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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몰락귀족-60화 (60/60)

< 내란(2) >

나가사키로 향하는 배 위에서, 나는 갑판에 나와 있었다.

느리게 항진하는 범선의 갑판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라일라.”

“네, 주인님.”

“..... 네가 나를 섬긴 지도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지.”

10년은 지났고 20년은 안 됐던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얼마 전, 그녀와 이야기를 했다.”

“그녀라 하시면.....”

“내 아내.”

나는 쓰게 웃었다.

“사랑 따위 없이 결혼했지, 딸을 낳고도 의무적으로 함께 하고 있다. 아직 아들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앨리스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아서야.”

사실상 남남처럼 사는 부부들은 귀족 사회에서는 흔해빠졌다.

다툼 끝에 갈라서는 것도 아니고, 서로에 대해 그냥 면식 있는 수준으로만 대하는 부부다.

애정도, 사랑도 없이 결혼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너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더군.”

“죄송합니다.”

“죄송할 필요도 없고, 그런 말도 듣고 싶지 않아.”

나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래,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한때의 감정이겠거니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야.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무책임하게.”

“저는..... 그저......”

“다시 말해 두지만, 네 잘못은 아니야. 네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인간의 감정은 그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그것을 드러내느냐, 아니면 내가 그렇듯이 두꺼운 가면을 써서 감추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어떠한 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 자체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이 잘못이라 여기지 않는다.

“플로렌스는 약속은 약속이라고 했어, 그녀든 나든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기로 했었지. 그리고 너와의 관계 역시 그 사생활에 들어간다고 했다. 신께서 축복하시지 않는 관계라고 한들, 일단 그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니 이건 오롯이 너와 나의 문제야.”

밤바다에 미약한 파도가 친다. 배 위에서는 흔들림이 거의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미약한 파도다.

그런 조그마한 파도에 더 조그마한 부유물이 삼켜져 사라진다.

“라일라, 한 가지만 확실히 묻자, 나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나?”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그냥 좋았다.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고, 대화를 나누면 그날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도련님은 백작가의 후계자고, 저는 일개 고아 출신 하녀, 마님이 불쌍히 여겨 거두어주신 아이. 감히 도련님의 옆자리를 차지하려는 건 분수를 모르는 짓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억눌렀다. 그래서 참았다.

그냥 도련님의 조수로 살아가는 것에서 만족하고 싶었다.

그러나 볼 수 있으되 닿지 못한다는 것이, 억눌러야만 하는 감정이 얼마나 더 거세게 타오르는가.

그녀는 그것을 실감해야 했다.

“난 널 이성으로 본 적이 없다. 난 널 동생처럼 여긴 적은 있지만, 여자로 본 적은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

옳지 않으니까.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주인의 손에 이끌려서 몸을 망치고 인생마저 망치는 메이드가 어디 한둘이더냐. 난 네게 그런 운명을 맞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삿된 욕망은 한 번 타오르고 나면 식어버린다. 그게 사랑이라고 한들 한 번 이루어지고 나면 도리어 차갑게 식어버릴 수도 있다.

누가 그랬던가? 로미오와 줄리엣이 결혼에 성공했다고 해도 그게 꼭 해피엔딩을 보장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사랑은 장애물이 있을 때 도리어 더욱 열정적이 된다.

그렇기에 책임이 동반되지 않은 충동에 몸을 맡기면, 그 열기가 식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다른 이에게 눈을 돌리지 않으려 했다. 내 욕망 때문에 누군가의, 특히 너의 인생이 망가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너는 어떠냐?”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너는 이 모든 것이 장애물 때문에 더더욱 끓어오른 충동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나.”

냉정해 보여도, 해야 할 말이다.

누가 그랬더라? 낭만 뒤에는 현실이 있고, 그 뒤에는 생활이 있다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처럼 무책임한 말이 세상에 어디 있던가.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건, 누군가를 안는다는 건 약속이다.

지킬 자신이 없는 약속은, 지켜지지 못할 약속은, 지킬 생각이 없는 약속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지.

애초에 건드리지 말아야지.

그건 무책임한 거다.

그리고 나는 행동에 책임지지 않는 인간이 아니다.

“플로렌스와 내 결혼은 거래였다. 나는 그녀에게 필요한 게 있었고, 그녀도 내게 원하는 게 있었지, 그 사이에 애정은 처음부터 없었어, 계산서뿐와 청구서뿐이었지. 하지만 네가 내게 품은 연심은 어떠한 것도 보장해주지 못한다.”

이혼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굉장히 어렵다.

그러나 결혼은 거래였다.

정부라는 자리는 마음이 식으면 끝이다. 오히려 일반적인 주인과 메이드와의 관계보다도 못해질 수도 있다.

“그래도 하겠나?”

나는, 적어도 내 사람에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포기하라는 말씀처럼 들리네요, 솔직히.”

“미래는 모르는 일이니까.”

그녀를 아끼지 않았더라면 이런 말 자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무시했겠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면 제가 한 가지 여쭙고 싶어요.”

라일라는 물었다.

“절 사랑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 네게 충실해야 한다면, 당연히 네게 충실하겠지.”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라일라는 언제나와 같은 주인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절 원하시나요.”

원한다.

원한다.....

‘내가 원하는 건, 뭐지.’

의무의 수행.

욕구, 욕망.

이 두 번째 생에서, 내가 정말 원했던 건 뭐지?

“모르겠구나.”

그러자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지금부터라도 알아가면 되지 않을까요.”

***

파리, 프랑스.

“칼, 오랜만입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회합인데 빠질 순 없지요. 피에르, 그리고 3개월 전부터 이미 실업자 신세요.”

피에르 프루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얼마 전 정부에 의해 폐간된 라인 신문의 편집장이자, 황금여명회의 마구스를 환영했다.

황금여명회는 자유주의적 세력이었지만, 지역마다, 지부마다 생각이 조금씩 달랐다.

공통점이 있다면 뭉치고, 차이점이 있다면 콩가루처럼 흩어진다.

회합에서 그들은 입이 있는 이라면 맹렬한 사상의 토론을 벌이고는 했다.

혁명을 해야 하는가 점진적인 개혁인가.

혁명을 해야 한다면 그 혁명이 최종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모습은 무엇인가.

혁명의 과정은 어떠해야 하는가.

황금여명회의 규칙은 그 어떠한 의견도 탄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파리 내의 황금여명회만 해도 보나파르트주의자와 공화주의자, 그리고 프루동 본인이 이끄는 아나키스트들이 뒤섞여 있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상대의 의견을 꺾는 방법은 오직 제한 없는 토론뿐이었다.

“사실, 이번에 파리로 옮기고자 합니다. 아무래도 프로이센에서는 더 있을 수가 없더군요.”

“당신이 당한 일은 유감이지만, 파리 지부장으로써는 기쁠 따름이군요. 다만......”

프루동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회합에서는 상대의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입니다. 그리고 상대를 인신공격하는 태도 역시 절대 금지입니다. 당신이 평소에 무슨 생활을 하든지 다른 회원들은 결코 상관하지 않겠지만, 당신의 태도로 인해 조직 내에 분란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회원은 오직 조직 안에서 보이는 태도에 따라 평가받는다. 조직의 분열을 막기 위한 중요한 규칙이다.

“물론이오.”

“그럼 회장으로 가시죠, 마구스 카를 마르크스.”

***

회장에 앉은 카를 마르크스는 프루동에게 속삭였다.

“분위기를 보니 이미 파리 지부는 혁명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구려?”

“루이필리프의 실정은 이미 극에 달했습니다. 다만 혁명 뒤에 어떠한 정권을 세울지가 결론이 나지 않았을 뿐이지요, 이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다면 공개적으로 하셔도 좋습니다. 적잖은 부분에서 의견일치가 있었지만,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 쉽게 설득되지 않는군요.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볼 때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의 힘은 무시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서 이들이 이탈하면 혁명이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군사조직의 힘을 빌리겠다는 것 아니오? 저 자들은 국민위병 관련자인 것 같소만.”

“저 역시 모든 권위와 삶에 필요한 최소한을 제외한 소유에 반대하는 입장이긴 합니다만, 세계혁명 전까지는 어느 정도 타협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뛰라고 하고, 날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걸음마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쯧.”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마르크스는 혀를 찼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이번에 루이필리프가 베트남에서 참패하면서 원정군을 투입하는 데 쓴 비용은 거의 공중분해됐소, 어떻게든 중국에서 벌충해보려는 것 같지만 어림도 없지.”

“댐 건설도 문제입니다. 여러 차례 붕괴 사고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상 이 공사는 실패입니다. 다만 그걸 가리고자 발악하고 있을 뿐이죠.”

“아직 폭로할 때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아직 물증이 부족합니다. 섣부르게 폭로했다가는 저들은 모든 증거를 은폐할 겁니다. 물증을 충분히 수집한 다음에 동시다발적으로 터트려야 합니다. 도무지 부정할 수 없게요.”

“벌써 터트리기에는 아깝습니다. 여러 정황을 파고들어갈수록 엮여나오는 사람이 많아요, 저희가 처음에 뒤를 캔 건 장관급이었지만, 안쪽으로 파고들어가니 뇌물 수수 정황이 나오는 이들만 100명을 넘겼습니다. 하지만 지금 폭로해도 그들의 유죄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해요.”

“기다린다, 기다린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예?”

“모든 일을 망치는 건 조급증이오. 5년, 5년만 더 기다립시다. 최소한 현지에 파견된 정보원들이 부정 못할 증거를 모아오기는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실패할 수밖에 없는 공사에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댐 공사가 실패했다는 게 드러나면, 거기에 투자한 수많은 개인과 은행이 파산할 터.

그 누구도 수습할 수 없는 거대한 혼란이 몰아칠 것이다.

그러나 당장 혁명을 일으킬 수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은 루이 나폴레옹을 황제로 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프루동의 관점에서, 그리고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이는 또 다른 왕정이었다. 보나파르트주의 역시 명백히 권위주의 아닌가. 물론 루이필리프보다는 자유주의적이라지만 더더욱 급진적인 혁명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파트너였다

문제는 그들이 군을 장악하고 있고, 국민적인 지지가 쏠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들 없이는 혁명은 불가능하다.

프루동과 마르크스가 입단하기도 전부터 있었던,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을 거의 통합하게 해 준 황금여명회의 규칙은 둘째쳐도 저들을 배제하면 그들의 모든 논의는 탁상공론에 불과했으니, 억지로 강행한다고 해도 내분은 필연적이다.

타협점을 찾을 시간이 필요했다.

< 내란(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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