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제건원(1)
공사에게 뒤에서 욕을 잔뜩 먹은 김좌근과 조선 조정이었지만, 그들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었다.
“주상 전하께서 최근 풍양 조씨와 접촉이 잦아지셨다고 하오.”
“우리를 쳐내려는 거군!”
“영길리는 신뢰할 수 없는 이들이오, 우리가 실각해도 굳이 도우려 할지가 의문이오, 그들이 군대를 보낸 것도 청과 싸우기 위해 온 것이니까.”
영길리의 군대는 강하다.
그러나 그들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병력이라면 없는 것과 차이가 무엇이겠는가?
“방법은 하나요, 우릴 쳐낼 명분을 박탈하는 거지.”
“그런 방법이 있겠소?”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는 가장 큰 수단은 역시 우리가 영길리와 붙어먹었다는 이야기겠지, 그렇다면 방법이 있소.”
“뭐요?”
“칭제건원을 우리가 밀어붙이는 거요. 어차피 청은 망할 운명이니, 우리는 속국도, 조공국도 아니며, 청은 망하였으니 우리가 천명을 가지겠다고 선언하면 다른 주장은 전부 깔아뭉갤 수 있소, 영길리와 거래한 것도 인조대왕의 치욕을 씻기 위해 이이제이를 벌인 것이라고 주장하면 그만이고.”
“문제는 돈이오.”
한 사람이 문제를 제기했다.
“칭제건원을 하고 경복궁을 복원하려면 돈이 많이 들 텐데, 그 비용을 어디서 마련한단 말이오? 게다가 나무와 돌들을 대량으로 구하려면 민력이 많이 소진될 것이고 민심도 흉흉해질 것이오.”
가뜩이나 최근 면포 가격이 폭락했다. 원인은 뻔했다.
조선 면포와 상대도 안 되는 질 좋은 면포들이 개항장을 통해서 엄청나게 싼 가격으로 풀려버린 것이다.
화폐 가치가 폭락해 초인플레이션이 닥쳤고, 면포를 생산하던 자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조약대로라면 영국산 면포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명을 내려서 국산 면포만 쓰라고 하기에는 당장 양반들부터가 영국 면포를 구해다 쓰기 시작한 뒤였다.
싸고 좋으니까. 소비자들이 가성비 좋은 제품을 찾는 것이 뭐가 문제겠는가.
게다가 영국인들이 그런 명령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생각하면 절대 내릴 수 없는 명령이었다. 영국군이 한양을 불태우기라도 했다가는 누가 뒷수습을 할 건가?
어마어마한 양의 최상급 면포들이 조선 기준으로 그야말로 헐값에 팔린 결과 농가의 수입이 폭락해 민심이 요동치는 판국이니 안동 김씨라고 해도 문제의식이 없을 리가 없었지만, 그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을 뿐이다.
“전쟁을 합시다.”
“뭐라 하시었소?”
“저 영길리인들이 말하기를, 서역의 관습에 전쟁을 일으켰을 때 승자는 패자에게 영토와 세폐를 받는 등의 일이 드물지 않다 하니, 이는 구라파의 오늘날이 춘추전국시대와 같다는 것이오. 한때 대진국(로마)가 성하였을 때에는 그 모든 나라가 대진국 안에 하나였으나, 대진국이 망한 후에야 제후들이 할거하여 다툰 지가 수백 년, 불과 수십 년 전에도 불란서의 나팔륜이라는 걸출한 자가 나와 구라파를 통합해 천명을 쥐기 직전까지 갔으나 영길리와의 결전에서 패하여 절해고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죽고 말았다니 이는 비수대전과 같다 하겠소.”
“그러면, 우리도 세폐를 받자는 말이오?”
“이미 청은 영길리와 노서아 모두와 전쟁을 하고 있다 하지 않소? 이미 청은 진 거나 다름없소, 그 와중에 우리에게 군대를 내어 노서아와 싸우라 명하였으나 우리가 따를 수 없다 하니 도리어 우리 북방을 공격하였다 실패하였으니 이는 이미 천자로써의 천명을 상실하지 않았다 할 수 없소. 소중화인 우리 조선이 칭제건원하고 전쟁을 벌이면 세폐를 바치지 않을 방도가 있겠소?”
청나라를 뜯어내서 경복궁 중건 비용을 마련하자는 거였다.
더 정확히는.....
“영길리인들에게 돈을 우선 빌려 경복궁을 중건하고 칭제건원을 한 뒤, 청에게 세폐를 받아내어 갚는 것입니다.”
따서 갚자.
어차피 청은 식물인간이니 막타만 치고 배상금을 뜯어내자.
“최소한 노서아군에 합류해서 북경만 약탈해도 남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자면 전제조건이 있소, 영길리인이든 노서아인이든 간에 우리에게 자리를 마련해줘야 하지 않소?”
“구워삶으면 됩니다. 그들이 원하는 걸 다 들어주면 저들도 사람인데 후안무치하게 굴겠습니까? 뭔가 원하는 게 있는지를 물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청이 무너지면 우리도 청에게서 세폐를 받고 싶다 말하면 됩니다.”
“그거 묘안이구려!”
그렇게 안동 김씨의 회의에서 칭제건원과 대청 전쟁의 확전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
“라일라.”
“네, 주인님.”
“왜 니 앞으로 뭐가 이렇게 많이 들어오냐?”
“......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겠어요.”
아니, 난 알 거 같긴 한데.
이거..... 뇌물이지? 뇌물 맞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느 만화에서 조선 시대에 첩이 뇌물을 받는 창구로 쓰였다는 얘기가 있던데.... 라일라를 내 첩으로 생각하면 나한테 뇌물을 주려면 지금 상식으로는 라일라에게 주는 게 맞겠네, 에휴.
“누가 준 거야?”
“하인들을 동원해서 날라온 거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 아니, 알 것 같네.”
안동 김씨 그 인간들이겠지.
‘진짜 고려해야 할 거 많네.’
전권대사도 나더러 청과의 협상을 앞두고 논의 좀 해야겠으니 시간 좀 내 달라고 그러지를 않나. 이틀에 한 번씩은 김좌근이 가마 타고 찾아오고, 러시아 측에서도 나랑 회의 좀 하자고 불러낸다. 특명전권대사가 있잖아! 그 양반이랑 논의해!
“젠장, 오늘은 일찍 좀 자야겠다. 내일 러시아 측이랑 만나기로 했으니까.”
“네, 주무세요.”
한숨을 쉬며 방 안으로 들어가 온돌방에 몸을 누이자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졸린다. 졸리다, 잔.......
“공사님, 계십니까.”
죽여버리고 싶다 진짜. 나 내일 진짜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고!
***
이번엔 김좌근이 아니었다. 대신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안동 김씨이긴 한 것 같다.
“참전 말입니까?”
“참전이라고 하기보다는.... 저희도 원정군을 편성할 건데, 노서아 측의 협조가 필요하지 않겠나 싶어서 말입니다.”
“전 대영제국의 외교관입니다만.”
번짓수 잘못 찾아왔수다.
“그러나 노서아와 접촉하실 수 있으시죠. 조정에서는 영길리가 조선과 노서아 사이에 거간꾼이 되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기들을 더 팔아주시는 것도 필요하고 말입니다.”
“소총 정도는 판매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번에 베트남에 지급된 소총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양산되었다. 뭐가 업그레이드됐단 건진 모르겠지만 이걸 조선에 판매해주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 팔고 있는 물건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외국에서 물건을 사서 또 다른 외국에 판다. 전혀 어려울 거 없는, 상인들이 당연히 수천 년간 해온 일이다.
근데 대포는 재고가 있나 모르겠네. 베트남에 이번에 노획한 프랑스 야포라도 팔라고 제안해야... 아니 걔들도 대포 모자라서 난리니까 안 되겠구나, 젠장. 미국에는 재고가 있을까.
조선과 수교한 나라가 영국 하나뿐인 게 이럴 때는 골치다. 업무가 과중되니까.
그때, 한 가지가 뇌리를 스쳤다.
“조선이 충분한 대가를 제공한다면 말입니다.”
나는 천천히 탁자를 두드렸다.
“유럽의 그 어떤 국가도 아직 채용하지 않은 최신 무기를 제공해드리겠습니다. 아니, 공장까지 지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만인지적의 무기, 만 배의 대군이 몰려와도 능히 승리할 수 있는 신무기죠.”
***
러시아는 흔쾌히 동의했다. 오히려 자기들 입장에서 시베리아를 건너야 하는 병력 충원이 너무 골치아픈 문제인지라 코사크 기병과는 별개로 조선에서 보병을 충원하고 싶었다면서 잘됐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지휘권을 누가 갖느냐를 가지고 다툼이 벌어진 끝에 파견되는 조선군은 러시아군과 별개로 하되, 러시아군의 조언을 성실히 경청한다는 조건을 건 뒤에야 타협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신무기를 조선군에 팔아먹었다.
소총과 볼리 건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치명적인 무기를.
심지어 조선이 그 무기를 양산할 능력을 갖춰주겠다고까지 제안했고, 이 부분은 조선도 아직 보류 중이다.
‘이게 옳은 걸까.’
이제 조만간 조선군이 무기를 사용하면, 러시아군도 그걸 볼 거고, 영국군도 부랴부랴 채용하겠지.
그러면 세상은 얼마나 더 잔인해질까.
모를 일이었다.
***
산해관.
곳곳이 무너진 산해관에서 청군은 아직도 저항하고 있었다.
많은 수가 도망쳤지만, 녹영의 지휘관들은 도망자들을 베어 가면서 어떻게든 군율을 유지했고 북경에서 온 지원군까지 받아 어떻게든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시베리아를 건너느라 러시아가 보유한 공성포도 몇 문 없었던 데다 공격 자체도 효율적이지 못했기에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인 모양이었다.
“이..... 이 동이 놈들이!”
조선군의 깃발이 보였을 때는 조선이 그들을 돕기 위해 출병한 것인가 하는 기대를 품은 것도 사실이었다.
무력으로라도 조선이 참전하게 하라는 황명을 받은 팔기가 조선을 공격해들어갔다가 영국군과 조선군, 의병들에 의해 몰살당했다는 사실은 산해관까지 알려지지도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니 녹영군이 일말의 기대라도 품었다고 해도 탓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그 기대는 조선군이 러시아의 군영에 합류하는 것을 보았을 때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그때, 말 한 필이 성문 앞으로 달려왔다.
조선군의 복식을 한 전령은 크게 고함을 쳤다.
“너희 만적과 만적에 빌붙어서 그 엉덩이나 핥는 놈들아! 너희들의 천명은 사라졌다! 순순히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항복하면 그 어께 위의 머리나와 네놈들의 하초나마 보존하게 해 주마! 네놈들 두목에게 하루빨리 우리 폐하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면 북경이 불타지는 않게 해 주겠다 전해라!”
“저..... 저저저!”
너무 화가 난 녹영군 장수 하나가 활을 당겼다.
“뚫린 입이라고 어디서 망발이냐!”
핑 하는 소리가 나고, 화살이 날아들어 바닥에 꽃혔다.
전령은 곧장 큰 소리로 비웃었다.
“네놈들의 활 솜씨도 어지간하구나!”
곧장 활을 꺼낸 전령은 화살 한 발을 날리고 곧장 뒤돌아 달렸다. 날아든 화살은 급히 몸을 숙인 녹영군 장교의 투구 장식을 맞췄다.
숙이지 않았다면 최소 중상이었으리라.
잠시 뒤, 공성을 개시하려는지 적들이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앙! 콰앙! 콰앙!
포 세 문에서 일제히 불을 뿜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포 세 문 가지고는 결정적인 피해를 줄 수 없다.
게다가 그들을 괴롭힌 러시아군의 작렬탄과는 다르게, 이들은 착탄했을 때 폭발을 일으키지 않았다.
조선군이 구닥다리 포를 가져왔다는 생각에 비웃어 주려던 녹영군의 지휘관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생전 처음 보는, 요사한 황록색의 연기가 바닥에 떨어진 포탄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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