다.”
아빠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다시 일어설 힘을 잃어버린 적이?
그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나는 차마 묻지 못했다. 내 물음에 아빠가 긍정하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아빠가 고개를 끄덕이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해요?”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
“소중한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마음이 꺾이고, 그래서 다시 일어서지 못해도……. 사람은 그냥 그렇게도 살 수 있거든.”
그때 보인 아빠의 표정을 뭐라고 형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빠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한순간에 닳아 없어진 것만 같았다.
나는 괜스레 갑갑한 마음에 빵을 찢어 아빠에게 먹여 주었다. 아빠는 내 손에서 빵을 받아먹고는 “맛있구나.” 하고 웃음 지었다. 내가 아는 상냥한 크로셀 데네브의 미소였다.
나는 생각했다.
틸라를 원활하게 유행시키기 위해서는 로디의 협력이 필요했다. 현재 비밀 상점이 없더라도 그는 ‘반짝이는 상재’가 있는 상인이다.
그뿐만 아니라, 삼류 악당이 재수 없어서라도 나는 로디를 돕고 싶었다.
그러나 본인이 문제를 해결할 마음이 없으면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아빠의 말도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아빠가 방금 내비쳤던 표정을 떠올렸다. 먼 곳을 보는 눈은 쓸쓸해 보였다.
그렇구나. 나는 아빠의 말을 무척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면 꼭 아빠가 쓸쓸한 표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 * *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그대로 여관에서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 아빠가 계약할 다른 상회를 찾아본다고 했다.
여관 근처에는 다양한 상점이 있었지만, 어쩐지 구경할 기분도 아니고 해서 나는 방에서 사라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일찍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동트기 전의 이른 새벽.
“역시 이건 아니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시 일어설 힘을 잃어버려서, 그게 뭐? 알 바야? 세상에는 목발이라는 좋은 물건이 있다.
해결할 마음이 없으면? 마음을 먹게 만들어 주면 되지!
마음을 정하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아이 참, 쓸데없는 고민을 했네. 망설이는 것은 흑막의 외동딸답지 않다.
고민할 시간에 어떻게든 삼류 악당을 해치우고, 실로프 상회를 되살리고, 그리고…….
‘그 말줄임표가 많은 말투부터 고치게 만들어 주지, 음하하!’
나는 시스템에 접속해 왕국 포인트 상점을 열었다.
[보유 왕국 포인트 : 1000 포인트]
지난번에 니키에게서 얻은 포인트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원래 이 포인트로 레벨을 올리거나 마법 특성을 배울 생각이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포인트를 투자한 특성은 바로 이것이다.
[<특성 : 내 말을 들어!(E)>
분류 : 화술
사람들이 내 말을 더 잘 듣습니다. 말에 설득력이 늘어납니다.
가격 : 1000 왕국 포인트]
이 특성 ‘내 말을 들어!(E)’는 일종의 설득 능력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엄청난 효과는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외계인이 나타났다!’ 따위의 말을 하더라도, 실제로 UFO가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믿어 주지 않는다.
즉, 터무니없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 특성은 내가 무언가를 주장하거나 설득할 때, 그 내용이 명백한 사실 관계를 위반하지 않는다면, 약간의 설득력을 더해 줄 따름이다.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냐면…….
“이 식당보다 저 식당이 맛있어요.”
……따위의 말을 하면 사람들이 살짝 솔깃할 정도?
그래서 <마.왕.꾸>를 플레이하는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속칭 ‘바이럴 특성’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게임을 플레이할 때 바이럴 마케팅을 할 일이 뭐가 있겠나. 때문에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거의 외면받은 특성이었다.
1000 포인트나 하는 데 비해 미묘하게 쓸모없는 특성이지만, 지금 로디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필요했다.
“흑, 아까운 내 1000 포인트…….”
나중에 꼭 로디에게 얻어 내고 말 테다.
아빠는 옆방에 있었고, 사라는 나와 같은 방을 사용했지만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귀를 기울였다. 식당 쪽을 향하는 사라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라면 살짝 나갔다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냥 나가면 걱정하겠지?
나는 로디의 노점에 다녀오겠다고 쪽지를 써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 여관 밖으로 나갔다.
동쪽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 이른 아침, 상품을 나르는 짐꾼, 상회로 출근하는 직원들, 아침 식사를 판매하는 식당으로 거리는 활기찼다. 이 도시가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다.
어제 로디를 만난 노점은 다행히 여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나는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피해 빠른 걸음으로 과일 노점으로 향했다.
로디는 일찍부터 노점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대 위에 복숭아를 보기 좋게 늘어놓고, 짓무른 복숭아는 깎아서 시식용으로 내어놓는다.
지쳤다고 말하면서, 포기한 것처럼 말하면서 유일하게 남은 과수원의 복숭아를 팔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준비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왕녀님……? 여기는 어쩐 일로…….”
“사달멜리크 경매에 참가를 신청해.”
“……네?”
로디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