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나는 붉은 머리 소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 내 텃밭에서 틸라를 훔쳐 간 도둑이 바로 너구나?”
털썩!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소년이 지레 겁을 먹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잔뜩 독이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어…… 어쩔 수 없잖아! 배가 고파서 그랬어!”
나는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 팔짱을 끼고 섰다. 소년은 반항적인 표정으로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소년의 이름은 니키.
부모님은 어릴 때 돌아가셨고, 모험가 일을 하는 형이 한 명 있다. 형은 큰돈을 벌어 오겠다며 집을 떠난 뒤로 연락이 안 되었다.
보호자 없이 혼자 남은 니키의 생활은 궁핍했다. 어린 니키에게는 먹고살 돈을 벌 방법이 없었으니까.
니키는 먹을 것을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왕성까지 들어왔고, 내가 붙인 ‘최고의 영양 간식! 맛있음!’이라는 글귀를 보았다.
그래서 틸라를 키우면 먹을 수 있을 줄 알고 모종을 훔쳐서 심었다고 했다.
나는 니키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보다 두 살이 많아 열두 살이라는데 체구가 작았다. 몸에 맞지 않는 벙벙한 옷과 지저분한 외양에서 사정이 짐작되었다.
“고아원에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왜 고아원에 가? 우리 형이 돈 많이 벌어서 온댔거든! 형이 왔을 때 내가 집에 없으면 놀랄 거 아냐?!”
니키의 말에 아빠가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이 오두막에서 혼자 살았다는 말이니?”
“그게……. 네, 맞아요. 잘못……했어요.”
나는 예리한 감으로 눈치챘다.
착한 아빠는 니키를 그냥 보내 줄 작정이었다. 살짝 기울어진 눈썹과 연민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보아 확률은 100%다.
‘안 되지, 안 돼.’
히든 퀘스트의 클리어 조건은 ‘도둑을 완벽하게 해치우기’였다. 거기다 아빠가 도둑을 냉정하게 처벌해 악명을 떨쳐야 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틸라가 다 자라면 일부를 왕국민들에게 나눠 줄 생각이었다.
틸라를 유행시켜 골드를 버는 일도 중요하지만, 왕국의 산업을 발전시키는 일도 장기적으로 보아 중요했으니까.
틸라는 마기에 물든 땅이라면 어디에서든 잘 자란다. 왕국민이 틸라를 키워 식량을 얻어 부유해지면, 그 부가 왕국 발전으로 이어질 테다.
그런 큰 뜻을 품고 기르던 틸라 모종을 훔치다니, 그냥 보내 줄 순 없었다.
나는 아빠가 입을 열기 전에 얼른 아빠 앞을 막아섰다.
“안 돼요, 아빠!”
“……안젤리카?”
“도둑은 도둑. 아무리 안타까운 사정이 있더라도 처벌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요.”
그냥 놓아주면 아빠를 흑막으로 만들 수가 없을 거 아냐. 아주 냉엄한 처벌을 해야 한다고!
“그래……. 알겠다. 우리 천사는 이 소년에게 어떤 처분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크흠, 크흠!”
나는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지. 크크큭, 잘못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야.”
참고로 이것도 <마.왕.꾸>에 나오는 크로셀 데네브의 대사 중 하나였다. 잘못을 저지른 엑스트라에게 냉혹한 벌을 내릴 때 나온다.
“……히익!”
니키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당장 미리 생각해 둔 잔인한 벌을 입에 올리려 했다.
하지만 아빠와 눈을 마주친 순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빠가 굉장히 슬픈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윽, 저 서글픈 눈빛 공격을 이겨 내기란 힘든 일이었다.
으음……. 역시 갑자기 도둑을 냉정하게 처벌하기는 난이도가 높나?
흑막으로 프로듀스하는 것도 차근차근 진행해야 하는 법이니까. 니키도 이만하면 충분히 겁을 먹은 모양이니 넘어가 줄까.
하지만 참 이상한 일이다. 엑스트라에게 냉정한 벌을 내리는 일쯤, <마.왕.꾸>를 플레이하는 동안 몇 번이나 해 보았다.
그런데도 막상 현실이 되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이번만 봐줄까.
‘이런, 안 돼.’
히든 퀘스트의 1번 루트 클리어 조건은 ‘도둑을 완벽하게 해치우기’였다. 여기서 니키를 처벌하지 못하면 2번 루트다. 텃밭이 쫄딱 망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니키를 처벌하기는 해야 하는데.
“……!”
그때, 눈앞에 니키의 상태창이 나타났다.
그런데 상태창에 상당히 놀라운 내용이 있었다. 이 상태창대로라면……!
‘좋아, 정했다.’
나는 니키 앞에서 몸을 돌려 틸라 밭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제일 앞에 있는 틸라를 딱 다섯 포기 뽑았다.
모두 무척 싱싱했고, 내가 기른 것보다 실한 덩이뿌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케나스, 이거 챙겨. 도둑맞은 틸라 다섯 포기.”
“아, 네, 넵!”
케나스가 내게서 틸라 다섯 포기를 받아 자루에 담았다. 그러고도 밭에는 여전히 많은 틸라가 남아 있었다.
겁에 질려 있던 니키가 밭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저기가 아니라 안젤리카야. 안젤리카라고 불러.”
“안젤리카 님, 나머지 틸라는 안 가져가?”
“응? 그건 니키가 키운 거잖아? 난 다섯 포기를 받았으니까 됐어. 나머지는 팔든 먹든 알 바 아니니까 알아서 해.”
“안젤리카……!”
아빠가 감동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 톨의 자비도 없는 냉정한 판결을 내렸는데 왜 저렇게 천사 같은 표정을 짓는 거람.
나는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생각나 덧붙였다.
“참고로 틸라는 윗동을 자른 다음에 구워 먹어야 해.”
“어, 엉?”
“알겠어? 불에 10분 이상 구워야 해. 10분 이상!”
독이 남아 있으면 안 되니까 말야.
니키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틸라 다섯 포기도 되찾았겠다, 이제 왕성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저기, 고마워, 안젤리카 님. 이렇게 나를 놔줘서.”
“응? 무슨 말이야? 놔준다고 한 적 없는데?”
“어?”
“도둑맞은 틸라를 되찾은 것과 처벌은 별개야. 네 처벌은 왕성에 돌아간 뒤에 내릴 예정이란다.”
“그, 그런 게 어딨어!”
니키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흔들렸다. 내게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니키의 상태창에 적힌 내용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이 상태창대로라면 니키는 지금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후후, 이런 인재 놓칠 수 없지.
* * *
우리는 니키를 데리고 왕성으로 돌아왔다.
나는 곧장 방으로 가지 않고, 케나스에게 붙잡혀 끌려온 니키를 살펴보았다.
겁먹은 것을 티 내지 않으려는 반항적인 눈빛, 주근깨가 가득한 뺨, 붉은색 머리카락…….
……이 나름 귀여웠지만, 흙먼지를 뒤짚어쓴 탓에 지저분해 더러운 생쥐 꼴이었다.
나는 계속 내 부하 노릇을 하던 케나스를 부엌으로 돌려보내고 시종을 불렀다.
“얘를 데려가서 깨끗하게 만들어 와. 대충 하지 말고 따뜻한 물에 담가서 박박 씻겨.”
“으아악! 이거 놔!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냥 목욕을 시키려는 것뿐인데 니키는 크게 반항했다.
체구는 작은데 어찌나 힘이 센지, 시종은 버둥거리는 니키에게 턱을 얻어맞기까지 했다.
“이리 와!”
“이거 놓으라고! 싫어!”
니키는 절대 끌려가지 않으려고 힘을 주어 버텼다.
누가 보면 내가 목욕이 아니라 고문이라도 하라고 한 줄 알겠다.
억울하다. 저렇게 싫어하는 애를 시종 한 명의 힘으로 목욕탕에 밀어 넣기는 힘들 것 같았다.
“잠깐, 그만. 안 되겠다, 얘는 두고 가 봐.”
“옙.”
목욕을 하지 못할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건가? 설마…….
나는 시종 대신 사라에게 니키를 넘겼다.
“사라, 얘를 데려가서 깨끗하게 씻겨 줘.”
“이…… 이거, 놓으라니까…….”
니키는 여전히 반항적인 기색이었지만 아까에 비하면 한풀 힘이 꺾였다. 나는 니키를 향해 씩 웃으며 경고했다.
“거절은 용납하지 않아, 니키. 얌전히 씻지 않으면 무서운 꼴을 겪게 될 걸.”
“히이익……!”
위생은 중요하니까 말야. 건강의 기본은 위생이다. 잘 씻어야 병에 안 걸리지.
“자, 니키, 안젤리카 님 말씀 들었죠? 이리 오세요.”
“으으……. 아,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냐!”
마지못해 니키가 저항을 그만두었고, 사라가 니키를 데리고 욕실 쪽으로 사라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빠가 염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안젤리카, 정말 아까 그 남자애를 어떡할 생각이니?”
“틀렸어요, 아빠.”
“뭐가 말이니?”
“후후, 아직은 비밀이에요. 그리고 처벌은 말인데요…….”
…….
…….
나는 아빠와 함께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사라와 니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간식으로 나온 자몽타르트를 반쯤 먹었을 때 사라와 니키가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크로셀 님, 안젤리카 님.”
“으…….”
사라는 내 요청을 충실히 수행했다. 깨끗하게 씻은 뒤 새 옷을 입은 니키는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탁한 붉은색이던 머리카락이 원래의 색을 되찾아 엷은 당근색이 되었다. 몸에 걸친 셔츠와 반바지는 단순한 디자인이었지만 니키의 몸에 딱 맞았다.
그런데 니키의 뺨이 머리카락과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니키는 새 옷이 어색한지 비척비척 걸어 내게 다가오더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젤리카 님, 어떻게 알았어?”
“뭐를 말이니?”
나는 그렇게 반문하며 사라 쪽을 보았다. 사라가 쓴웃음을 머금은 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상대로였던 모양이다.
“내가…… 저기…… 여자애인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