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몰락귀족-53화 (53/60)

제국주의(3)

프랑스, 파리.

-쾅! 쾅! 쾅! 콰직!

뭔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이 무능한 것들! 네놈들이 이 나라를 말아먹었어! 어떻게 인도차이나의 토인들에게 대 프랑스 제국의 병사들이 패배할 수 있단 말인가! 다 네놈들이 무능해서야! 네놈들이!”

일본이 개항과 조약 체결에 동의했다는 소식이 들어온 직후 도착한 다른 소식은 기쁜 분위기에 문자 그대로 얼음물을 끼얹었다.

대패, 완패, 참패.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까.

저 코딱지만한 나라에게 대 프랑스 제국의 원정군이 참패했다.

물론 방심했다. 방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중국처럼 칼 든 놈들이 끼에에엑거리면서 달려들다가 총 몇 번 쏴주면 다 도망갈 걸로 생각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전멸이라니.

절반 넘게 죽고, 나머지는 거의 생포당하고, 생존자 한 줌만이 간신히 해안까지 도망쳤다.

문제는 해안에는 프랑스 해군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숨겨놨던 배를 끌고나온 베트남군은 몰이사냥하듯이 프랑스인들을 사냥했다.

사냥꾼이 사냥감이 되었다.

그러다가 프랑스 해군이 황급히 달려오자 베트남의 소형함들은 미리 알고 잽싸게 숨어버렸고, 그때까지 잡히지 않은 운 좋은 병사들 몇이 프랑스 함대에 합류해 원정군의 전멸 소식을 알렸다.

더욱 치욕적인 것은 얼마 뒤 런던을 경유해 도착한 소식이었다.

“저 야만인들이....... 몸값을 요구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일반병은 1인당 100달러, 부사관과 장교는 당연히 그 몇 배를 불렀고, 귀족 출신들은 아예 천문학적인 금액을 불렀다.

대승을 거둔 김에 몸값 장사 한번 제대로 해보겠다는 의도가 뻔했다.

거기에 저놈들이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을 구분 못 한 탓에 하필 영국의 중국원정군 사령부를 경유해 전달되는 바람에 런던에 소식이 들어갔고, 참패 소식과 몸값 요구 소식은 불과 이틀 전 영국의 모든 신문에 실렸다.

영국 신문에 실린 내용이 프랑스의 신문에 실리기까지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고, 파리에서는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폭동이 일어나기 일보직전이다.

아니, 당장 오늘 폭동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몸값은 어쩌시겠습니까?”

루이필리프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맘만 같으면 ‘그 개새끼들이 뭔 짓을 당하든 간에 우리 알 바 아니다!’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저 야만인들은 영악하게도 포로의 명단을 작성해 런던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 명단은 영국 신문에 도배되었고, 전 유럽이 누가 포로로 잡혔는지 알고 있었다.

그 중에서는 명문 귀족 출신도 여럿 있었다.

그리고 귀족들은 루이필리프의 핵심 지지기반이었다.

지지자를 저버리고 살아남을 수 있는 권력자는 없었다.

“안 낼 수는 없겠지... 일단........”

그러나, 재정총감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재원이 부족.......”

“천 것....... 부사관과 사병들은 내버려두고 장교들부터.......”

“저들은 모든 포로들을 한 번에 교환하는 것 외의 개별협상은 없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런 건 그들의 관습이 아니라고......”

물론 개소리다. 애초에 그딴 관습은 없다.

개화와 근대화를 하려면 시작부터 포로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 수는 없는데 그냥 풀어줄 수는 없고, 놔두면 그냥 밥벌레니, 돈이 없는 프랑스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장교들만 빼가고 어차피 죽든 말든 하류층 인생인지라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사병들은 버려두고 가는 걸 막기 위한 조치다. 최소한 쌀값과 물값은 받아내야 할 거 아닌가.

물론 그렇게 치고도 비싸긴 하지만.

그게 어느 콧수염 기른 영국 신사가 취미라는 단짜인을 전문 악사 못지않게 잘 연주하는 젊은 처녀의 귀에 대고 속삭여 준 결과라는 걸 루이필리프가 알 턱이 없었지만, 아무튼 간에 루이필리프의 피가 역류하고 프랑스 정부의 재정에 붉은 줄이 죽죽 그어지고도 남을 판이었다.

애국심을 자극해서 기부금이라도 받고 싶어도 당장 루이필리프 정권 자체의 지지도가 맨틀을 뚫고 내핵으로 돌진하고 있는 판국인지라 어떻게 답이 안 나온다.

“다음 원정군은 언제까지 조직할 수 있는가?”

“불가능합니다. 폐하.”

재정총감은 눈물을 좍좍 뽑을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돈이 없습니다!”

돈이 없다.

가뜩이나 파산 직전인 프랑스의 재정에 몸값도 내야 한다. 몸값 자체는 큰돈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적은 부담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금액.

그러나 원정군은 차원이 다르다.

어떻게든 베트남과 일본에서 원정한 비용을 벌충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 원정군을 보낸 건데, 실패했다. 참패했다.

심지어 다음에는 성공할 거란 보장도 없다.

“생존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저들은 통일된 제복에 흠잡을 데 없는 전열보병 전술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우리 측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야포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야포의 숫자는 더 많았고요. 거기에 머스킷의 사거리와 파괴력 또한 우세했으며.......”

그러자 알현실에 침묵이 감돈다.

설마 저런 무기들을 토인들이 자기 손으로 개발했겠는가?

상식적으로, 정말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렇다고 하면 왜 중국이나 타 국가들의 무기는 그들보다 뒤떨어지는가?

그리고, 동양인들이 그들의 무기를 사다 쓰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당장 영국군이 전쟁 초기에 광둥에서 미국이 임칙서에게 팔아먹은 대포 때문에 개고생을 하지 않았는가? 운용이 워낙 졸렬하고 청이 협상을 하겠다며 기껏 만든 포대를 철거시키는 등의 병신짓으로 싹 말아먹었지만.

즉, 저들도 교육을 받으면 무기를 쓸 수는 있다.

그 무기를 누가 팔아먹었겠는가? 누가 그들을 훈련시켰겠는가?

후보는 하나 외에 생각하기 어려웠다.

“영국 이 개자식들이이이! 끄으윽!”

루이필리프는 그대로 뒷목을 잡고 쓰러지고 말았다.

***

“폐하께서는 괜찮으신가?”

“예, 고령에 너무 흥분하셔서 잠깐 의식을 잃으신 정도입니다. 건강에 큰 지장은 없으십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후........”

“그런데 정말 영국이오?”

“생존자들이 도망치면서 가져온 노획 장비 몇을 분석했습니다만.... 어렵습니다.”

연락선에 실려온 퍼거션 캡을 쓰는 총기의 출처는 금방 파악됐다.

각인은 없었지만 형태 자체가 타 소총들과는 판이했기에 추적한 결과 스위스에서 제조되는 소총임을 파악했고, 스위스 서약 동맹에 항의했지만 돌아온 답은 자기들은 동방에 총 판 적 없고, 자기들 총 사간 상인이 어디다 팔아먹는지는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는, 이 시대 기준으로는 구구절절 맞는 말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무기는 그냥 유럽 전체에 유래가 없는 무기였다.

괴상하게 생긴 석궁인데, 이 석궁을 이용해서 폭탄을 쏴댔다는 증언이 더해졌다. 실제로 그 특이한 캠 구조가 굉장히 효율적이고 위력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유럽에서 신대륙까지 다 찾아봐도 그런 무기를 제식으로 쓰는 국가는 단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적 기병이 사용했다는 세이버와 권총에 희망을 걸었지만, 누가 봐도 ‘나 동양 물건이에요’라고 주장하는 듯한 세총통과 아예 각인도 안 지워진 미국제 세이버.

영국과 연관지을 수 있는 물건은 전혀 없었다.

당연히 영국에 항의할 근거도 빈약했다. 니들이 방심하고 천하태평하게 굴다가 당한 걸 증거도 없이 누구한테 뒤집어씌우냐고 영국이 적반하장으로 굴어도 할 말이 없을 판이니까.

그럼 똑같은 방식으로 보복할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돈이 없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 공작을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었다. 지금까지 투자한 돈은 베트남까지 가는 원정군을 몇 번은 편성할 수 있는 비용이었고, 그걸 벌충할 목적으로 청을 바닥까지 긁어내려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프랑스는?

당장 첫 시작인 베트남에서부터 ‘입구컷’을 당했다.

국내를 쥐어짜서 자금을 마련하려니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다.

당장이라도 모든 돈 나가는 사업을 중단하고 20년은 국내를 수습해야 할 판이지만, 이미 폭주기관차에 올라탄 꼴이었다.

정권을 유지하려면 멈출 수 없다. 멈추지 않으면 돈이 떨어진다. 돈이 떨어지면 나라가 피폐해지니 돈을 어떻게든 구해와야 한다.

그 돈을 식민지를 쥐어짜서 마련하려 했다. 그런데 프랑스 식민제국의 첫 발걸음은 그대로 좌초되었다.

이제 어째야 하는가?

프랑스인들이 자연스럽게 도출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 방법,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긴축재정에 들어간다.

이에 따른 에상되는 결과 : 기만당한 것에 분노한 국민들이 그들 모두를 단두대에 올린다.

두 번째 방법 : 빚을 내서라도 다시 원정군을 보낸다.

이에 따른 예상되는 결과 : 적들은 상당히 강력하다. 만약 군대를 더 보낸다고 해도 승리할 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설령 저들을 완전히 짓밟는다고 해도 이미 오랜 전쟁으로 거의 모든 게 파괴되었을 땅에서 프랑스가 얻을 것은 자존심 외에 아무것도 없다. 결론적으로 재정적자는 해소되지 않는다.

세 번째 방법 : 베트남은 깔끔히 포기하고 중국과 일본에 숟가락을 얹는다. 런던 조약에서 자기들 몫으로 인정받은 부분이니 상관없다.

이에 따른 예상되는 결과 : 베트남에서 입은 상처를 용서하지 못하는 국민들이 그들을 단두대에 올린다.

네 번째 방법 : 이게 다 영국 때문이다를 외친다.

이에 따른 결과 : ...........

“저번에도 그거 했다가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됐는데 또 하자고요? 어디 이 나라가 어디까지 추락할지 저도 궁금하니 한 번 해 봅시다.”

“젠장, 그냥 이야기만 해 본 거요, 고르기는 어려운 선택지지.”

“장관, 어려운 게 아니라 대가리가 있으면 하면 안 되는 선택지요! 우리 집 개도 실수로 구덩이에 빠진 이후로 구덩이 위치를 기억하고 그 주변으로는 안 가! 우리 집 애완견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거요? 이 나라의 각료라는 작자들이?”

“댁은 그럼 뭐 뾰족한 수가 있소? 반대를 위한 반대요?”

“아니 지금 상황이 뻔히 보이잖아!”

공화국이라면 그냥 다음 선거에서 참패하고, 새 정권이 기존 정권의 사업들을 전부 백지화하고 끙끙대면서 국가부채를 갚아나가면 끝일 일이다. 베트남에 원정군을 새로 보내든 말든 재정 건전성부터 확보하고 볼 일이니까.

하지만 루이필리프 체제는 왕정이었고, 거기에 21세기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엮여 있는 이권이 너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허허허, 이번 댐 건설 사업에 저희가 시멘트를 독점 공급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약소합니다만 이번에 의원님이 득남하신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저희 회사에서.......’

‘어이쿠, 이렇게나 많은 금괴.... 아니, 선물을 주시다니요, 제 사리사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잘 쓰겠습니다.’

‘흠흠, 장관님, 이번에 저희가 댐 건설을 위한 투자금 확보를 위해서 새로운 법인을 설립하고자 하는데....... 약소하게나마 조금 준비했습니다. XX은행에 가셔서 열쇠 주시면 금고 열어줄 겁니다.’

너무 많이 받아먹었다.

뒤탈이 우려될 정도로.

대마불사라는 말이 있지만,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 기업 한둘 파산하고 끝나지는 않으리라. 그래서 뇌물도 받고 입도 씻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뇌물이 그들을 옭아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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