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몰락귀족-59화 (59/60)

< 내란(1) >

일본, 요코스카 개항장.

향기는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소중한 사람의 향기는 맡는 것만으로도 달콤하고, 끔찍한 기억 속의 향기는 맡는 것만으로도 역겹게 느껴진다.

시각보다, 청각보다도 후각은 기억을 되새기게 만들기에 적합하다.

그리고 요코스카 앞바다의 비릿한 바다냄새는.........

“...........”

저쯤에 항공모함이 있었다, CVN-80 엔터프라이즈였던가? 아니, 그건 이미 중요하지 않다.

“저기가 일본인가요?”

“그래.”

나는 중얼거렸다.

“저기가 일본이다.”

내가 온 건, 카쿠레키리시탄과 접촉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정말 기적같은 일이겠군요, 형제님.”

“나가사키 어딘가에 있을 게 확실하긴 합니다. 그들 사이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돈다고 하더군요.”

나는 입을 열었다.

“250년 전, 바스챤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죽기 전에 ‘7대가 지나면 흑선을 타고 교황이 보낸 고해신부가 오며, 매주 고해성사를 할 수 있으며 어디서라도 큰소리로 성가를 부를 수 있는 시대가 오고, 길에서 외교인을 마주치면 상대가 길을 양보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예언하고는 순교했습니다.”

“아멘.”

나랑 같이 있는 윌모어 신부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서 보내온 사람이다. 어머니가 가톨릭인 게 이럴 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백작부인께서는 실로 선하신 분입니다. 항상 기부와 선행을 손에서 놓지 않으시는 분이시죠.”

“예, 그리고 이제 신부님께서는 이 일본의 신자들을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임무가 있으시죠.”

나는 가까워져오는 항구를 바라보았다.

“먼저 막부와 대담을 할 겁니다. 그리고 나서 나가사키로 갈 거고요.”

“오, 신이시여.”

“걱정 마십시오, 일본인들이 제 비호를 받으시는 신부님을 해칠 정도의 배짱은 없을 겁니다.”

“그건 애초에 두렵지도 않습니다. 주님을 전하다 순교하는 것은 저희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순명과 고난은 저희의 미덕입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현 쇼군이 도쿠가와 이에요시라고 했지.”

모르는 이름이기는 한데, 그래도 현실 정도야 파악하겠지.

“쇼군에게는 아들이 많았지만, 다 어려서 죽고 이에사다라는 아들이 하나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병약하다더군요.”

“병약해?”

“예,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지능이 떨어지게 되었다고 하고, 거기에 각기병까지 앓는다더군요.”

“각기병?”

그..... 쌀밥만 먹으면 생기는 병 아냐? 흰쌀밥. 고기나 콩이라도 잘 챙겨먹으면..... 아, 아직 육식 금령 안 풀렸나?

“쇼군을 만나야 할 이유가 하나 늘었군.”

어쩌면 생각보다 많은 걸 뜯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에도 성, 에도.

도쿠가와 이예요시는 여러모로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일본 쇼군 하면 딱 생각나는 느낌의 인물이었다는 거다.

나는 적당히 예를 표한 후 상대의 앞에 앉았다.

“그래, 지나를 짓밟고 있다던 영국의 공사가 이곳에 온 이유는 뭔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자 온 것이지요.”

“이득이라, 혹시 그 아편을 말함인가.”

말 속에 비꼼이 들어가 있었다. 뭐, 쇼군이라고 해도 이미 개항이고 뭐고 다 한 상황에서 귀머거리일 리는 없으니까.

“아편 문제는 저도 본국을 옹호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일단 대영제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이 전쟁은 아편이 아니라 그냥 자유무역의 보장을 위한 전쟁입니다.”

“허.”

“우선 대화에 앞서, 상호 간의 우호를 위해 한 가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선물?”

“각기병의 치료제입니다.”

“.........!”

“정확히는 처방이라고 해드려야겠군요.”

“말해보게.”

“껍질을 벗기지 않은 곡식으로 지은 밥, 콩, 감자, 돼지의 고기 등을 모든 끼니에 충분히 섭취하면 치료될 겁니다.”

“......... 그게 전부인가?”

금육령이 내려져 있기는 하지만 쇼군 정도 되면 고기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 몰래몰래 먹는 놈들도 이미 한둘이 아니거든, 더욱이 약용이라면 허용되기도 하고.

콩은 아예 제법 많이 먹는 음식으로 안다. 감자는 먹나 모르겠네.

“실제로 효험을 본 치료법입니다. 단, 지속적으로 먹어야 합니다. 충분히 먹지 않거나 다 나은 것 같다고 끊으면 재발하더군요.”

그 지독한 병의 치료법이 고작 그딴 거라니 안 믿겨지지? 근데 그거 맞아.

각기병은 비타민 B가 부족해서 생기는 병이다. 비타민 B가 들어 있는 건 현미가 대표적이고 다른 음식들도 많다. 돼지고기나 콩에도 제법 있고.

21세기에는 각기병을 예방하려고 도정 과정에서 일부러 비타민을 첨가한다. 심지어 라면에도 비타민을 첨가해서 원래 하얀 색인 라면사리가 노르스름해지는 거고.

근데 이 시대는 그게 하층민 식단이다 보니까.

되려 돈 많은 사람들은 반찬이 충실해서 안 걸리기는 하는데...... 또 일본은 예외다.

일본인들이 워낙 밥 적게 먹는 것도 있고, 그놈의 금육령 때문에 일본인의 식생활에 문제가 참 많이 생겼다. 당장 쇼군보다 내가 앉은키가 한참 더 크잖냐.....

거기에 근대화한 뒤에도 각기병 가지고 웃기지도 않은 삽질을 해댄 게 일본이다. 일본 해군에서 각기병의 원인이 영양소 부족에 있다고 결론짓고 식단으로 도입한 게 카레였다. 흰쌀밥을 안 주고 잡곡밥으로 바꾸려니까 가난한 놈들이나 먹는 걸 군대에서 준다고 수병들이 격렬하게 반발해서 그랬다는데, 웃기는 건 카레라이스를 지급하니까 무슨 설사 같은 걸 준다고 또 반발했다던가.

더 웃기는 건 육군은 그렇게 먹이니까 각기병이 안 걸린다는 걸 알면서도 해군 놈들 따라하기 싫다고 각기병은 전염병이라고 박박 우겨댔고, 러일전쟁 때 수만 명이 각기병으로 죽어나간 뒤에야 식단 개선을 했다던가?

“정말...... 그게 효험이 있단 말인가?”

“물론입니다.”

나는 태연스레 말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그래, 그렇게 하게.”

“대영제국은 일본이 문명국이라는 증거, 즉 신앙의 자유 보장을 원합니다.”

“신앙의 자유라니?”

“별거 아닙니다. 개항장에 일본에 체류하는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개항장에 한해서 신앙의 자유를 허가해달라는 의미죠.”

“개항장이라면......”

“개항장 내 외국인들은 물론, 거류지 내에서의 천주교 금령의 해지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외국인들뿐 아니라 우리 신민들에게도 말인가?”

“물론입니다.”

“...........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로군.”

“염려하지 마십시오, 기다려드리겠습니다.”

***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신부님, 저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죠.”

나는 여유 있게 말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파머스턴 경이 계셨을 때는 지원이 훨씬 빵빵했는데 말입니다.”

파머스턴 경은 3년 전 직무를 그만두었다. 내게는 아쉬운 일이었다. 그 양반은 지원 한 번 화끈하게 해 줬고, 로버트 필 총리의 지원은 그보다는 못했으니까. 다시 말하자면 일본에서는 베트남과는 달리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충분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만일 성모 마리아를 알아보는 자들이 나타난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한다면, 아직 신앙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니 때를 기다리라고 하고 저와 그들의 만남을 주선해주십시오. 물론 비밀리에, 무슨 의미인지 알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신앙을 위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이 시대의 선교사들이 저렇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멀쩡히 있는 국가를 전복시키는 것도 서슴지 않지.

“물론 아직 중국에서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의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바로 일본에 지원이 오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리고..... 런던 협약 때문에라도 제가 대놓고 개입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를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슬픈 일입니다.”

물론 아편전쟁은 조만간 끝날 눈치긴 하다. 슬슬 청이 한계에 몰린 거 같거든.

협상은 내가 없어도 알아서 진전되고 있고.

“그럼 나가사키 개항장에 가보십시오.”

“아, 같이 안 가십니까?”

“제가 가긴 할 겁니다만,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아마 하루 이틀쯤 늦어질 것 같습니다.”

그래,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

바다 위에는 여러 척의 배들이 떠 있었다.

한밤중에 항해하는 일이 그다지 안전하지 않음에도 이는 밤중에 수행해둬야 하는 일이었다.

“공사님, 45구경 5연발 대포 200문이 전부 옮겨졌습니다.”

“그렇군.”

나는 슥 펜을 들어 인수증에 서명했다.

“탄약과 소총은?”

“후속함이 곧 올 겁니다.”

서류상으로는 아편전쟁에 투입되어 소모될 물건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키리시탄들을 무장시키는 데 투입될 물건이다.

‘크리스천들은 단단한 공동체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지하 네트워크로 신앙 공동체 간의 연결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지.’

반군 세력화하기에 최적이다. 막부가 키리시탄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걸 여러 차례 확증을 잡았음에도 가만히 놔두고 있는 것에는 이들이 진짜 작정하고 들고 일어나면 뒷감당이 안 된다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존황양이파와 손을 잡고, 더 나아가 서양식 무기로 무장까지 했다는 걸 알게 되면 막부 역시 이들을 토벌하게 되리라.

“가서 케펠 제독에게 요청해두도록, 지금 여기는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무기가 필요하다고, 전리품으로 수거해놓은 청군 무기가 있다면 그거라도 달라고 해.”

“알겠습니다.”

21세기에도 여실히 증명된 거지만, 종교에 신념을 가진 이들은 물리적으로 말살되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카쿠레키리시탄은, 수백 년간 자신들의 신앙을 숨겨와야 했던 이들은 그들을 탄압해 온 막부를 타도하는 데에 얼마나 열성을 보일 것인가.

‘어느 쪽이 되든 우리에게는 이득이다.’

만약 막부가 갈아엎어지면, 그 다음으로 집권할 이들은 서양 세력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프랑스가 그동안 막부와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나, 지금 이 순간에도 프랑스인들이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뜯어내고 있을 각종 이권은 싹 무효화될 가능성이 크다.

당연히 그걸 막으려면 이미 개혁이란 개혁은 모조리 실패하고 곪아들어가는 막부가 권력을 잃지 않도록 지원해야 한다.

‘근데 이거 그냥 좀 많이 빠른 보신전쟁 아냐?’

우리의 지원이 음성화되었다는 것만 빼면 빼도박도 못할 보신전쟁이었다.

그리고 도쿠가와...... 아무튼 간에 마지막 쇼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순순히 항복해버렸고, 보신전쟁은 신정부 측의 승리로 돌아갔다던가? 아마 그랬을 거다.

‘여기서도 그렇게 된다면 아마 프랑스가 원정군을 보내서라도 조슈와 사쓰마를 토벌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우리 승리다.’

프랑스가 여기서 원정군을 한 번 더 편성한다는 건, 나라 살림을 밑천까지 다 털어먹힌다는 뜻이니까.

‘사실 베트남에서의 패배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치는 것 같기는 한데...... 모르겠네.’

나는 선실 안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미뤄두었던 결정을 내릴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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