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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21)화 (22/133)

21화

우리는 잉그리드 상회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비딱한 자세로 앉아 있던 직원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슴까?”

“계약을 하러 왔네만.”

“신규 계약 건은 상회 신용 심사를 받으셔야 함다. 어디 보자, 어디서 오셨죠?”

“데네브 왕국의 대리인, 크로셀일세.”

“어이쿠! 왕국에서 오셨군요. 죄송함다. 제가 여기서 뜨내기 상대를 많이 하다 보니, 헤헤헤. 잠시만 기다리십쇼.”

직원은 서랍에서 커다란 책자를 꺼내 펼치더니 데네브 왕국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데네브 왕국, 데네브, 데네브 왕국…… 오잉?”

어느 페이지에서 손을 멈춘 직원이 얼굴을 확 찌푸렸다.

“하, 뜨내기들 상대하는 것도 귀찮은데 이제 F급 왕국까지……. 아이고, 내 신세야. 가요, 나가.”

“여기 샘플을 가져왔는데 이거라도 봐 주게.”

“어엉? 이 나무뿌리 같은 건 뭐야? 나무뿌리 캐서 먹고 사쇼? 접수 안 받슴다. 긴말 안 할 테니 돌아가십쇼!”

탕!

직원은 우리를 밖으로 내보냈고, 가차 없이 문이 닫혔다.

‘으윽, 사이다 좀 줘…….’

이런 전개를 각오하고는 있었지만.

고구마를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현대인은 목을 부여잡으며 사이다를 찾게 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어쩐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빠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착한 아빠라도 저렇게 재수 없는 놈을 보면 화가 나지 않을까. 아빠는…….

엉? 우리 아빠 어디 갔지?

“……아빠!”

아빠는 잉그리드 상회의 사무소 옆에 있는 허름한 과일 노점 앞에 가 있었다.

“괜찮은가?”

방금 도로를 급히 달리던 짐마차가 과일 매대를 치고 지나갔기에 노점은 엉망진창이었다. 커다란 복숭아가 도로로 쏟아졌고, 그 위를 다시 짐마차가 밟고 지나갔다.

“으아아, 저걸 어쩌지……. 안 되는데…….”

기운이 없어 보이는 노점 주인은 쩔쩔매기만 하고 아무 것도 못 했다. 아빠는 도로에 쏟아진 복숭아 중 비교적 멀쩡한 것을 주워 주는 중이었다.

아빠는 방금 잉그리드 상회에서 있었던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복숭아를 구하려고 열중할 따름이었다.

‘에휴, 그럼 그렇지.’

맥이 탁 풀렸다. 그리 놀랍지는 않은 것이, 나는 무의식 속에서는 이렇게 될 거라고 짐작했던 것 같다.

전혀 흑막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한숨만 내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노점 주인이 안타까운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빠를 도와 바닥의 복숭아를 주워 담았다.

잠시 뒤, 겨우 사고 현장을 수습했다. 쏟아진 복숭아의 절반 정도는 구출할 수 있었지만, 복숭아가 워낙 무른 과일이다 보니 다 짓물러서 상품성은 잃은 다음이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합니다……. 꼬마 아가씨도 감사해요…….”

여전히 기운 빠지는 말투를 쓰는 노점 주인이 아빠와 내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 표시를 했다.

“맛있어 보이는 복숭아인데 안타깝게 되었군.”

“상업 도시의 자치회에 신고하세요. 사고를 낸 짐마차를 찾아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노점 주인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뭐, 됐어요……. 어차피 팔리지도 않던 복숭아인걸요……. 그보다, 여러분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크로셀일세.”

“저는 안젤리카예요.”

“저는…… 로디 실로프라고 합니다.”

……응? 로디 실로프?

나는 노점 주인의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찾으려던 바로 ‘그 사람’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실로프 상회의 주인, 로디 실로프.

이 도시를 샅샅이 뒤져야 할 줄 알았는데,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잘 보니 갈색 꽁지머리에 안경을 쓴 모습이 게임 내 묘사와 꼭 같았다.

그런데 단번에 알아보지 못할 법도 한 게, 어째 인상이 달라졌다.

게임에서는 좀 더 유들유들해서 방심했다간 삼십육 개월 할부 계약 따위에 서명하게 만들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기운 빠지는 말투를 쓰는 데다 눈 밑에 다크서클까지 있었다.

왜 원작이랑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본인이 맞는 거지?’

실로프 상회는 주로 마법 아이템이나 잡화를 취급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운영 규모가 크지 않아, 상업 도시 내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상회이기도 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그저 그런 상회랄까.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랬다.

실로프 상회는 한 가지 비밀스러운 부업을 했다.

바로 로디의 비밀 상점이다. 로디는 이 비밀 상점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 아이템을 엄선해서 팔았다. 가격은 비싸지만 품질은 확실했다.

나는 로디의 비밀 상점을 통해 틸라를 유행시킬 생각이었다. 이른바 프리미엄을 붙이는 거다. 그와 협상하기 위한 계약 조건도 생각해 두었다.

그런데 그 로디 실로프가 왜 이런 데서 노점을 하고 있지?

‘아하, 그 비밀 상점의 위장 영업인가?’

하긴 이름부터 비밀 상점인데 벌건 대낮에 대놓고 영업을 하진 않겠지. 평범한 과일 노점인 척하면서 비밀스럽게 손님과 접촉하는 것이 분명했다.

비밀 상점에 접근하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마.왕.꾸> 게임 상에서는 [기타]­[상회]­[비밀 상점]을 선택하고 암호를 입력하면 됐는데, 그 암호가 분명…….

“그거 아세요? 박쥐는 소란스러운 밤의 주인이랍니다.”

“네에……?”

로디는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다.

이게 아닌가?

아니, <마.왕.꾸>를 플레이하면서 수백 번이나 입력한 비밀 상점 암호를 내가 틀릴 리 없다.

‘이 상황 어째 기시감이 드는데…….’

설마, 진짜 복숭아를 파는 과일 노점?

혹시나 해서 노점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비밀스러운 문 따위는 없었고, 나는 그냥 다짜고짜 이상한 말을 하는 어린애가 되고 말았다.

“멋진 문구를 좋아하는 꼬마 아가씨군요…….”

……정말 민망했다.

“어이, 로디! 크하핫, 꼴이 볼만한걸.”

내가 실패한 비밀 상점 암호 때문에 민망해하는 그때, 웬 남자가 노점 가까이로 다가와서 거들먹거렸다.

“아직도 포기 안 했나? 어차피 열흘 뒤면 간판 내려야 할 텐데, 쓸데없는 발버둥이야.”

“돌아가 줘, 패트릭…….”

패트릭? 이번에는 또 패트릭이야?

패트릭에 대해서도 기억난다.

<마.왕.꾸>에서 제법 비중 있는 상인이다. 캐릭터 능력치는 애매하지만 다양한 상품을 취급해서 그럭저럭 쓸 만한 상인이었다. 로디와의 관계도 우호적이었다.

게임상에서는 중후한 분위기였는데…….

“하하하하! 그 로디 실로프가 다 짓뭉개진 복숭아나 팔고! 정말 우스운 일이야, 어엉?”

퍽!

패트릭이 복숭아 하나를 들어 바닥에 던졌다.

“어때, 지금이라도 내게 용서를 빌면 우리 상회에 받아 줄 수도 있어. 내 하인으로, 으하핫!”

그 광경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너무나도 전형적인 삼류 악당이었다. 거들먹거리는 태도, 멍청해 보이는 말투, 옹졸한 생김새까지 삼류 악당의 필수 요소를 완벽하게 갖추었다.

만약 진정한 삼류 악당을 뽑는 콘테스트가 열린다면, 저 패트릭이라는 자가 우수상쯤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중후한 상인 패트릭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거기다, 원작에서는 좋은 사이였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패트릭이 로디를 괴롭히고 있다.

<마.왕.꾸>는 게임인 만큼, 플레이어의 진행 방식에 따라서 스토리가 조금씩 바뀐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이렇게까지 원작이랑 정반대가 된 거야?

“제발 돌아가. 이제 충분하잖아…….”

“크크큭! 그래, 다 뭉개진 복숭아라도 열심히 팔아 보시던가.”

쾅!

패트릭이 복숭아 상자를 걷어차고 슬슬 흥이 다 떨어진 듯 돌아갔다.

로디는 아빠와 나를 향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기껏 도와주셨는데 복숭아가……. 흉한 광경을 보여 드렸군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건, 실은…….”

이어진 로디의 이야기 또한 무척 전형적인 내용이었다.

로디의 본가는 대륙 각지에 지점이 있는 대형 상회를 경영하는 앨퍼크 가문이었다.

그러나 로디는 본가의 사업을 물려받는 대신 일찌감치 독립하여 실로프 상회를 차렸다. ‘실로프’는 어머니 쪽 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방금 왔던 패트릭은 로디의 먼 친척이자 친구였다. 그것도 한두 해 알던 사이가 아닌 절친한 사이.

패트릭은 처음엔 본가를 떠난 로디의 선택을 이해한다고 말하며 존중해 주는 척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실로프 상회를 함께 운영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패트릭은 로디를 배신하고, 서류를 조작해 로디의 아이템을 가로챘다. 로디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아이템이 패트릭의 소유가 되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것이 ‘성녀의 거울’이라는 아이템.

이 아이템을 구입하기 위해 선금을 낸 사람은 당연히 분노했고, 로디는 손해를 메꾸기 위해 상회의 건물과 재산을 다 처분해야 했다.

결국 로디에게 남은 것은 복숭아가 열리는 과수원 하나뿐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패트릭은 로디가 처분한 재산을 사들여 새로운 상회를 차리기까지 했다. 목적은, 앨퍼크가의 가주에게 인정받아 한 몫 잡는 것.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한 것 같다고 한다.

‘목맥혀…….’

나는 가슴께를 퍽퍽 쳤다.

우리 집 아빠보다도 더한 고구마 사연이 여기 있었다.

이상하다. 흑막의 외동딸이 되었는데 왜 가는 데마다 사기꾼이 판을 치지? 고구마를 부르는 체질이란 것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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