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처음 오두막에서 니키를 붙잡았을 때는 나도 몰랐다.
열두 살이라지만 아직 2차 성징이 오기 전의 몸이다. 더군다나 니키는 벙벙한 옷을 입고 지저분하기까지 했으니 겉모습을 보고 구분하기는 힘들었다.
“그랬구나. 우리 천사는 눈썰미가 좋구나.”
아빠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조차 눈치 못 챌 정도라면 대부분은 니키가 남자애인 줄 알았겠지.
그런데 시종에게 목욕을 시키라고 하자 격하게 저항하는 모습에서 문득 의심이 들었다.
니키는 계속 반항적인 표정이기는 했지만 왕성까지 얌전히 따라왔다. 그런데 목욕을 하라고 하는 순간 기겁하는 모습은 꼭 목욕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더러운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 종교적인 이유라도 있는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의심스러운 상황. 그래서 사라를 함께 보냈는데 정답이었다.
“일부러 남자애처럼 하고 다닌 거지?”
니키가 보일 듯 말 듯 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사정은 알 만했다.
마을 외곽에 외따로 떨어진 오두막, 가난한 살림, 연락이 끊겨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형…… 아니, 오빠.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가혹한 환경이다. 남자애인 척 행세해서 조금이라도 위험을 피하고 싶었겠지.
비밀도 들켰겠다, 반항적인 기세가 한풀 꺾인 니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옷, 이거 고마워.”
“됐어. 계속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면 무서운 일이 일어나니까 준 것뿐이야.”
“그래도, 고마워.”
그때 케나스가 니키 몫의 자몽타르트와 차를 가지고 왔다.
니키에게 먹어도 좋다고 하니, 제법 신맛이 강할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게 눈 감추듯 타르트를 먹어 치웠다. 그러자 케나스가 더 많은 간식을 가져다주었다.
응접실에는 부드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니키에게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사흘 만에 틸라를 그렇게 많이 키운 거야?”
“응? 안젤리카 님이 말한 대로 틸라 뿌리를 두 뼘 간격으로 심고 아침에만 물을 많이 주니까 그냥 자라던데?”
“……호오.”
나는 니키의 말을 듣고 확신했다. 역시 내 선택이 옳았다.
아빠가 내게 직접 말하라는 뜻을 담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니키가 목욕을 하는 동안 어떤 처벌을 내릴 생각인지 미리 허락을 받아 둔 상태였다.
“그래서, 니키 네 처벌 말인데.”
“……쿨럭, 쿨럭!”
신나게 타르트를 먹던 니키가 체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처벌 이야기를 꺼낸 데에 배신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니키는 가슴팍을 두드리며 입 안의 타르트를 삼킨 뒤 외쳤다.
“어차피 나한테는 돈도 부모도 없고 가진 건 이 몸뚱이뿐이야! 무슨 처벌을 내리든 쫄지 않을 테니까 마음대로 해!”
“좋아, 각오는 충분해 보이네. 잘할 수 있겠어.”
“…….”
니키가 몸을 움찔거렸다. 기세 좋게 외치긴 했지만 무슨 처벌을 받을지 무서운 모양이다. 나는 활짝 웃으며 니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왕성의 농사 담당자가 되어 주겠어?”
“엉?”
“왕성 뒤뜰의 틸라 밭을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해. 네가 적임일 것 같은데.”
“내…… 내가?”
“그래, 네가.”
내가 니키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바로 니키의 상태창에 적힌 내용 때문이다.
[이름 : 니키
직위 : 없음
소속 : 데네브 왕국
레벨 : 7
특성 : 한 그릇 더!(F), 태양의 축복(A)]
첫 번째 특성 ‘한 그릇 더!(F)’는 크게 쓸모가 없지만, 중요한 것은 두 번째, ‘태양의 축복(A)’이다.
어쩐지 사흘 만에 틸라를 잔뜩 키워 내더라니, 니키는 농사에 엄청난 재능이 있었다. 지금 이 시점의 왕국에 꼭 필요한 인재다. 절대 놓칠 수 없었다.
“물론 공짜로 일하라는 건 아니야. 우선 숙식 제공에 임금이…….”
내가 말끝을 흐리자 옆에서 바로 아빠가 금액을 제시했다.
“한 달에 3 골드면 어떻겠니.”
‘아빠, 그거 왕국에 현재 남은 전 재산이잖아요…….’
그거 주고 나면 우리, 돈이 없는데요?!
남은 돈을 마지막까지 긁어 쓰려니 속이 쓰렸다.
뭐, 평균적인 임금보다는 비싸지만 상관없나. 틸라를 수확해서 팔면 돈이 들어올 테고, 니키는 전 재산을 써서라도 잡아야 하는 인재다.
니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나는 얼른 조건을 더했다.
“그리고 밭에서 나오는 산출량의 10퍼센트는 네가 가져가도 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유급 휴가 있음.”
당장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니키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제법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적어?”
“아, 아, 아니! 당치도 않아.”
“그런데?”
“보통 나처럼 어리고 힘없는 고아는 임금을 많이 안 주니까. 특히 높으신 분들은…….”
니키는 떨떠름하게 말끝을 흐렸다. 계속 말하라고 하자, 상냥한 표정을 하고 있는 아빠 쪽을 한번 쳐다본 뒤 면목 없어 하며 말을 이었다.
“높으신 분들은 보통 나 같은 평민들을 차, 착취하니까 조금 놀라서.”
니키가 말하는 그런 게임 플레이 방법도 있긴 하다. 세율을 최대치까지 올리고 왕국민들을 마구 쥐어 짜내는 것이다.
왕국민의 저항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마.왕.꾸>의 세계에서 국왕이란 강력한 마법으로 영토의 결계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존재다.
필연적으로 모든 국왕은 마법사이며, 그중에서도 크로셀은 가장 강하다. 대마왕이라고도 불릴 정도였으니까.
그런 크로셀에게 보통 사람이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세련미가 없다. 흑막씩이나 되어서 무턱대고 세금만 쥐어 짜내다니 조금도 멋지지 않잖아.
나는 평범한 <마.왕.꾸> 플레이어가 아니다. 강함과 멋짐을 동시에 추구하는 슈퍼 플레이어지.
“우리 아빠는 그렇게 치졸한 사람이 아니거든! 그렇죠, 아빠?”
“하하하……. 잘 부탁한다, 니키.”
다소 혼란스러워하기는 했지만 니키는 결국 농사 담당자 자리를 수락했다. 그 순간 경쾌한 소리와 함께 상태창이 업데이트되었다.
[<가동 중인 생산 시설>
조그마한 텃밭(F) : 호미질로 만든 작은 밭입니다. 흙이 마기에 오염되었습니다.
배치 : ‘농사 담당자’ 니키
호화도 : 10
현재 심은 작물 : 틸라
※ 농사 담당자의 보너스 효과로 수확에 걸리는 시간이 단축되었습니다.
※ 사흘에 한 번 틸라를 수확할 수 있습니다.
※ 다음 등급까지 앞으로 30번 더 재배해야 합니다.]
성공이다!
앞으로 니키에게 삼시 세끼는 물론이고 하루 두 번 간식을 먹여 줘야지. 그리고 틸라를 수확해서 돈이 들어오면 니키에게 성과급을 팍팍 주자고 건의해야겠다.
그러면 계속 쏟아지는 성과급 때문에 그만둘 마음이 들지 않겠지.
데네브 왕국이 SSS급 왕국이 될 때까지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테다.
“후후후…….”
“안젤리카, 니키가 와서 기쁜가 보구나.”
“네, 정말 좋아요!”
지금 내가 떠올린 사악한 계획은 짐작도 하지 못한 듯, 아빠가 다정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다음 날, 아침 9시.
니키는 정시에 왕성 뒤뜰의 텃밭으로 출근했다. 내가 텃밭으로 가자, 니키가 환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젤리카 님, 기체후 일향 만강하시옵니까!”
“저기, 평범하게 말해 줄래……?”
니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녀님한테는 이렇게 인사하는 거 아니야? 우리 오빠가 가르쳐 준 건데! 기체후 일향 만강하시옵니까!”
“……닭살 돋으니까 제발 그만둬.”
“기체후 일향 만강하시옵니까!”
니키를 농사 담당자로 고용하기로 한 뒤.
니키에게 그래도 내가 왕녀니까 앞으로는 경어를 쓰라고 말했더니, 대체 어쩌다 그런 말을 배웠는지 이상한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도 말투는 여전한데 인사말만 거창해졌다.
애한테 뭘 가르친 거람. 얼굴도 모르는 니키의 오빠를 한번 보고 싶어졌다.
‘엄청 이상하든가 대책 없는 인간일 것 같아…….’
실컷 거창한 인사를 한 다음, 니키는 오두막에서 들고 온 보따리에서 책 한 권을 꺼내더니 내밀었다.
“안젤리카 님, 이거, 받아 줄래?”
“이게 뭔데?”
“예전에 오빠가 자주 읽어 준 동화책이야. 안젤리카 님한테 보답하고 싶은데 나한테는 달리 줄 만한 물건이 없어서, 이거라도…… 받아 주면 좋겠어.”
동화책은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표지가 너덜너덜했다. 니키가 무척 아끼던 책이 분명하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는 오빠라도 보고 싶은 건가.’
마음은 고맙지만, 나는 동화책을 읽을 나이도 아니고 하니 사양하기로 마음먹었다.
“니키, 나는 벌써 열 살이거든?”
거기다 빙의 전의 나이를 더하면 이미 차고 넘치는 성인이다.
“나는 열두 살인데!”
“그게 아니라, 열 살이니까 이제 동화책 같은 건 안 읽어. 그러니까…… 어?”
나는 니키의 동화책을 돌려주려다 표지를 보고 멈칫했다.
‘어라? 이 내용은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