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렇게 먼 곳까지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앉으시지요. 입맛에 맞으실는지 모르겠지만 정성껏 준비했습니다.”
“이 동네 음식은 간이 슴슴해서 원. 그래도 이왕 왔으니 잘 먹고 가지.”
이므시 백작은 웬 남자아이와 동행한 상태였다. 체구로 보아 나와 비슷한 나이인 듯했다. 자세히 보려 했지만, 이므시 백작은 아이를 소개하는 대신 밖으로 내보내 버렸다.
어째 신경 쓰이는데…….
띠링!
때마침 시스템이 눈앞에 이므시 백작의 정보를 띄워 주었다.
[이름 : 로건 이므시
직위 : 작은 영지의 백작(F)
레벨 : ???
특성 : 네 분수를 알라(F), ???
※ 상태 이상 : 야욕을 품음(Lv.9)]
아!
아아아!
이제 기억났다. 이므시 백작!
<마.왕.꾸> 게임에서 크로셀 데네브에게 처리당한 캐릭터다!
이므시 백작이 어떤 캐릭터인가에 대해서는 ‘이므시’라는 이름에 힌트가 있다.
<마.왕.꾸>는 시스템상 영지의 분리 독립이 간단하다. 독립시키고 싶은 캐릭터를 적당한 땅에 배치하고, [관리][분리 독립][작위 수여]를 선택하면 된다.
굳이 전쟁이니 뭐니 거사를 치를 필요는 없다. 빠바밤 하는 효과음과 함께 작위 수여식이 진행된 뒤 자동으로 독립한다.
<마.왕.꾸>를 플레이하면서 나는 크로셀 데네브의 형 캐릭터를 재빨리 ‘이므시 백작령’의 백작으로 독립시켰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므시 백작 캐릭터의 능력치가 놀라울 정도로, 조금도, 요만큼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투 능력은 물론이고, 통솔, 지력, 매력 등등 스테이터스가 모조리 한 자릿수였다. F급 모험가 브레드보다도 쓰레기 같은 능력치다. 어디에도 써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 주제에 또 욕심은 많았다.
상태창의 ‘네 분수를 알라(F)’라는 특성을 봐라. 즉, 그는 자기 분수를 지지리도 몰랐다. ‘상태 이상 : 야욕을 품음’이 기본 상태였다.
이대로 같은 왕국에 두었다가는 반역을 저지를 것이 분명했다.
왕국에 위협이 되는 친척을 곁에 그대로 두면 훌륭한 <마.왕.꾸> 플레이어가 아니지. 화근은 미리미리 제거해야 하는 법이다.
당장 죽이면 좋았겠지만, 안젤리카의 약혼 때까지는 힘을 아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별 쓸모가 없는 구석진 동네를 찔끔 떼어서 이므시 백작령을 만들고 독립시켰다.
이제 이므시라는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임시’ 백작이다.
임시…… 이므시…… 하하…….
‘금방 처리할 캐릭터의 이름을 정하는 데에 시간을 많이 쓰고 싶지 않았단 말야. 엑스트라는 아무 이름이나 붙이면 되지.’
그리고 크로셀은 실제로 이므시 백작을 임시 백작으로 만들어 주었다. 오래지 않아 그를 죽여 버리고 영지를 다시 데네브 왕국에 합병한 것이다.
이것이 피의 약혼식 한 달 뒤에 일어나는 이벤트, 피의 오찬이다.
크로셀은 이므시 백작을 오찬에 초청해서 독을 넣은 음식을 먹인다. 그리고 해독제를 달라고 바닥에 엎드려 비는 이므시를 죽였다.
“형님, 그래도 한때는 혈육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셨습니다.”
“미안하다……. 제발 용서해 줘, 크흑, 윽, 으으윽……!”
“그런 말은 죄를 짓기 전에 하셨어야지요. 핏값을 받아 가겠습니다.”
이 이벤트에서는 이렇게 잘 이해되지 않는 대사가 떴다.
뭐, 버그겠지. 이 게임에 버그가 한두 개도 아니고.
아무튼 피의 오찬에서 이므시 백작은 사망하고, 이므시 백작령은 다시 데네브 왕국에 합병된다.
응? 피의 오찬…… 오찬? 어쩐지 익숙한 단어인데?
가만, 지금 내가 있는 장소가 바로 오찬 장소잖아?
단 세 명이 앉은 커다란 식탁에 시종들이 전채 요리와 음료를 서빙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안젤리카의 식사는 그럴듯하게 나오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나는 아주 잘 먹었다. 그런데 이 오찬에 나온 요리는 평소에 먹던 식사보다도 한층 더 맛있어 보였다.
크로셀이 간단하게 환영 인사를 하고 오찬이 시작되었다. 맛있는 냄새가 확 풍겨 나왔지만, 나는 곧장 음식을 들지 않고 잠시 멈칫거렸다.
‘먹어도 되겠지. 뭔가 들어 있는 건 아니겠지.’
이성적으로는 안다. 지금은 그 게임 속 피의 오찬이 아니다.
피의 오찬은 안젤리카가 죽은 뒤, 크로셀이 이므시 백작을 성에 불러들여서 벌이는 사건이니까.
그래도 그 생생한 광경을 떠올리니 입맛이 싹 달아났다.
“안젤리카, 음식이 입에 안 맞니?”
갑자기 크로셀이 말을 걸었다.
“네, 네에?”
“좀처럼 먹질 않는구나.”
그때 다이닝 룸 한쪽 구석에서 대기 중이던 요리사가 하얗게 질리는 모습이 보였다.
내 입에서 자칫 맛없다는 말이 나왔다간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안다는 듯 절박한 표정이었다.
설마 내 핑계를 대고 요리사를 처리할 생각인가? 안 돼, 그렇게 둘 순 없다.
“아, 아니요! 엄청 맛있어요!”
“한 입도 먹지 않고 맛있다고 하면 어떻게 믿겠니.”
철저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철저하다, 이 흑막!
나는 황급히 숟가락을 들어 앞에 놓인 감자수프를 떠먹었다.
“아, 하하, 봐요. 이렇게 맛있게 먹고 있잖아요.”
어라, 그런데 이 수프 진짜 맛있잖아?
고소한 감자에 신선한 크림, 적절한 간이 빚어낸 풍미 넘치는 맛이 입 안에서 휘몰아쳤다.
이 세계에 오기 전 전생에서 먹은 음식을 모두 통틀어도 비교할 수 없이 맛있었고, 당연하지만 독도 들어 있지 않았다.
내가 정말로 음식을 맛있게 먹자 그제야 크로셀이 생긋 웃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빵과 구운 고기, 야채를 접시에 더 담아 주었다. 금방 접시가 수북해졌다.
“아빠, 이건 너무 많아요.”
“많이 먹어야 튼튼해지지.”
“저는 지금도 튼튼한데요…….”
“더 튼튼해져야지. 안젤리카가 아프면 아빠 마음이 아프단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크로셀이 주는 대로 음식을 하나씩 맛보았다.
고기는 신선했고 야채는 향긋해서 아주 맛있었다. 빵을 수프에 찍어 먹으니 부드러워서 잘 넘어갔다.
내가 음식을 열심히 먹어 치우자 구석에 있던 요리사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 모습을 흘깃 보다가 결심했다.
‘요리사 아저씨, 내가 아저씨만은 흑막의 손길에서 지켜 줄게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귀한 인재다. 반드시 보호해야 한다.
적당히 배가 부르니 자연히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나는 까탈스러운 표정으로 음식을 깨작거리고 있는 이므시 백작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너무했나……?’
흑막 엔딩을 보기 위해 공략에 적힌 대로 플레이하는 중이었다지만 너무 가차 없이 처리했다. 비록 능력치는 엉망이고 욕심은 많았지만, 그게 죽을 정도의 죄는 아니었을 텐데.
나는 연민을 담은 눈빛을 이므시 백작에게 보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이므시 백작이 냅킨으로 입을 닦고는 말했다.
“이 아이가 네 딸인가. 푸흡, 공작새처럼 꾸미고 있군.”
크로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웃지 않는 크로셀은 서늘하고 건조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여기까지 오랜만에 걸음 하셨는데, 용건이 있으시다면 듣겠습니다.”
“흐흠.”
이므시 백작은 잔뜩 거드름을 피우더니, 음료로 입을 축이고 말했다.
“실은 이므시 백작령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그렇습니까.”
“몬스터 떼가 민가로 내려오더니 농작물을 뜯어 먹었다. 피해가 막심한 상황이다.”
“저런, 안타깝습니다.”
어라? 좀 이상한데?
이므시 백작령은 몬스터가 출몰하는 지역과 거리가 있었다. 거기다 몬스터는 인간들의 식량을 먹지 않는다. 그런데 왜 저런 말을 하지?
이므시 백작은 목에 잔뜩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당장 모험가를 고용해서 몬스터를 쫓아내야 하는데, 사정이 어렵구나. 데네브 왕국에서 지원을 해 다오.”
‘나 무능하오.’라는 선언을 저렇게 거만하게 할 수 있다니. 이므시 백작은 능력치와 인성 모두 바닥이구나.
“어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금화 3천 골드만 지원해 주면 위기는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흐음…….”
크로셀이 생각에 잠겼다.
말도 안 되는 부탁이니 당연히 거절하겠지. 빌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대뜸 내놓으라니, 그것도 3천 골드나! 모험가를 고용하는 데에 쓴다기에는 너무 큰돈이다.
나는 슬쩍 오찬 테이블 주위를 쳐다보았다. 주변에서 대기 중인 사라와 요리사, 시종이 하나같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꼭 가슴이 갑갑한 것처럼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두드리는 시종도 있었다.
저런 표정을 어디서 많이 봤는데.
비유하자면…… 아, 그래.
사이다는커녕 우유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고구마를 먹는 사람의 표정이 딱 저럴 것 같았다.
그때, 크로셀이 이므시 백작을 향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도와드리지요.”
“정말이냐? 고맙다!”
나는 디저트로 나온 레몬케이크를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뭐, 뭐어어어? 아니, 그걸 왜 줘?!
내가 속으로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크로셀은 3천 골드를 건넸고, 이므시 백작은 기분 좋은 듯 웃으며 돈을 받아 챙겼다.
나는 문득 진실을 깨달았다.
‘아! 아아아! 이번에도 그건가, 돈세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