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돈세탁 루트가 한 가지만 있으리란 법은 없다. 다양한 수단을 쓸수록 더욱 철저하게 돈을 숨길 수 있으니까.
이므시 백작을 도와주는 척하면서 돈을 숨겨 두는 거구나.
그럼 그렇지,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최강의 흑막인 크로셀 데네브가 이므시 백작 따위에게 호구 잡힐 리 없지, 암.
나는 미스터리가 모두 풀려 개운한 마음으로 눈앞의 레몬케이크를 먹었다. 상큼하고 맛있었다.
그렇게 무탈하게 오찬이 끝났다. 이므시 백작은 돌아갈 채비를 했고, 크로셀은 배웅할 준비를 했다. 사라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젤리카 님, 이제 방으로 돌아갈까요?”
“그래!”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응, 엄청 맛있었어.”
그런데 사라는 여전히 우유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고구마를 세 개쯤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크로셀은 고용인들에게도 돈세탁 사실을 밝히지 않았구나. 철두철미한 졸렬 플레이였다.
다이닝 룸을 나와 정원을 거쳐 방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옆에서 걷던 사라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사라?”
“안젤리카 님, 날씨가 아주 좋아요. 저쪽을 통해서 방으로 갈까요?”
“응? 안 그래도 되는데……. 아.”
눈앞에 이므시 백작이 데려온 소년이 서 있었다.
검은 머리가 덥수룩하고 위로 치솟은 눈매를 한 소년은, 반항적인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붉은 눈이 상당히 눈에 띄었다.
‘잠깐 말을 걸어 볼까?’
처음에는 저 소년이 이므시 백작의 아들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게 소개를 시켜 주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들은 아닌 듯했다.
‘이므시 백작하고 얼굴도 안 닮았고.’
친척은 아니라고 해도 내 나이 또래의 소년이다. 흥미를 느낀 나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얘, 너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별로.”
퉁명스러운 말과는 달리 소년은 무척 심심한 듯했다. 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려 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런 어린애랑 놀 정신 연령은 아니지만……. 가끔은 괜찮겠지.
“심심하면 나하고 놀래? 그림 그리기 하자.”
“뭐, 네가 정 그러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너 그림 잘 그린다! 이건 뭘 그린 거야? 두더지?”
“……강아지야.”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므시 백작이 밖으로 나오는 소리였다.
“그럼 다음에는 고양이를……. 어, 얘!”
“칫……!”
인기척을 듣자마자 소년은 얼굴을 확 구기더니 반대쪽으로 타다닥 뛰어가 버렸다. 무슨 일일까?
으음, 뭐, 다음에 다시 만날 일이 있겠지?
* * *
오후.
나는 크로셀의 집무실에서 레몬케이크를 먹는 중이었다. 크로셀이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케이크를 먹으라고 건넸기 때문이다. 흑막 아빠의 옆자리는 부담스러웠지만 케이크는 맛있었다.
집무실에는 크로셀과 나 말고도 또 한 명이 있었다. 바로 이곳 왕성의 시종장 할아버지다. 그동안 시종장이 코빼기도 안 보여서 어디서 뭘 하나 싶었는데, 며칠 휴가였다나.
크로셀은 시종장이 내민 서류를 훑어보면서 물었다.
“부서진 마구간 수리 및 정원 조경비가 필요하단 말이군.”
“네, 그렇습니다. 도합 5천 골드입니다.”
후후.
나는 시종장의 입에서 어처구니없는 금액이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았다. 세 번이나 똑같은 수법에 놀랄 수는 없지.
알아, 안다고. 이번에도 돈세탁인 거지? 돈세탁이 아니고서야 마구간 수리와 정원 조경에 5천 골드나 사용할 리가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포크로 레몬케이크를 푹 찍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알림음이 들렸다.
띠링!
“……!”
[로딩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자유롭게 <두근두근 마법 왕국 꾸미기>의 세계를 즐길 수 있습니다.]
드디어!
아무리 기다려도 끝나지 않아 영원 같던 로딩이 드디어 끝났다.
제일 먼저 왕국 정보부터 확인해야겠다. 나는 곧장 시스템에 접속했다.
[<데네브 왕국 종합 정보>
자금 : 3 골드
왕국 포인트 : 0
호화도 : 0
종합 평가 : 찢어지게 가난한 왕국(F)
설비 : 낡고 좁은 왕성(F)
칭호 : 없음
※ 원 포인트 레슨 : 왕국이 찢어지게 가난합니다. 생산 시설을 가동할 수 없습니다.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될 시, 왕국이 멸망할 위험이 있습니다. 레벨을 올려 왕국을 발전시키세요.
▶ 상세 정보 보기]
이게 뭐야……?
이럴 수가. 이게 다야? 다른 내용 더 없어?
3 골드는 또 뭔데? 애매하게 남은 거스름돈 같아서 더 신경 쓰여!
그러나 눈을 씻고 찾아봐도 비자금을 숨겨 놨다는 식의 내용은 보이지 않았고, ‘찢어지게 가난합니다.’라는 문구만 선명하게 깜빡거렸다.
‘진짜 망해 가는 왕국이었어? 졸렬 플레이가 아니라?’
당황한 가운데 나는 한 가지 무서운 가설을 떠올렸다.
그러면 설마……. 크로셀 데네브도 흑막이 아니라 그냥 착하기만 한 호구?!
[크로셀 데네브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오]
‘네!’
[이름 : 크로셀 데네브
직위 : 찢어지게 가난한 왕국의 왕(F)
소속 : 데네브 왕국
레벨 : 99
특성 : 선량한 마음씨(A)
?? ?? : ??? ?? ?]
…….
…….
상태창의 글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어 봤지만 어디에도 크로셀 데네브가 흑막이며 비자금을 숨겨 두었다는 언급은 없었다.
심지어 선명하게 적힌 ‘선량한 마음씨(A)’가 크로셀이 어떤 캐릭터인지 쐐기를 박았다.
아무리 버그 망겜, 버그 망겜 했다지만 흑막이 착해지는 버그까지 있단 말인가?
‘흑막인데 딸 이름을 천사라는 뜻으로 지어 놨다는 시점에 눈치챘어야 했나…….’
띠링!
충격에 빠진 내 앞에 다시 상태창이 떴다.
[환영합니다, 플레이어 ‘안젤리카 데네브’ 님.
<두근두근 마법 왕국 꾸미기>의 세계에서 멋진 왕국을 가꾸시길 응원합니다.
플레이어 ‘안젤리카 데네브’ 님의 <시나리오 퀘스트> ‘도망은 최선의 생존법’이 도착했습니다.
▶ 계속]
뭐?
나는 ‘계속’ 버튼을 선택했다.
[<시나리오 퀘스트> 도망은 최선의 생존법
데네브 왕국은 현재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웃 나라의 공격을 받아 쫄딱 망합니다.
미리미리 도망쳐서 혼자라도 살아남읍시다. ♬
달성 조건 : 도피 자금을 들고 들키지 않게 왕성에서 빠져나가기
보상 : 생존, 경험치 100exp, 특성도망친 왕녀(C)
실패 시 : 중상 혹은 사망]
“……!”
“……안젤리카?”
내가 허공을 노려보며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 대자 크로셀이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시종장은 이미 5천 골드를 받고 떠난 다음이었다. 빠르기도 하지.
나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이만 방으로 가 볼게요.”
“케이크는 더 안 먹고?”
“음, 네, 배가 불러요.”
“그러니? 그럼 나중에 방으로 케이크를 가져다주마.”
“감사해요, 아빠.”
꾸벅 인사를 하고 집무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렸다.
왜냐고? 갑갑해서!
‘그러면 그동안 있었던 일이 전부…….’
돈세탁이나 비자금 조성 따위가 아니라 사기꾼들에게 뜯어 먹히는 과정 생중계였다는 뜻이다.
눈앞에서 돈을 뜯어 먹히는데도 보고만 있었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버그 때문이건 뭐건, 크로셀 데네브가 착하기만 한 호구가 되었다면 결론은 한 가지밖에 없다.
‘튀자.’
도망쳐야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빠가 구멍이어서야 답이 없다.
차라리 다른 왕국으로 도망친 후, 그 왕국에서 능력을 발휘해 요직을 차지하고, 정보를 빼돌린 다음, 그 정보를 이용해 데네브 왕국을 다시 세우는 쪽이 생존 확률이 높겠다.
나는 즉각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도주 계획을 세운 뒤 바로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