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 *
사라는 계속해서 내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직접 모든 시중을 드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살짝 재채기만 해도 어쩔 줄 몰라 했다.
사라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나를 걱정해 준다는 건 가슴속 깊은 곳 어딘가가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라를 떼어 내고 몰래 문서 보관고에 들어가는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았다.
바로 정면 돌파다.
“사라, 나 아빠한테 갔다 올게.”
“네. 지금 시간이라면 집무실에 계실 거예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철두철미한 사라는 집무실 문 앞까지 나를 데려다준 뒤에야 물러났다. 문을 노크하자 곧장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들렸다.
“안젤리카, 여기는 어쩐 일이니?”
“……! 아, 그, 그게요.”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아, 맞다. 우리 아빠 흑막 아니지. 바로 얼마 전까지 아빠가 흑막이라고 굳게 믿고 쫄아 있었더니 나도 모르게 그만.
하지만 (곧 흑막이 될 예정인) 그냥 착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으니 편하게 대해야겠다.
나는 집무실 옆에 딸린 작은 문서 보관고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빠, 나 저기를 구경하고 싶어요!”
적당한 핑곗거리도 두어 개 생각해 갔으나, 크로셀은 내 말을 듣자마자 시원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렴.”
“어, 정말로요?”
이유도 묻지 않고?
“당연하지. 이 왕성 안에서 안젤리카가 들어가지 못할 곳은 없단다.”
문서 보관고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우리 아빠 이렇게 착해서 어떡하지. 이런 아빠를 훌륭한 흑막으로 만들려면 갈 길이 멀겠다.
아무튼 허락을 얻고 나는 당장 문서 보관고로 향했다. 빽빽하게 책장이 들어찬 문서 보관고에는 데네브 왕국의 역사, 명부, 기록 따위가 보관되어 있었다.
“아, 이거다!”
먼지와 씨름하며 한참 책장을 뒤적거린 끝에 겨우 원하는 회계 장부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장부를 열기 전에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래도 열심히 키운 왕국인데 그렇게 상황이 나쁠 리는 없겠지. 써먹을 만한 생산 설비가 어디 있을지도 몰라.
…….
…….
그리고 수십 분 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이고, 머리야…….”
흑막 플레이…… 쉽지 않을 것 같다.
* * *
나는 접시에서 붉은 열매 한 움큼을 덜어 낸 뒤 손을 놓았다.
“안젤리카 님, 더 드시지 않으시나요?”
“응, 이거면 됐어.”
사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나 나는 음식에 더는 손을 대지 않고 접시를 물렸다. 이제 저 음식은 왕성의 하인들이 먹겠지.
이런 얼마 안 되는 비용을 줄여 봤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어제 본 장부를 생각하니 도무지 입맛이 없었다.
“하아…….”
“안젤리카 님, 무슨 고민이 있으세요?”
“아니, 없어. 고민은 무슨.”
“그런데 왜 한숨을 쉬시나요? 안젤리카 님이 슬퍼하시면 저도 마음이 아프답니다. 제게만 살짝 말해 주실 수 없으세요?”
“으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안젤리카 님…….”
“하아아…….”
이걸 어쩐다.
어제 회계 장부를 보고 온 이후로 계속 머리가 복잡해서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지금 기분이 어떠냐면…….
‘어떡해. 시험 진짜 망쳤어! 분명 50점밖에 못 받았을 거야.’
라고 생각하며 성적표를 열었는데 15점이라고 적혀 있을 때의 기분이랄까.
왕국 사정이 어려우리라고 짐작했지만, 현실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가혹했다. 아직 왕국이 망하지 않은 것이 신기한 지경이라고 할까.
장부의 초반부는 내가 기억하는 <마.왕.꾸> 플레이와 비슷했다.
크로셀은 적극적인 흑막 플레이로 왕국을 발전시켰다. 이므시 백작을 적당한 땅에 처박아 두고 분리시킨 것까지 비슷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달라진다.
기록의 일부가 지워져 있어서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느 시점부터 장부의 숫자는 착착 줄어들어 갔다. 데네브 왕국의 땅과 별궁, 보물은 적자를 메꾸기 위해 팔려 나갔다.
그리하여 남은 것이라곤, 왕국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작은 땅뿐이었다.
데네브 왕국은 확장조차 여의치 않다. 이곳은 위치 선정이 아주 기가 막혔다. 안 좋은 쪽으로 끝내줬다는 뜻이다.
동쪽에는 만년설이 쌓인 가파른 산맥이 자리해 다른 지역과 교류가 어려웠다. 남쪽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지만, 그 옆에 떡하니 고대 던전이 있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더군다나 땅이 마기에 오염되어 있는 탓에 농사짓기도 힘들었다. 상업도 발달하지 않았고, 그럴듯한 자원도 없었다.
당연히 왕국민도 적고, 걷히는 세금도 적고, 왕국은 만성적인 적자다.
‘어쩐지 왕성에 고용인이 적더라니.’
내가 한 <마.왕.꾸> 플레이 속에서도 왕성 고용인은 최저한도로 유지했다. 흑막 크로셀 데네브가 주위에 사람이 많은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소수 정예 체제였지만, 지금은 그냥 돈이 없어서인 거 같다.
“으으음…….”
얼마 안 되는 식사를 다 먹은 뒤, 의자에 앉아 머리를 부여잡았다.
나는 <두근두근 마법 왕국 꾸미기>의 슈퍼 플레이어인 만큼, 초반 왕국 성장 테크트리를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중에 쓸 만한 게 있을까 생각해 봤지만…….
(1) 상업 테크트리: 수요가 많고 가격이 오르기 쉬운 아이템을 매점해서 가격이 오르면 비싸게 판다. 투자 대비 수익률이 좋다.
(2) 목축업 테크트리: 말과 소를 키워서 돈을 번다. 시간은 다소 걸리지만 지속적으로 우유를 얻을 수 있다.
(3) 예술품 테크트리: 희귀 예술품을 구입하거나 예술가를 후원해서 나중에 예술품을 비싸게 판다. 운에 많이 좌우되지만 대박을 낼 가능성이 있다.
모조리 적지 않은 초기 자금이 필요해서 고작 3 골드로는 실행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50일 안에 왕국을 E 랭크로 만든단 말인가.
참고로 왕국을 E 랭크로 만들기 위한 상세한 조건은 이러하다.
[※ 원 포인트 레슨 : 왕국 종합 평가 ‘소박한 왕국(E)’ 달성 조건
(1) 자금 1천 골드 이상 획득하기 (미달성)
(2) 새로운 생산 시설 1개 이상 건설하기 (미달성)
(3) 왕국의 경제 레벨을 2로 만들기 (미달성)
(4) 상회와 계약하기 (미달성)]
즉, 돈이 필요했다. 여기서 살아남는 데도, 초반 테크트리를 실행하는 데도, 아빠를 흑막으로 만드는 데도 돈이 들었다.
‘……가만.’
나는 발상을 전환할 필요를 느꼈다.
최강이자 최악의 흑막(특징: 착함)이 바로 곁에 있는데 정석적인 초반 테크트리 따위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내 목적은 아빠를 멋진 흑막으로 만드는 거니까. 흑막에게는 흑막의 방식이 있다.
그래, 그거다.
“사라, 종이를 좀 갖다줘.”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사라는 금방 질 좋은 종이를 여러 장 가지고 왔다. 내가 책상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펜을 들자, 사라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무얼 쓰시려는 건가요? 편지라면 제가 부쳐 드릴게요.”
“아! 일기 쓸 거니까 절대 보면 안 돼.”
“어머, 네, 안 볼 테니까 안심하세요.”
사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러난 다음, 나는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 * *
똑똑똑.
“아빠, 저예요.”
나는 품에 종이를 껴안은 채 문을 두드렸다. 잠시 뒤 안에서 “들어오렴.”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달칵.
“안젤리카, 이 시간에 무슨 일이니?”
종이에 글자를 다 채우고 나니 어느덧 밤이었다. 크로셀은 자신의 침실에서 편안한 차림으로 쉬는 중이었다.
“보여 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그래? 얼른 들어오렴.”
늦은 밤이라 살짝 놀란 기색이었으나, 크로셀은 곧 나를 방으로 들였다.
“착한 아이는 곧 잘 시간이란다. 따뜻한 우유를 준비할 테니 마시고 가려무나.”
“고마워요, 아빠.”
시종을 부르려나 하고 생각했는데, 크로셀은 직접 우유를 데우기 시작했다.
도기 포트에 신선한 우유를 담고 불을 붙인다. 곧 우유의 고소한 냄새가 공기 중으로 퍼져 나왔다.
은빛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고 긴 겉옷을 걸친 채 우유를 끓이는 크로셀은 무척 아름다웠다. 청순, 청량, 청아의 형상화 같다고 할까.
이 남자가 미혼의 청년이었다면 제법 많은 여인의 마음을 흔들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안젤리카의 엄마는 누구일까?
당연히 엄마가 있으니까 안젤리카가 태어났을 텐데, <마.왕.꾸> 게임 내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때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만 집중하느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나는 우유를 데우는 중인 크로셀에게 엄마에 대해서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무슨 사정이 있을 테지.
내게 크로셀은 아직 게임 캐릭터처럼 느껴졌고, 진짜 아빠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내가 그런 내밀한 사정을 물어도 될지 알 수 없었다.
당장 게임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내용도 아니고.
‘으음…….’
엄마에 대해 떠올리려 해 봤지만 몸 주인의 기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빙의하기 전의 ‘안젤리카’라는 인물의 존재감 자체가 흐릿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처음부터 내가 안젤리카였던 것처럼 빠르게 빙의에 익숙해졌다.
단순히 <마.왕.꾸> 슈퍼 플레이어인 나의 적응력이 뛰어났기 때문일까?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자, 따뜻한 우유란다.”
“잘 마실게요, 아빠.”
지금 생각해 봐야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생각을 그만두고 따뜻한 우유를 마셨다. 고소하고 맛있었다.
“그래, 보여 준다는 건 뭐니?”
“그게요…….”
나는 품에 넣어 온 종이 뭉치를 꺼냈다.
“……이걸 봐 주세요.”
“이게 뭐니?”
<데네브 왕국 발전을 위한 제안서>
종이의 제일 첫 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