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나는 아빠와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거대한 강이 놓인 기분을 느꼈다.
충격이다. 아빠는 그냥 착한 것이 아니라 비현실적일 정도로 착했다.
나도 진심 어린 대화 좋아해. 하지만 머지않아 서로를 집어삼키기 위해 여러 왕국이 박 터지게 싸워 댈 이 <마.왕.꾸>의 세계에서 과연 대화가 유효한 수단일까.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흑막의 힘과 공포로 상대를 무릎 꿇리는 것이 먼저 아닐까요, 아빠.’
가만, 그러고 보니.
<마.왕.꾸>에서 직접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크로셀 데네브지만, 그를 조종한 사람은 플레이어인 전생의 나다. 그렇다면…….
설마 나쁜 것은 나?
나만 쓰레기야?!
‘아니, 진정하자. 그럴 리가 없어.’
비록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은 전생의 나지만, 크로셀 데네브 역시 설정부터가 대마왕이다. 충분히 흑막이 될 자질이 있는 악(惡) 성향의 캐릭터였다고.
그러니 한 번 한 일, 두 번도 할 수 있을 테다.
‘후후후, 걱정 마세요, 아빠. 내가 아빠의 본성이 깨어나게 할 테니까요.’
저만 믿으세요!
* * *
온종일 아빠를 관찰하며 흑막으로 프로듀스할 방법을 찾는 나날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안젤리카 님, 오늘도 그것만 드시는 건가요?”
“응, 이거만 있으면 돼.”
“그래도 조금만 더 드세요.”
“아니야, 괜찮아.”
나는 평소처럼 붉은 열매 한 움큼만 접시에 덜어 낸 뒤 음식을 물렸다. 그런데 남은 음식을 들고 갔던 사라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안젤리카 님, 주방의 요리사가 안젤리카 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요리사가 나한테 무슨 일로?”
“그건……. 안젤리카 님을 꼭 직접 뵙고 말하겠다고 해요. 돌아가라고 할까요?”
“아니야, 들어오라고 해.”
요리사의 용건으로 짐작 가는 것은 없지만, 나를 꼭 만나고 싶다는데 만나지 않을 이유는 없겠지.
잠시 뒤, 요리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낯이 익다. 나는 곧 그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 냈다. 이므시 백작이 나타난 오찬 날, 겁에 질려 있던 그 요리사였다. 가까이서 본 그는 왕성의 요리사치고는 꽤 젊은 나이의 남자였다.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했어?”
털썩!
다짜고짜 요리사가 무릎을 꿇더니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안젤리카 님, 죽여 주십시오!”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당황해서 일단 요리사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사라와 내가 요리사의 팔을 한 짝씩 붙잡고 잡아당기는 데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고통에 잠긴 표정으로 고백했다.
“저…… 저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처벌해 주십시오.”
사기꾼 상인의 일 때문에 겁을 먹고 자수하려는 건가? 왜 아빠가 아닌 나한테 왔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잘못이라니, 횡령? 돈이나 물건을 훔쳤어?”
“다……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남의 것은 동전 한 닢 손댄 적 없어요!”
“횡령이 아니라면 강력 범죄야? 살인, 강도, 폭행 등을 저질렀다거나?”
“으허엉! 무서운 말씀 하지 마세요…….”
요리사는 내가 예시로 든 범죄 종류를 듣기만 해도 겁이 난다는 듯 덜덜 떨었다. 그 밖에 여러 범죄를 떠오르는 대로 읊었지만 요리사의 반응은 여전했다.
대체 뭐람. 스무 고개라도 하는 기분이다.
“길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렸어? 어린아이한테 사탕을 줬다 뺏었어? 아, 손을 안 씻었구나?”
“아닙니다. 저는 항상 깨끗이 손을 씻습니다.”
“그럼 대체 뭔데 그래?!”
갑갑한 마음에 내가 빽 소리를 지른 뒤에야 요리사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용이 퍽 황당했다.
“안젤리카 님의 입맛에 맞지 않는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야? 입맛이라니?”
“매번 접시에서 장식품만 가져가시고 손도 안 대시잖아요. 다 제가 만든 요리가 맛이 없어서…… 으허엉!”
“저기……. 그런 거 아니니까 진정해.”
“겨우 안젤리카 님이 의식을 차리셨는데, 맛없는 요리를 드시게 하다니…… 고개를 들 수 없어요!”
“그냥 나무에 머리를 부딪힌 건데, 뭐. 너무 오버하지 마.”
나는 사라와 함께 요리사를 진정시켰다. 잠시 뒤 겨우 눈물을 그친 요리사가 그간 있었던 일을 줄줄 쏟아 내었다.
요리사의 이름은 케나스.
며칠 전까지 케나스는 왕성 부엌의 말단 주방 보조였다. 아빠와 내 식탁에 올라가는 음식을 만드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청소나 설거지, 재료 밑준비 따위를 맡아 했다.
그런데 이므시 백작이 나타난 오찬 날 당일. 왕성 부엌의 주방장이 튀었다.
“뭐? 튀었다고……?”
“네, 전 주방장은 도둑질을 하다 들켜서 도망쳤답니다.”
옆에서 사라가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그 말을 들으니 참, 뭐랄까…….
‘우리 집 진짜 개판이네…….’
흑막이 착해졌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엉망진창이 될 수 있는 건가?
아무튼.
워낙 급한 상황이었던지라, 그날 케나스가 대신해서 오찬 요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케나스는 말단 주방 보조에서 벗어나 수석 요리사로 진급하였고, 내 식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어쩐지 오찬 음식이 평소보다 유난히 맛있더라니. 도망친 전 주방장보다 케나스 쪽이 더 실력이 뛰어난 모양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잘된 일인가.
“제가 요리를 맡은 이후로 안젤리카 님께서 음식을 남기셨죠. 역시 입맛에 맞지 않으신 거죠……?”
최근 식사를 적게 한 것은 사실 회계 장부만 생각하면 입맛이 돌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하루 종일 아빠를 밀착 관찰하기 위해서는 느긋하게 식사를 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가만, 그런데 손도 대지 않았다고?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확실히 요 며칠 식사를 적게 하기는 했지만, 아예 굶지는 않았는데.
나는 주머니에서 오늘 아침 접시에서 덜어 낸 붉은 열매를 꺼냈다.
“안 굶었어. 이거 먹었는데?”
케나스는 큰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내 손에 든 열매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냅다 머리를 박았다.
“주, 죽여 주십시오!”
“아니, 왜 또 그래?!”
흑막이 되어야 하는 사람은 우리 아빠라고. 누가 보면 내가 흑막이라서 걸핏하면 고용인들을 괴롭히는 줄 알겠어!
케나스가 몸을 달달 떨면서 말했다.
“그…… 그건, 그냥 접시에 장식으로 올린 것입니다. 색깔이 예뻐서…….”
“응? 아니야, 이거 맛있어.”
나는 붉은 열매 한 알을 입에 쏙 넣었다. 입 안에서 새콤한 과즙이 확 퍼진다. 맛있다.
얼굴이 흙빛이 된 케나스가 또 머리를 조아릴 기색이라 나는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이거, 틸라 열매잖아. 맞지?”
“네, 맞습니다만…….”
<마.왕.꾸>에는 틸라리아라고 불리는 지역이 있다.
저주받은 땅, 틸라리아.
모험가를 파견하면 정신력이 깎이고 상태 이상에 걸려서 골치 아픈 지역이었다. 당연히 농경도, 목축도 불가능하다. 왕국의 위치를 정할 때 틸라리아 지역을 피하는 것이 <마.왕.꾸>의 핵심 공략일 정도였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만 자라는 희귀 작물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틸라다.
잎은 선명한 초록색이고 꽃과 열매는 붉은색이라 꽤 화사하고 예쁘다. 희소한 작물인 점도 한 몫 하여, 틸라의 꽃과 열매는 고급 테이블 장식으로 쓰였다.
케나스가 내 식탁에 틸라의 꽃과 열매를 올린 것도 그래서였겠지.
그런데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틸라는 먹을 수 있다. 새콤한 열매도 맛있지만, 진짜 맛있는 부분은…….
“틸라는 뿌리도 맛있어. 다음에…….”
“네?! 안젤리카 님! 설마 틸라 뿌리를 드신 건 아니시죠?!”
창백하게 질린 사라가 내 손을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괜찮아. 틸라 뿌리는…….”
“아, 아아! 의사! 의사를 불러야겠어요. 안젤리카 님이 틸라 뿌리를 드셨으면 큰일이에요!”
정말로 사라가 의사를 부르려 뛰쳐나가려고 해서,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안 먹었어! 안 먹었으니까 그렇게 놀라지 마.”
“정말이시죠?”
“응, 정말.”
“저는 또 안젤리카 님이 틸라 뿌리를 드신 줄 알고, 흑…….”
문득 느낀 건데, 이 왕성 사람들 과보호가 꽤 심하지 않나? 아침 좀 적게 먹었다고 대뜸 죽여 달라는 케나스나, 잎새에 바람만 일어도 깜짝 놀라는 이 감정 풍부한 시녀나…….
‘우리 아빠만 해도 나를 과보호하는 느낌이었고.’
확실히 HP 10짜리 몸이라 그런지 체력이 약하긴 하지만, 그 외에 아픈 곳은 없었다.
‘빙의한 그날, 나무에 머리를 부딪히고 쓰러졌다고 했지.’
그런 사고는 어린애들 다 한 번씩 겪지 않나? 고작 이마에 혹이 난 정도로 이럴 일인가.
뭐,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사라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틸라 뿌리에는 독이 있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틸라 뿌리를 파 먹은 틸라리아 사람들이 전부 죽었다는 흉흉한 전설까지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독은 굉장히 쉽게 제거가 가능했다. 뿌리에서 독액이 든 윗동 부분을 잘라 낸 다음 불에 천천히 구우면 끝이다.
왜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느냐면…….
애초에 이 대륙에는 뿌리채소를 먹는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자나 순무, 당근 따위는 존재했지만 일부 지방에서만 먹었다.
거기다 테이블 장식으로만 쓰이는 틸라를 캐러 틸라리아 지역에 가는 사람도 많지 않으니까.
‘어라, 잠깐.’
매일 내 식사를 내올 때 틸라 꽃과 열매로 장식한다는 건 왕성에 틸라가 있다는 뜻인데.
이거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으음, 뭔가 생각날 듯 말 듯 한데.’
“케나스, 왕성에 있는 틸라를 좀 보고 싶은데.”
“차라리 죽여 주십시오……!”
“아니, 왜 또?!”
“역시 제 요리가 쓰레기 같아서……. 네 요리를 먹느니 차라리 틸라 뿌리를 먹고 죽겠다는 뜻이신 거죠?!”
“…….”
얘 멘탈 너무 약한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