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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몰락귀족-58화 (58/60)

< 칭제건원(4)(여기서부터 유료입니다) >

조선, 한양.

한때 남별궁이라 불렸던 나이팅게일 병원은 성업 중이었다.

형식상으로는 ‘하사’ 된 남별궁은 병원으로 개축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물론 양의학을 익힌 서양 출신 의사-주로 선교사들이었다-들로만은 부족했기 때문에 한의사들도 여럿 있었지만, 둘의 진료 공간은 분리되어 있다.

거기에 영국 공사관 수비대의 수비 영역이 남별궁까지 확장되었기에 테러나 침입 등은 꿈도 꾸지 못한다.

진지하게 영국 공사관 다음으로 안전한 지역이 있다면 여기이리라.

‘나중에 무슨 양의파천 그런 것도 나오려나.’

아관파천이 아니라 병원으로 도망간 왕..... 웃기긴 하겠네. 명분은 건강 악화로 인한 입원쯤 되나?

‘줄 한 번 길다.’

물론 나는 예외다. 질서를 지키게 하던 공사관 수비병들도 내가 오니까 즉시 길을 열어주었다.

내가 공사인데 공사관 수비대가 날 막을 리가 있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원장실로 향하자, 피로에 지친 플로렌스가 보였다.

“어머?”

뭔가 서류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던 플로렌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제 왔어요?”

“오늘.”

“회담은요?”

“결렬.”

북경은 이미 짓밟혔다. 러시아군, 그리고 거기에 편승한 조선군이 북경을 제대로 약탈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경이 불바다가 됐어도 아직 청은 항전파와 항복파가 격렬하게 다투고 있었고, 그 와중에 우리의 제법 무리한 요구가 겹쳐지자 항전파가 우세해진 모양이었다.

물론 현재 러시아와 영국 모두 어마어마한 재정적자를 보고는 있지만......

‘애초에 이 시대는 적자 생각하고 전쟁하는 시대는 아니지.’

적자가 난다고? 전쟁에서 이기면 적자난 재정의 두 배를 배상금으로 뜯어내면 되겠네? 이렇게 생각하는 시대다.

그리고 가장 골때리는 부분은.......

“러시아 놈들이 사람을 약탈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시베리아를 개척할 사람이 부족해? 사람을 약탈한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러시아군의 행보다. 극동 총독부의 독단인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지령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거 때문에라도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반란 일어나면 어쩌려고요?”

“낸들 아냐. 어쩌면 유럽에서 사람들을 끌고온 다음에 그 빈 자리를 중국에서 약탈한 농노들로 채우려는 건지도 모르지.”

러시아 놈들의 주먹구구식 시베리아 개척에 대해서는 그래도 좀 알고 있다.

나선 정벌 당시 청은 처음에 자기들이 교전한 게 러시아군이라는 걸 몰랐다, 나중에 러시아라는 걸 알고 러시아에 항의 사절을 보냈고, 러시아는 그제서야 자기들이 청과 충돌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농담이 아니라 그 정도로 주먹구구식으로 행해진 게 시베리아 개척이다. 사람이 부족해서 난리인 극동 총독부가 인간 약탈에 열을 올리는 것도 이해는 가네.

물론 영국과 러시아가 지출하는 전쟁비용은 상당량이 내 뒷주머니에 꽃히고 있기는 하다.

내가 투자하고 브루넬이 운영하는 무기공장이라든가, 페러데이 박사의 조언을 받아 만든-당연하지만 로열티는 보내주고 있다. 본인이 좋아할지는 의문이지만-독가스 공장이라든가.

러시아가 대체 어떻게 뒷수습을 할지는 나도 모르겠고........

‘대체 그 새끼들은 뭘 믿고 지른 걸까.’

만주랑 위구르, 몽골까지면 이해나 가지 화북은 진짜.

이런 건가? 먹지도 못할 거라서 일단 요구는 크게 질렀는데 이놈들이 그대로 받아들여서 자존심상 다 씹어먹기는 해야겠는데 다 먹자니까 먹고 체하다 못해 배때지가 터질 상황?

“아무튼, 병원은 잘 되나 보네.”

“환자가 엄청나게 많아요, 사람 좀 늘려줘요.”

“돈은 맘대로 가져다 써. 내가 말했잖아.”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전문 지식을 익힌 사람이 부족해요. 긴호사, 의사. 뭐든 간에요.”

“....... 그런 건 나한테 말한다고 해도....”

의학교를 빨리빨리 세웠으면 좀 나았을까? 아니, 학교를 세워도 쓸만한 의사를 만드는 데에만 몇 년은 족히 걸리겠지.

“그나마 만만하게 손 벌릴 만한 상대가 프랑스 외방전도회긴 한데, 아무래도 내가 직접 접촉하기는 부담스럽지.”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만 안 하는 중이지 사실상 적국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나저나 외상 환자가 많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공사 현장 부상자들이에요.”

플로렌스는 한숨을 쉬었다.

“대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궁궐을 굉장히 급하게 짓고 있어요, 경희궁의 전각은 죄다 헐려서 극히 일부만 남았고, 그 전각들은 전부 경복궁 건설로 재배치되었어요, 안전대책도 미흡해서 안전사고가 빈발한다고 해요. 그러다가 발생하는 부상자들은 조선 측의 치료 역량이 부족해서 경증이 아닌 이상 거의 다 여기로 오고요.”

“.........”

“이번에 북경을 제대로 약탈했다니까 재원이야 어떻게든 보충했겠지만, 부역에 대해서는 여론이 좋을 리가 없겠네.”

“말할 거나 있나요.”

왜 이런 무리수를 두는 걸까.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조선 정부를 충동질한 적이 없다. 조선 정부가 청에 대한 요구를 할 때 좀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청이 결사항전하게 만들라고 시킨 적은 없다고.

손해 볼 건 없으니 전달시켰지만.

“다른 건 몰라도 도광제가 머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조선의 칭제건원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굴욕을 감수할 순 없어.”

북경을 뺏기는 거? 남송의 예를 따라 절치부심하면서 북벌을 준비하면 된다. 물론 남송은 그러다가 망하기는 했지만.

하지만 천명을 포기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여기서 끝내려고 하는 거지.”

조선과 베트남이 독립국임을 인정한다. 배상금도 바친다. 물론 자기들 딴에는 하사금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하지만 병자년의 난리에 대한 사죄사와 국서, 그리고 고두와 인질에다 삼전도비까지.

차라리 삼전도비를 조선이 바다에 던져버린다면 그나마 나으리라. 알면서도 모른 척 하면서 체면을 차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청이 직접 그걸 다시 깎아서 보내야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사죄사와 황족 인질도 마찬가지, 고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황족 인질은 인질을 여자로 한정하면 화번공주라는 명목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어. 사죄사도 어떻게든 포장이 가능하지, 하지만 고두와 삼전도비, 칭제건원 문제는 청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3대 조항이야.”

“어떻게 할 건데요?”

“영국과 러시아의 조건은 변하지 않겠지만, 조선과 베트남이 독립국임을 인정하는 선에서 끝내고 칭제건원은 그냥 논하지 않으며, 조선에 화번공주를 보내고 사죄사 역시 같이 파견하겠지만 고두는 빼고 삼전도비는 다시 깎되 조선에 두는 정도면 될 거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놈들이 고두를 하도록 받아들이게 할 수는 없을 거 같단 말이지. 물론 조선인들이 가장 원하는 게 청제의 고두였겠지만.....

‘유럽 정세도 좀 찝찝하고.’

물론 전쟁의 기미가 있는 건 아니다. 애초에 그럴 만큼 힘이 남아도는 놈이 별로 없다.

다만 러시아의 정황이 좀 찝찝하다. 대체 저 동네에서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알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

“불가능하오.”

와, 단호하네.

너무 단호해서 단호박인 줄...... 내 머릿속에 이상한 게 침투했다! 이건 동방의 신비한 주술을 써서 서태후가 내 머리를 저주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근데 서태후가 지금 태어났나?

김좌근의 얼굴을 보며 정신을 바로한 나는 입을 열었다.

“다 빼라는 것도 아닙니다. 고두 항목과 칭제건원의 정식 인정, 그리고 청에 삼전도비를 보내겠다는 것만 빼면 됩니다. 삼전도비는 어차피 청 손으로 다시 깎을 테니.....”

“그건 당신이 조선인이 아니라서 그런 거요.”

김좌근은 얼음이 단단히 언 호수의 밑바닥에서 퍼올린 물처럼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공사, 인조대왕께서 무릎을 꿇고 이마에 핏물이 흐르도록 머리를 박던 그 순간, 소현세자와 효종대왕께서 인질로 끌려가신 것, 우리 조선인들 모두에게 결코 지워지지 않을 흉터로 남은 일이오. 여진족 추장 따위를 황제국으로 모시면서도!”

“200년이나 지난 일 아닙니까.”

“200년밖에 지나지 않은 일이지. 우리가 청에게 복수를 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은 줄 아시오? 힘이 없어서 하지 못한 것이오. 우리가 왜 궁궐을 짓는지 아시오? 우리가 왜 당신들에게 비싼 돈을 줘 가면서 무기를 사들이는지 아시오? 다 자강하기 위해서요. 언젠가 복수하기 위해서, 대가 끊어진 대명 대신 우리가 진정한 중화라는 걸, 소중화라는 이름을 더 이상 쓸 필요가 없는 날을 위해서! 그간은 불가능하다 생각했지, 하지만 당신들이 오면서 우리는 깨달았소, 희망이 있다고! 우리의 군대도, 청의 군대도 감히 대적하지 못한 당신들의 무기와 당신들의 기술이라면 정말 북벌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편승했소, 그래서 당신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내주었소, 그런데 우리에게 복수를 하지 말란 거요!”

“.......... 그것뿐입니까.”

내 목소리는 나도 모르게 더욱 차분해졌다.

“그저 명분이지 않습니까. 그건, 당신들은 복수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칭제건원과 소중화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진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당신들 스스로가 실각하지 않기 위해서 아니냐고.

아무리 약화될 대로 약화되었다지만 모든 신하들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왕이, 너희를 견제하고자 하는 모습을 대놓고 보이는 너희들의 군주가 너희들을 숙청하지 못하게 하고, 민초들의 분노를 너희에게 돌리지 못하게 하려는 게 아니냐고.

나는 말 없이 물었다.

소중화가 이 시대까지 충분히 강세인 건 사실이다. 영조 44년에 노론 대신인 김약행은 칭제건원을 하자는 상소를 올렸고, 한원진은 중국 정복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반대로 강건성세를 즈음해 박지원을 필두로 북학파가 나타나는 등 청에 대한 적대의식도 어느 정도 흐려져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단순히 반청 감정만 내세워서, 현실 감각이 절대 부족한 건 아닐 안동 김씨들이 날뛴다는 건 말이 되지 않고, 지금 대청 초강경파들이 죄다 안동 김씨나 그 일파이며, 헌종이 친정을 시작한 뒤부터 이들이 참전과 북벌을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것까지 파악한다면 이는 더 이상 심증의 영역조차 아니다.

북벌은 단지 명분뿐이고, 외부의 적을 만들어 자신들의 권세를 유지하겠다는 얄팍한 수작이다.

“한 마디 조언을 해드리죠.”

나는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정말 청에게 삼배구고두를 받고 싶다면, 당신들이 정말 조공과 사죄사를 받아내고 싶다면 당신들 스스로의 능력으로 청을 굴복시키십시오. 남의 무기와 남의 돈으로 무장하고, 남의 군대를 빌려서 얻어내려 하지 마십시오. 후세에 비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그 중화사상에서도 탈피하십시오, 당신들의 이념인 성리학 자체에서도 탈피하십시오, 청이, 그리고 당신들이 우리 군대 앞에서 무너진 이유는 당신들이 우물 안 개구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우물과 그 주변밖에 없는 줄 아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당신들도 세상이 중국과 그 주변만 있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물 밖을 보지 않는다면, 당신들이 맞을 운명은 청이 맞을 운명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겁니다.”

듣든 말든 상관없다.

김좌근이 뭐라 생각했든, 이건 통보다.

나는 조선에 양해를 구한 게 아니다. 이렇게 할 거니까 알아두라고 통보한 거다.

그리고, 내 조언도 여기서 끝이다.

낙타를 물가까지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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