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제건원(3)
“흠, 어쩐 일로 흠차대신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청의 두 명의 흠차대신 중 하나, 이리포다.
나보다 나이는 30살 넘게 많은 노친네기도 하다, 사실 내가 대표급 인사 중에서는 최연소기는 한데......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단 둘이서 말입니다.”
“...... 뭐 괜찮습니다.”
이 양반이 여기서 날 암살할 것도 아니고 말이다.
잠시 뒤, 주변을 물리자 이리포가 무릎을 꿇었다.
“이게 뭐하시는.......”
“부탁드립니다. 이 나라를 제발 살려 주십시오.”
“.............”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 조항들을 받아들이면 청은 파멸합니다. 반드시 파멸합니다. 이건 돈의 액수 같은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배상금을 올려서 바치라면 바치겠습니다. 세폐도 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원하시는 게 있다면 들어드리겠습니다.”
나는 뭐가 문제가 된 건지 알면서도 되물었다.
“그런데 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저는 영국의 차석 외교관일 뿐입니다. 엄연히 제 상관은 따로 있고, 러시아 측의 요구조건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회담을 이끄시는 분은 당신이 아닙니까. 저희도 장님이 아니고 귀머거리가 아닙니다.”
뭐, 대사님이 내 의견을 참고하는 게 크기는 하지, 하지만 그건 내가 이 동네를 잘 아니까 그런 거다.
즉 준남작님은 런던의 뜻을 대변하고, 나는 현지 상황을 종합해서 그 둘을 적절히 조율해서 협상을 이끄는 거다.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할 수 있는 시스템은 애초에 아니라고.
“그리고 적어도 조선에 대해서는 공사님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시지 않습니까.”
뭐 그건 맞다. 조선은 베트남과 더불어 런던에서 공인한 내 활동 범위이자 주 근거지니까.
“조선의 요구를 철회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저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할 권한은 없습니다만.”
구라다. 간섭할 필요가 없으니까 안 했지 필요성이 생기면 간섭 존나 할 거다.
“하지만 하시려고 하면 하실 수는 있죠. 다른 건 모르지만 최소한 조선과 베트남이 대청의 조공국으로만 남을 수 있게.......”
내 시선을 받은 상대가 흠칫한다.
흠칫하는 흠차대신....... 이런 망상을 하다가는 나까지 미친놈이 될 것 같다. 자제하자.
“그건 어렵습니다.”
애초에 내가 가장 공들인 부분이 그건데 어딜.
“조선과 베트남이 청의 속국으로 남아 있는 것은 본국의 이익에 해가 됩니다.”
베트남이 독립 상태로 남아 있어야 프랑스를 엿먹이기 참 좋지.
조선은 사실 직접적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청의 천명을 붕괴시키기 위해서라도 필요성이 있다.
“그러한 요구를 계속한다면 대청은 결사항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청이 결사항전하면 인민의 파도가 어쩌고 하지만 그 모은 병력은 제대로 상대가 안 된다.
문자 그대로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미개한 토인들의 스테레오타입처럼 포탄 한두 방만 쏴줘도 군기가 무너져서 도망가버린다.
거기에 하나 더하자면 아무리 중국에서 인민의 물량이 많다고 해도 그건 그 인력을 동원할 행정력이 있을 때 이야기인 법이다.
물론 향용들이 끌어모은 병력이 있고, 그들은 러시아군이나 영국군에게도 그나마 위협적이었지만 이제 러시아와 영국은 그들을 학살할 신무기를 손에 넣었다.
독가스를.
조선군이 산해관에서 가스를 사용한 걸 본 러시아군은 당장 조선이 그 무기를 어디서 구했나를 알아보았고, 영국에서 사 왔다는 걸 알게 된 러시아는 즉시 대량으로 주문을 넣었다.
러시아가 신무기를 주문했다는 걸 알자 영국군도 부랴부랴 주문을 넣었다.
그 시점 이후로 연합군은 백전불패의 확신을 얻었다. 독가스의 비인도성? 어쩌라고?
어차피 뭔 짓을 해도 중국인들은 독가스를 방어할 능력이 없다. 반면 러시아와 영국은 자국군에 방독면을 보급하는 중이다.
독가스에 대항하겠다고 어디서 분포를 가져와서 뿌려대기는 하던데, 그거 가지고 독가스가 막아질 리가 없다.
“청은 존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 ‘일개 국가로’ 존속할 수 있다.
중화사상의 정점에 위치한 그 사상을 버리고, 왕관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다른 이들과 같은 전에 서라.
1대 1로, 동등한 위치라는 것에 익숙해져라.
서방에서는 이미 그러고 있지 않은가.
물론 너희들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21세기에도 너희 종족은 그걸 포기하지 못했지, 너희가 세상에서 가장 잘난 종족이라고 믿었지, 그렇다면 멸망해라. 그러면 되지 않느냐? 너희가 우리와 같이 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중화사상에 기반해서 오만하게 군다면, 우리도 너희를 쓸어버릴 수밖에.
***
반쯤 정신이 나간 흠차대신을 놔두고 나온 직후, 나는 대사에게 붙들렸다.
“준남작님?”
“기다리고 있었네.”
“아니, 또 무슨 일입니까.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
내가 처리하는 일이 어디 한두 개냐고.
“본국에서의 비밀 명령이 떨어졌네.”
“뭡니까 또?”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대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런던에서는 저번 베트남 공작에 대해서 큰 만족을 표했네.”
“돈 너무 많이 썼다고 한 소리 듣지 않을까 했습니다만.”
“그래서 한 번 더 하라더군.”
“베트남입니까?”
“일본.”
“거긴 막 개항한 곳 아닙니까?”
“그래, 그리고 프랑스에게 우선권이 있는 곳이지.”
“......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일본에게 함부로 퍼줬다가는 배신당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의 정치체제 상의 문제입니다. 일본은 말만 한 나라지, 수십 개의 나라가 하나로 뭉친 중세적인 봉건 체제입니다.”
나는 일본의 번과 막부 체제를 설명하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상관없네, 현재 정부가 요구한 건 일본에서도 프랑스가 별 생각 없이 걷어찬 돌부리에 발가락이 부러지게 해 달란 거야. 베트남에서처럼 반군을 지원해 일본의 정부 체제를 갈아엎든, 아니면 현재 일본 정부가 프랑스의 원정군을 막아낼 방법을 만들어주든 간에 그건 자네의 자유네.”
거 참 이 양반들 끈질기네. 이 정도면 프랑스도 한동안 대외진출은 꿈도 못 꿀 텐데?
솔직히 영국과 러시아가 이번에 중국에 심각하게 꼬라박아서 골골대게 된다고 해도 프랑스가 이 둘의 뒤통수를 치진 못할 거다. 얘들도 비슷한 수준으로 꼬라박았으니까.
“일본이 개항을 철회하고 프랑스에게 적대하게 하려면 역시........”
존황양이파를 밀어주는 게 나으려나.
“일단 일본의 정권을 뒤엎는 것만 생각하면 가장 쉬운 방법이 있긴 합니다.”
“역시! 좋은 방법이 있을 줄 알았네, 그래서 그게 뭔가?”
“카쿠레키리시탄입니다.”
“..... 그게 뭔가?”
“현재 일본에서는 가톨릭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공동체가 소규모로나마 남아 있죠.”
나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일본은 영국의 의원 내각제와 일부 유사한 면이 있는 국가체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덴노는 종교적, 민족적 구심점일 뿐 어떤 실권도 없으나, 세습직 총리에 가까운 쇼군이 실질적인 일본의 군주로써 실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개항을 결정한 것 역시 막부죠. 따라서 귀족층 가운데 분명히 이런 논리를 들고나오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쇼군이 제멋대로 개항을 결정한 것은 반역이다. 이런 논리요. 아무튼 형식상으로는 덴노의 신하니까 말입니다.”
“왕당파를 밀어주자는 얘기군.”
“그들의 세력이 강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들을 지원할 다른 세력인 가톨릭교도들과 베트남에서처럼 타협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의 주요 인사들 중 가톨릭교도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종교보다는 조국을 위해 싸웠습니다.”
수뇌부는 존황양이파, 그리고 실질적인 주력은 일본 전역에 퍼져있고 결속력이 강한 집단인 카구레키리시탄을 활용한다.
“막부가 순순히 개항에 동의한 것 역시 각 번의 봉기를 막을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조선과는 정반대죠.”
막부는 덴노와 다르다.
아무리 덴노가 꼭두각시라고 해도 덴노의 핏줄을 잇지 않은 이들이 덴노의 자리를 탈취하려 시도한 적은 없다.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왕세자, ~대군, ~군을 옹립하자 이런 류의 반역은 일어나도 이왕가를 없애버리자는 역성혁명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막부는 가장 강한 사무라이, 가장 강한 다이묘가 덴노의 인정만 받으면 된다. 도쿠가와 막부 이전에도 막부가 어디 한둘이었는가.
물론 에도 막부가 일본 역사상 가장 오랜 평화기를 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아성이 일본 내부에서 넘을 수 없느냐? 그랬으면 일본 제국이 성립할 일도 없었을 거다.
물론 나도 안다. 저들이 원 역사에서 일본 제국을 세우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놈들이라는 거.
근데 여기서는 그게 되겠냐?
‘당장 조선에 세워진 공장도 한둘이 아니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조선에서 자체공급할 군수물자 공장이 세워지고 있는 데다 병력이 부족한 러시아군이 전쟁이 끝나면 돌려보낸다는 조건으로 조선에서 병력을 모집할 정도다. 그 러시아군 복무를 경험한 병력은 당연히 근대 조선군의 모태가 될 터. 당장 조선에 내가 세워놓은 독가스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건만 뿌려도 일본군은 속수무책일 거다. 영국 본토에 세우기에는 좀 눈치가 보여서 말이지.....
게다가 청나라면 모를까 러시아를 이길 정도로 우리가 일본을 키워줄 리 만무하다. 문자 그대로 프랑스의 원정군을 본토에서 간신히 격퇴할 정도, 딱 그게 우리가 용납할 최대한이다. 당장 베트남도 군함은 안 팔아주잖아 그래서.
절대 해외로 원정나갈 정도의 군사력을 가지게 놔둘 수는 없다, 의회도 그런 건 용납 안 한다, 그들은 프랑스를 견제하고 싶지 새로운 경쟁자를 원하는 게 아니니까. 프랑스에 맞설 육군이면 모를까 해군은 잘 쳐줘야 해안경비대 정도만 허용할 거다.
즉, 토막파를 배후조종한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설령 엇나간다고 해도 그때는 그냥 지원을 끊어서 목을 죄어버리면 그만이고.
“그런데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말하게.”
“설마 제가 일본 공사도 겸임해야 합니까?”
“음..... 그건 아닐 것 같네, 다만 자네가 신경을 쓰기는 해야겠지.”
“서열은 어떻게 됩니까?”
“동아시아 국가들에 파견된 상설 공사관의 공사들 가운데에서는 자네가 최고 서열이겠지, 아무래도 자네가 대부분의 사무를 실질적으로 처리해야 할 테니.”
“일단 각 공사 직급 간의 서열 좀 확실하게 정리해달라고 본국에 요청해주십시오, 그리고 이놈의 대리공사 직급은 좀 떼게 해 주시고요.”
겸임공사라는 게 전례가 없는 건 아니라지만, 21세기에도 별로 안 중요한 아프리카 같은 동네 영사관은 영사관 유지하는 것도 돈 드는지라 굳이 영사관 따로 안 둔 이웃국가 영사를 겸임하거나 하는 경우도 많다지만, 이 넓은 동아시아에서 그게 할 짓이냐고요. 내가 배 타고 돌아다닌 거리 다 재면 지구 몇 바퀴는 돌았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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