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4)
백두산, 조선.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
시대에 안 맞는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브루넬이 여러 자료를 통합해 연구개발하고, 초도생산품 24정을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만들어 전달해 조선군에 넘겨진 50구경 121연발 대포였다.
진짜 대포처럼 포가에 얹어서 운용해야 하는 등 온갖 제약이 많고 재장전도 힘들었지만, 그 몫은 확실하게 했다.
121발의 초기형 철제 탄피가 적용된 50구경 탄환을 얻어맞은 팔기군들은 시체가 되어 나동그라져 있었다.
한 번 발사하면 중간에 멈출 수 없고, 무거우며, 장전이 어렵고, 탄약값이든 부품값이든 비싼 데다 훈련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기관총과 유사한 신무기라는 점 하나는 압도적이었다.
“압도적이군요.”
“운용인원의 역량이 받쳐주지 못할 뿐. 상대가 더 처참해서 망정이지, 내가 저들을 지휘했으면 역공을 가해 도리어 이 지점을 함락시켰을 거야.”
조선군의 역량을 악평한 영국군 소령은 총을 등에 걸머쥐었다.
광둥성에서 비가 오는 바람에 민병대 따위에 몰살당할 뻔한 사건 이후 전선에 배치되는 병사들의 무기는 퍼거션 캡으로 바뀌었고, 그에 맞춘 훈련도 행해졌다.
지금은 후방부대를 제외하고는 전부 퍼거션 캡을 쓴다. 적어도 극동에 있는 부대는 그렇다.
“이번에 베트남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크게 이겼다죠?”
“보나마나 운 좋아서 이겼겠지, 우리가 중국에서 당할 뻔한 것처럼 비가 오는데 플린트락 머스킷밖에 없었다든지.”
“뭐 그래도 달팽이 먹는 개구리 놈들, 코가 납작해지지 않았겠습니까?”
“난 그놈들이 차라리 걱정되는군, 그놈들 자존심이 보통 아니잖아, 언제든 보복할 거다.”
***
“청과의 관계를 끊으면 확실히 조야가 기뻐하긴 할 겁니다.”
김좌근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귀국의 군대가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한다면 굴욕으로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무기 지원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 적 있습니까.”
“.........”
“정 우리가 양이라서 껄끄럽다면 방법이 있습니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치료해 주는 사람들에게는 감사를 느낍니다. 아무리 그들이 이질적인 존재라고 해도 말이죠.”
무슨 말을 하고 싶냐는 듯 나를 바라보는 김좌근에게 나는 한 가지를 제시했다.
“그동안 청의 사신을 접대했던 남별궁을 빌려주십시오. 그곳에서 우리 최고의 의사들이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치료할 겁니다. 치료비가 있으면 있는 대로 내게 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치료해 줄 겁니다. 돈 벌자고 하는 게 아니니까요. 당신들은 경호만 제공해주면 됩니다.”
“..........”
“삼전도의 굴욕을 안긴 청의 사신들이 거들먹대던 곳에서, 우리는 가장 가난한 이들을 치료해줄 겁니다. 그거면 우리가 청과 다르다는 걸 알리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니, 기왕이면 삼전도비도 뽑아와서 그곳 섬돌로 쓰는 건 어떻습니까.”
“그런 용도라면 모화관이 낫지 않겠습니까?”
“모화관은 너무 좁습니다. 개인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영은문과 같이 그냥 철거해버리시죠, 폭파에 도움이 필요하다면 공병대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겠습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그야 물론이죠, 본국은 귀국의 내정에 간섭할 생각은 없습니다. 당연하지만 임대료도 지불할 거고요.”
아무리 그래도 왕실 별궁을 달라는 요구는 쉽게 받을 요구는 아니다.
상대가 한성 내에 수천 정예군을 두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일단 주상 전하께 전달하겠습니다.”
“주상 전하라, 그냥 아예 칭제건원하지 그러십니까? 청의 하늘은 이미 끝나지 않았습니까.”
농담 삼아 한 마디 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니들 문중에서 다 정할 거 뻔히 알거든?’
수렴청정은 왕이 15세가 된 작년에 끝났지만, 안동 김씨의 세도는 끝나지 않았다.
도리어 우리와 유착하면서 그 세도는 커지면 커졌지 약해지지는 않았다. 김좌근만 해도 나와의 직통 라인이 되면서 재산을 2배가 뭐냐, 3배는 불렸다고 안다.
근데 이 꼬맹이는 시호를 헌종으로 받을까?
‘솔직히 저 꼬맹이도 얼마 안 남았지.’
20대 초반에 죽었다는 건 안다. 효명세자랑 헌종 둘 다 부자가 둘 다 비슷한 나이에 각혈하고 쓰러져서 요절했다던데.
물론 그걸 굳이 말하고 다닐 생각은 없다. 헌종이 굉장히 아까운 인물이라면 모를까.... 꼭 살려내야 할 메리트도 없고, 내가 피 토하고 죽는 걸 치료할 묘수도 없다. 피를 토하는 원인이 어디 한둘이냐고. 결핵일 수도 있고 위궤양일 수도 있고. 위암일 수도 있고.
질병의 원인도 모르고 유효한 치료법도 모른다. 그걸 알면 내가 의사지...... 응?
생각해 보니 내 아내가 나이팅게일이라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나이팅게일이라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간호사랑 의사가 엄연히 다른데 아무리 나이팅게일이 천재라고 해도 이걸 어떻게 수습해.
그리고 얘들이 딱히 우리한테 자기네 왕 살려 달라고 손 벌릴 것 같지도 않다.
결정적으로 어차피 조선 왕 따위 누가 되든 간에 그 왕 하나 바보 만드는 건 별거 아니니까.
‘몰라, 자기가 정 우리한테 치료받고 싶으면 남별궁으로 알아서 오겠지. 진자 오면 그 문제는 그때 생각하고.....’
괜히 너무 멀리 보면 눈앞의 돌부리를 못 보는 법이다.
아무튼, 남별궁을 받아내면 플로렌스에게 줄 거다.
이름은 나이팅게일 병원, 좋네, 운영비야 내가 대주면 되고.
저 병원이 21세기까지 가면 세브란스병원쯤은 가볍게 넘는 위상을 가지지 않겠는가.
“사람이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지, 돈 없어서 병원 못 가는 사람이 세상에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겠어?”
이건 진심이다. 사람이 자기의 노력과 재능에 따라 대우를 받는 건 옳은 일이다.
그런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본인의 노력에 보답도 못 받고 죽음의 길을 가야 한다면 이건 너무 억울한 일 아니냐고.
“완벽히 동의해요.”
플로렌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병원으로 시작이지만, 나중에 적당한 자리 생기면 대학도 세울 거야. 언제까지나 영국 의사로 여길 채울 순 없잖아. 서로 연계해서 의대를 세워야지.”
나는 잠시 상상을 했다. 나이팅게일 병원과 연계된 용담(=젠티안)대학교는 의대니만큼 인간 육체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할 거고, 거기에 이런저런 미래지식들을 소매넣기 해 주고 증명은 니들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해 보면 어떨까.
‘어떻게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잘만 하면 우생학을 시작 단계에서 틀어막을 수도 있겠지.’
확실한 건, 아직 종의 기원이 발표되지는 않았다는 거다. 다윈이 이 시대 사람이었던 거 같은데, 아니, 내가 동방에 있는 동안 발표되었으려나? 이건 돌아가서 확인해 볼 일이다.
그러면 아직 기회가 있다는 거다. 우생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그런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없앨 수도 있을 거다. 다윈의 이론이 악용된 거지 정작 다윈 본인도 우생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아주 길길이 날뛸 정도로 반대했던 걸로 아는데 그럼 찰스 다윈도 협조해줄지도?
우리가 영원히 여길 봐줄 순 없다. 당장 나만 해도 거주는 조선에서 하지만 베트남 출장이나 중국 출장이 잦고, 플로렌스도 몸이 한 개니까. 게다가 본국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귀국해야 할 수도 있고. 미래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면 뭔가 믿을 만한 대리인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음, 현지인 중에 내가 생각하는 중인 사람이 있어.”
“누군가요?”
“있어, 기회만 준다면 사리사욕 없이 정말 공익을 위해 헌신할 사람들.”
선조는 청백리며 병자호란 때 최전선에서 싸우자 전사했고, 대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정신을 잊지 않은 집안, 후손은 거부가 되었다가 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 뒤에는 남은 가산을 전부 정리해 대학을 세운 가문.
어릴 적 책에서 읽었고, 나중에도 그 책이 하나도 과장되지 않았다는 걸 보고 놀랐었지.
그들이라면 믿고 맡겨도 될 거다. 역사가 이미 검증한 이들이니까.
다음 날, 부름을 받고 경희궁으로 찾아간 나는 전혀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다.
“경복궁을 복원하겠다고요?”
내가 뭔 표정을 짓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황당한 표정이겠지.
야, 니들 전쟁 아직 안 끝났어.
“물론 지금 복원하자는 건 아니오.”
뭔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피로에 쩔어 있는 김좌근은 한숨을 쉬었다.
“칭제건원에 대한 이야기가 비변사에서 공식적으로 올라왔소.”
“.........”
“청의 패배가 확정적이니, 우리 조선 역시 우리 조선만의 하늘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찬동하는 중신들이 제법 많았소.”
“.............”
니들이 지금 그런 위신딸 칠 때냐는 말이 목구멍 밖까지 기어나오는 걸 간신히 참아낼 수 있었다. 정말 간신히.
아니, 근데 설마 진짜 내 말 듣고 진지하게 논의해 본 거야?
“그런데 법궁인 경복궁이 죄다 불탔으니, 경복궁을 복원하고 환구단을 설치해 황궁의 격에 맞게 복원하자는 주장이 나왔소. 황제국의 법궁이 폐허로 남아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되잖소.”
“..... 진지하게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그럴 돈은 있습니까?”
아무리 내가 열강 외교관이라지만 니들 재정상태 진지하게 걱정되거든? 가뜩이나 돈 없는 게 조선 조정인데..... 원 역사에서 경복궁 복원하려다가 뭔 지랄이 났더라?
“그 부분은 걱정할 것 없소.”
진짜? 구라 아니고 진짜? 너 나름 유능하잖아, 사실 세도정치하는 안동 김씨의 수장이라는 게 혈통만 가지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어야 가능한 거 아니야? 설마 진짜 그냥 세금 좀 더 걷으면 그만이라고 1차원적으로 생각하고 그런 거 아니지? 뭔가 자금 조달 방법이 있는 거지?
“다만 기술적인 부분과, 건축 자재의 수급 면에서 문제가 좀 있소, 대가는 지불할 테니 귀측에서 그걸 좀 협조해주시오.”
아니, 야, 잠깐만.
니들 설마 콘크리트나 시멘트나 그런 거 써서 경복궁 복원하겠다는 거 아니지? 아닌 거 맞지?
“... 건축가들을 연결해드리는 건 어렵지는 않은 일입니다, 원하신다면 인도차이나에서 최고급 목재들도 비싸지 않은 가격에 구해올 수 있을 거고요. 다만 제 의견에는 굳이 저희의 건축가들을 고용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조선에는 조선 고유의 방식으로 조선인의 손을 통해 건물을 짓는 것이 의미가 더 크지 않겠습니까?”
내가 진짜 돌아버리겠다.
“그건 비변사에서 결정할 일이오.”
아무래도 아직 결정이 안 됐나 본데?
‘그나저나 이 정도로 그 짧은 시간 동안 인식이 변화했다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군.’
개항과 중국과의 전쟁, 그리고 청의 일방적인 패배라는 충격 속에서 조선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좋은 방향일지 나쁜 방향일지는 미래를 보지 않는 이상은 알 길이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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