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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아빠를 프로듀스 (18)화 (19/133)

18화

난 생각을 바꿔 니키의 선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크흠! 나한테 주고 싶다니 어쩔 수 없지. 고마워, 잘 받을게.”

“헤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아빠와 사라, 케나스가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어째 다들 표정이 따스했다. 눈빛은 아련하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띠었다.

저 오묘한 표정을 비유하자면, 우리 아이의 첫 심부름을 지켜보는 느낌이랄까?

아니, 조금 다르다. 더 정확히는……. 우리 아이의 첫 등교를 지켜보는 학부모의 표정이 딱 저럴 것 같았다.

어째 이상한 오해를 산 것 같지만 상관없다. 아빠가 저렇게 천사 같은 표정을 짓는 것도 지금뿐이니까.

나는 니키에게 받은 동화책 표지를 다시 한번 보았다.

‘후후후……. 이것만 있으면!’

아빠를 흑막으로 프로듀스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었다!

* * *

그날 밤, 슬슬 잠자리에 들 시각.

나는 잠옷 차림으로 아빠의 침실로 향했다. 니키에게 받은 동화책을 품에 꼭 껴안은 채였다.

아빠의 침실은 내 방과 같은 층의 동쪽 끝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뭐, 애초에 왕성이 작아서 끝에서 끝까지라고 해도 얼마 안 되지만.’

아직 아빠가 깨어 있는지 침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떨림을 진정시킨 뒤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세 번을 두드리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편안한 차림을 한 아빠가 나를 보고 살짝 놀랐다.

“안젤리카? 아직 깨어 있었구나. 무슨 일이니? 착한 아이는 잘 시간이란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아빠, 잠이 안 와서 말인데요.”

목적을 위해서는 뻔뻔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쪽팔림은 한 순간! 딱 한 번만 쪽팔리고 마는 거야.

“그래서 말인데……. 아빠, 이 동화책 읽어 줄 수 있어요?”

뺨이 화끈화끈했다.

열 살이면 이미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할 나이는 지났다. 심지어 빙의 전의 기억을 더하면 내 정신 연령은 이미 성인이다. 그런데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말하려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

아빠는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역시 열 살이나 되어서 동화책을 읽어 달라는 건 무리였나.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변하지 않는 일도 있구나.”

“네……?”

아주 잠시, 아빠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금방 다시 웃었지만 분명히 보였다. 아름다운 낯에 비치는 감출 수 없는 슬픔이.

나는 새삼스럽게 이 착한 크로셀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것은 <마.왕.꾸> 게임 속의 캐릭터 크로셀 데네브뿐이다.

무슨 버그가 발생했는지 착해져 버린, 눈앞의 아빠가 왜 슬퍼하는지 알 수 없어서 가슴이 갑갑해졌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이리 오렴, 안젤리카.”

아빠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읽어 줄 거예요?”

“그럼. 우리 천사가 읽어 달라고 하는데 당연히 읽어 줘야지.”

아빠는 나를 번쩍 안아 들고 침실 안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커다란 침대에 나를 앉히고 베개로 등을 받쳐 준 뒤 옆에 앉아 동화책을 펼쳤다.

이렇게 민망함을 무릅쓰고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어디 보자, 책 제목이…… 용사와 마왕 이야기……?”

“네, 정말 재밌겠죠?”

니키가 준 동화책은 전형적인 용사와 마왕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린이용 동화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왕의 악행을 자세히 묘사했다.

“그럼 읽으마. 옛날 옛날에 용사가 살았습니다…….”

아빠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듣기 좋은 목소리다. 나는 가만히 앉아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가, 사악한 마왕이 악행을 벌이는 장면에서 입을 열었다.

“아빠, 나는 이런 캐릭터가 좋아요.”

“응? 이 마왕 말이니?”

“네, 멋지잖아요! 아빠도 이렇게 멋진 일을 하면 좋겠어요.”

“그래, 그렇구나.”

아빠는 내 머리카락을 한번 쓰다듬고는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마왕은 잘못을 반성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나쁜 일이야. 이제부터 착하게 살겠어.”

으, 응?

다음 페이지에서 마왕 캐릭터가 갑자기 착해졌다. 동화책에는 너무나도 선량하게 웃는 마왕의 그림까지 실려 있었다.

이럴 수가.

앞부분만 보고 결말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는데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빠는 꼭 동화책의 그림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젤리카는 이런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했지. 아빠도 이 책의 마왕처럼 멋진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아……. 그게 아닌데…… 네, 하하…….”

동화책이면 좀 더 확실하게! 단순한 선악 구도로 만들란 말야. 왜 갑자기 악역이 착해져서 용사랑 화해하는 건데?

내 의도랑 정반대가 되어 버렸잖아!

아이고, 골치야…….

* * *

쌔근쌔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크로셀 데네브는 들고 있던 동화책에서 시선을 들어 옆자리를 보았다. 그의 딸, 안젤리카가 잠이 들어 있었다. 아까부터 무거운 눈꺼풀과 씨름하더니, 결국 잠기운에 패배한 모양이다.

“잘 자렴, 우리 딸.”

크로셀은 안젤리카가 편히 잘 수 있도록 베개를 바로 놓아 주었다.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의 딸은 깨어난 순간부터 바빴다.

무얼 찾는 건지 왕성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더니, 어느 사이엔가 요리사와 친해졌다.

또 하루 종일 작은 몸으로 지치지도 않고 호미질을 해 텃밭을 만들었다. 왜 갑자기 텃밭을 만드나 했는데, 이제 보니 가족 없이 혼자 사는 가난한 소녀를 돕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참 착한 아이다.

머릿속으로 무슨 계획이라도 세우는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을 때면 눈동자에 생기가 넘쳤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한껏 사악한 표정을 꾸며 내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웃음이 나온다.

“으……. 안 돼, 돈세탁을 해야…… 하는데.”

대체 무슨 꿈을 꾸는 중인지, 안젤리카는 터무니없는 잠꼬대를 했다. 행여 안젤리카가 잠에서 깰세라, 크로셀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꾹 삼켰다.

크로셀은 아직 펼쳐진 채인 동화책으로 눈을 돌렸다.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눈빛이 아련하다.

“아빠, 저 이 동화책 읽어 주면…… 안 될까요?”

“아직 글도 못 뗀 건 아니겠지? 혼자서 읽을 줄 모르니?”

“아, 아니, 아니에요. 읽을 수 있어요…….”

“어리광 부리지 말렴.”

까마득한 기억이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크로셀은 애써 상념을 떨쳐 내고 동화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안젤리카가 유난히 마음에 들어 하는 페이지였다. 개심한 마왕이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이 책, 이런 내용이었구나.

크로셀은 오래도록 그 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딸이 동화책을 통해 전하려 했던 말이 무엇인지 읽어 내려는 듯이.

“안젤리카…….”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딸.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단다.

* * *

환한 아침 햇살이 내 눈을 찔렀다.

“흐아암…….”

“안젤리카, 일어나렴. 아침 먹어야지.”

다정한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눈을 뜨니, 아빠가 테이블 위에 내 아침 식사를 차리고 있었다.

“……!”

이럴 수가, 잠들어 버렸다!

아무리 빙의 전에는 성인이었다고 한들 육체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열 살의 몸은 저녁을 먹고 나면 금방 잠이 왔다. 더군다나 요 며칠은 텃밭을 가꾸느라 바쁘게 돌아다녔더니 더욱 피곤했다.

내 기억은 아빠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동화책의 결말부를 읽는 데에서 끊겨 있었다.

원래 내 계획은 아빠에게 동화책을 통해 사악한 흑막 캐릭터가 좋다고 어필하는 것이었다.

서브리미널 효과처럼 은근슬쩍 아빠의 무의식에 영향을 끼치는 거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잘 잤니, 안젤리카.”

그러나 아빠의 저 온화한 미소를 보니, 조금도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냥, 아빠에게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조르다가 잠든 어린애가 되었을 뿐이다.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기, 정말 쉽지 않구나…….’

나는 아빠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한 뒤 텃밭으로 갔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안젤리카 님! 기체후 일향 만강하시옵니까!”

“니키, 그 거창한 인사 좀 제발 그만……. 그보다, 이게 다 뭐야?”

“헤헤헤, 어때? 마음에 들어?”

니키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텃밭에 틸라의 붉은 꽃이 가득했다. 이걸 전부 수확하면 어마어마한 양이 나올 듯했다.

[<두근두근 마법 왕국 꾸미기> 주간 레포트!

(1) 왕국의 경제 레벨이 1 → 2로 올랐습니다.

(2) ‘농사 담당자’ 니키의 활약으로 조그마한 텃밭이 ‘풍년’ 상태가 되었습니다.

(3) <시나리오 퀘스트> 왕국 꾸미기 입문 (1)의 기한까지 50일 남았습니다.

(4) <히든 퀘스트> 텃밭을 지켜라! 루트 1 클리어 보상으로 ‘보물찾기 막대(일회용)’를 획득했습니다.]

[<이벤트> ‘농사 담당자’ 니키가 ‘풍년’ 상태에 뿌듯함을 느낍니다.

1000 왕국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결국 나는 또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기에 실패했지만, 대신 유능한 농사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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