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으음…….”
“안젤리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자, 더 먹으렴.”
“네? 많이 먹었어요.”
“조금밖에 안 먹고서는. 많이 먹어야 튼튼해지지. 안젤리카가 아프면 아빠 마음이 아프단다.”
결국 나는 아빠의 애틋한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틸라를 하나 더 먹었다. 아빠는 손수건을 꺼내 내 입가와 손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이렇듯 이 세계의 흑막 크로셀 데네브는 여전히 상냥하고 다정했다. 매일 아침이면 내 머리카락을 예쁘게 묶어 주었고, 집무실을 찾아가면 늘 맛있는 간식을 주었다.
천사 같은 아빠를 보며 나는 발상을 전환할 필요성을 느꼈다.
상업 도시 사달멜리크의 거대 상회는 찢어지게 가난한 F급 왕국 따위 무시할 테다. 이건 무려 수천 시간 동안 <마.왕.꾸>를 플레이한 내가 슈퍼 플레이어의 이름을 걸고 장담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은 무시당하면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는 법이다. 이렇게 착한 우리 아빠도 재수 없는 상인 놈들을 만나면 화가 나겠지.
아빠가 화가 나면 사악한 흑막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상업 도시의 재수 없는 상인을 은밀하게 처리하기. 흑막 생활 입문용으로 딱 맞는 에피소드가 아닌가.
좋아,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었다!
‘후후후, 목적지는…… 그래, 제일 크고 제일 재수 없는 잉그리드 상회로 할까.’
“우리 천사가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
“네, 이렇게 다 같이 음식을 나눠 먹으니까 너무 재미있어요!”
나는 내 속도 모르고 다정하게 묻는 아빠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 * *
상업 도시 사달멜리크에 방문할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틸라를 수확한 다음 날, 아빠는 상업 도시에 가서 계약할 상회를 알아볼 계획이라고 했다. 나는 얼른 아빠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아빠,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안젤리카, 상업 도시 사달멜리크는 번화하지만 그만큼 위험하단다.”
내 말이라면 대체로 다 들어주던 아빠였지만 이번에는 난색을 표했다. 하긴 아빠가 이렇게 말할 법도 했다.
돈에는 어둠이 모여드는 법이다.
상업 도시 내의 자치회가 나름 규칙을 세워 불법 행위를 단속하지만, 스며드는 어둠까지 완전히 틀어막을 수는 없다.
상업 도시 사달멜리크에는 상업과 관련된 ‘모든 것’이 있었다. 밀거래꾼, 사채꾼, 정보 길드, 암흑가 등……. 사회의 테두리 바깥에서 어둠을 먹고 돈을 버는 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초대받은 자만 들어갈 수 있는 암시장은 온갖 출처 불명의 물건들이 거래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니 열 살짜리 어린애를 데려가기 힘든 것은 당연하지만, 나는 다시 아빠를 졸랐다.
“저도 상업 도시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요. 무척 신기한 물건도 많이 판다고 하던데요!”
“안젤리카가 갖고 싶은 게 있다면 아빠가 올 때 사 오마.”
“네? 아, 안 돼요!”
안 된다!
아빠가 혼자 상업 도시에서 물건을 사러 돌아다녔다가는 사기를 당할 게 틀림없다. 잔뜩 바가지를 씌운 가격을 의심도 하지 않고 턱턱 사겠지.
내가 빙의한 직후에 일어났던 일들만 해도 어마어마하지 않았나.
저 말간 얼굴을 봐라. 흑막력 0%의 순진무구함과 청순함이 ‘사기꾼이여, 나 잡아가라.’ 하고 말하는 듯했다.
현재 잔고는 0 골드.
데네브 왕국에는 돈이 없다. 당장의 생활비와 왕국 운영비는 있다고 하나, 더 이상 사기를 당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 와중에 아빠를 혼자 보내는 것은 물가에 애를 내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안젤리카, 왜 그러니?”
나는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갖고 싶은 물건은 없어요. 그냥, 나는…… 아빠랑 같이 도시를 구경하고 싶어서요. 아빠랑 같이 그런 번화한 곳에 가 본 적이 없으니까.”
커다란 손이 내 머리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 바람에 나는 그때 아빠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안젤리카……. 그래, 알겠다. 같이 가자꾸나.”
이렇게 겨우 허락을 받고, 아빠와 나, 사라, 마부 겸 경비병 한 명이 상업 도시 사달멜리크를 다녀오기로 했다. 마차에는 상회에 샘플로 줄 틸라도 한 자루 실었다.
원래는 니키도 함께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니키는…….
“우읍, 읍!”
“니키, 괜찮아? 마차 탈 수 있겠어?”
“안젤리카 님, 나는 틀렸어…… 우으읍!”
틸라 파티 때 틸라를 너무 많이 먹은 바람에 속에 탈이 났다. 마차를 타자마자 속이 울렁거린다고 입을 틀어막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안젤리카 님, 잘 부턱…… 우읍!”
아무리 맛있어도 그렇지. 틸라를 얼마나 많이 먹었길래 저렇게 된 걸까…….
“그럼 다녀올게.”
후후, 떠날 때는 착한 아빠지만 돌아올 때는 흑막 아빠가 되어 있겠지.
나는 가슴속에 원대한 야망을 품고 마차에 올라탔다.
두 시간 정도 마차를 타고 달리자 상업 도시 사달멜리크의 번쩍번쩍한 성벽이 우리를 맞이했다. 데네브 왕국의 황량한 모습과는 달리, 이 도시는 온통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흐음, 저건 A급 상감 장식 벽돌 같은데? 그럼 지금 도시 등급이 A급쯤 되나? 제법인데.’
나는 성벽의 화려한 외관을 보며 도시의 등급을 어림짐작했다. 겉모습만 봐도 딱 감이 온다.
도시의 입구에서 마차를 세우고, 아빠는 문지기에게 신분패를 내밀었다. 신분패에 찍힌 데네브 왕국의 문양을 보고 문지기가 깜작 놀라 황급히 우리를 안으로 모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데네브 왕국의 크로셀 씨 및 세 명, 통과하세요!”
소란을 피하기 위해 정체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계약을 위해 방문한 관료 행세를 했다.
그러나 만약 아빠가 정체를 드러냈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사달멜리크는 그런 곳이니까.
이 대륙에서 펼쳐지는 여러 왕국의 경쟁, 각지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 오염된 땅의 마족, 마법…….
이러한 것들에 이 도시는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동시에 극도로 무관심했다.
즉, 돈 되는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 철저한 배금주의 기조는 이 도시의 자치가 유지되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돈만 추구하느라 어느 왕국 세력과도 결탁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보증 수표가 된 것이다.
‘후후후…….’
고구마라면 고구마지만 지금은 괜찮다. 앞으로 아빠가 훌륭한 흑막이 되어 S급 왕국을 만들면 충분히 되갚아 줄 수 있으니까. 훗날의 사이다를 위한 빌드 업 고구마랄까.
아무튼.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리고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비싼 마석을 팍팍 박아 넣어서 번쩍번쩍한 거리가 나를 맞이했다.
이 황금의 도시가 지닌 어둠이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하는 열쇠가 되어 주겠지.
모처럼 이곳까지 왔으니 서둘러서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룻밤 자고 돌아갈 예정이었다. 도시는 붐볐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움직이기로 했다.
경비병은 공용 마차 보관소에 마차를 대러 가고, 사라는 오늘 밤 묵을 여관을 잡으러 간다. 그사이에 아빠는 상회에 계약을 신청하러 가는 것이다.
아빠는 내게 사라와 함께 여관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안 된다. 그래서는 여기까지 함께 온 의미가 없다. 나는 아빠의 팔에 매달리며 함께 상회에 가고 싶다고 어필했다.
“나도 아빠랑 같이 상회에 갈래요.”
“안젤리카, 상회 사무소 앞은 붐비는 데다가 지루할 거란다.”
“아빠랑 같이 있으면 하나도 안 지루해요.”
솔직히 하루 종일 아빠 얼굴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아빠는 잘생겼으니까.
<마.왕.꾸>를 플레이할 때 내가 수없이 실패하면서 계속 흑막 엔딩에 도전한 원동력도 잘생긴 외모였다. 빡쳐서 게임을 끄고 싶다가도, 크로셀의 얼굴만 보면 짜증이 사르르 녹았다.
내가 강하게 부탁하자 아빠는 결국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구나. 아빠 손 꼭 잡고 다녀야 한다.”
“네, 아빠! 와아, 너무 좋아요!”
“먼저 여관에 가 있겠습니다. 안젤리카 님,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크로셀 님의 손을 꼭 잡고 다니셔야 해요?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건다고 따라가시면 안 돼요?”
“응, 알았어. 사라, 이따 봐!”
아빠와 나는 곧장 상회 사무소 거리로 향했다. 샘플로 줄 틸라를 한 자루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회 사무소 거리는, 이름 그대로 수많은 상회의 접수 사무소가 모여 있는 구역이다.
품에 한가득 서류를 껴안고 걷는 회계사와 관리, 상품을 나르는 일꾼, 짐마차, 떨이 상품을 파는 노점 따위로 거리는 무척 붐볐다.
“안젤리카, 조심해야지.”
“으아앗! 네.”
하마터면 상품을 나르는 짐꾼과 부딪칠 뻔했다. 나는 깜짝 놀라 아빠의 팔을 붙잡고 매달린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왕.꾸> 게임상에서 수십 번 본 거리지만 직접 눈앞에 펼쳐지자 감회가 새로웠다.
“아빠, 어느 상회로 갈 거예요?”
“음……. 글쎄, 어디가 좋을까. 안젤리카는 마음에 드는 곳이 있니?”
상업 도시 사달멜리크에는 수십 개의 상회가 모여 있었다. 이들 상회는 대륙 전체에 지점이 있는 대형 상회부터 구멍가게 수준인 곳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그중에서 내가 원하는 곳이라면 저곳뿐이다.
“그럼 저기는 어때요?”
“저곳은……. 잉그리드 상회 말이구나.”
“네, 간판이 제일 커서 눈에 띄니까요!”
“그래, 그럼 저기로 가자꾸나.”
잉그리드 상회는 <마.왕.꾸>의 A급 상인 캐릭터 잉그리드가 세운 곳으로, 이 상업 도시에서도 제일 규모가 큰 곳이었다.
물론 그만큼 문턱도 높다. 특히 자기네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손님에게는 무척 불쾌하게 굴기로 유명했다.
즉, 버그로 착해져 버린 아빠의 마음속에 있는 흑막다움을 일깨우기에 아주 적절한 상대라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