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몰락귀족-50화 (50/60)

아편전쟁(5)

산해관. 청.

중원의 입구를 자처하던 성곽은 이미 폐허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포탄에 맞은 산해관의 석축은 크게 흔들리고 파편이 쏟아져내렸다. 제대로 공성을 저지할 수 있는 병력은 거의 없었다. 팔기군이 개판이라지만 녹영군이라도 딱히 나을 게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러시아군이 수송해온 공성포가 미친 듯이 포화를 퍼부었다.

누르하치가 죽은 산해관에서, 후금이 돌파하여 청조를 여는 계기가 된 산해관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곳을 돌파해야만 베이징을 직공할 수 있다. 영국군이 톈진을 통해 베이징에 직공하기 전에 가야 한다.

물론 영국은 동맹국이지만, 전후 지분을 서로 주장하려면 역시 군공이 최고 아니겠는가.

난징은 영국의 손에 떨어지더라도, 베이징은 러시아군이 점령해야만 했다. 그래야 균형이 맞았다.

수십 년 내에 두 나라가 하나가 될 것이 확실시된다고 해도 계산은 정확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만리장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인근 지역을 공격하는 건 멈추지 않았다.

“끼럇!”

말발굽 소리가 울리면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맘껏 날뛰어라! 아버지 차르의 이름 아래 너희가 손에 넣는 모든 것은 너희의 것이다!”

“우라!”

함성을 지른 카자크들은 칼을 뽑았다.

“항복하면 살려주되 저항하면 모두 죽여라! 여자들은 전부 끌어내!”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겁탈해라! 다 죽이고 다 뺏고 다 태워라!”

열하가 불탄다.

청의 대표적인 별궁인 열하행궁은 통째로 불타올랐고, 주민들이든 궁녀들이든 간에 카자크 기병대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청군은 첫 포성이 울린 순간 이미 지리멸렬해져서 장수들부터 도망간 지 오래였고, 영국의 지원을 받아 무장한 러시아군을 오합지졸 민병대로 상대하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기회를 잡고, 확실한 지원까지 약속받은 극동 러시아군의 폭풍같은 진격을 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타타르의 멍에라며 수치스러워하지만, 그들은 결국 유목민의 영향을 짙게 받은 존재들이었다.

마침내 학살이 끝났을 때, 하늘에서 때늦은 눈꽃이 내려와 피로 물들여진, 침묵에 잠긴 거리를 채웠다.

***

후에 황궁에 머무른 지도 벌써 시간이 제법 지났다.

그래도 너무 오래 있는 것도 좋지는 않다.

부하들이 전쟁은 다 한다지만, 그래도 최고책임자가 자리를 지켜줘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 다음 주 중에 떠날 생각이다.”

거의 내 전용으러 비워놓다시피 한 정원이다.

원래 황궁의 후원은 외인, 그것도 남자가 함부로 드나들 수 없지만 나는 예외다.

치외법권 대상이기도 하고, 베트남의 또 다른 실권자 중 하나니까. 황제? 걔는 꼭두각시지.

“조만간 프랑스군이 올 거다. 중국에서의 전쟁이 끝난 후일지, 아니면 끝나기 전일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스군이 오기는 올 거야. 이미 출발했을 수도 있겠지.”

“우리 힘만으로 몰아낼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말에 답하지 않고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

“군수물자 공급도 당분간 끊길 거다. 이번에 가져온 세이버와, ‘그것’들을 마지막으로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물자 보충은 없다고 봐도 좋을 거야.”

총기를 가져올 수 없었던 건 전쟁이 장기화될 것을 계산하면 문자 그대로 지금 원정군에게 공급해주기도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대포나 볼리 건은 더더욱 부족하다.

“감사합니다.”

“뭘?”

보통 그런 대사가 나올 때가 아니지 않나?

“아무리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고 해도, 공사님은 이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감사드립니다.”

“내 사리사욕을 위해서지.”

“그게 제가 감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고 한들, 그것이 그 자선으로 생명을 부지한 이가 배은망덕하게 굴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 그래, 나도 너희가 정작 우리를 적대하면 유감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겠군.”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고 한 마디 했다.

“떠나기 전에 하나 묻지, 전쟁이 일어나면 네가 총지휘를 맡겠지.”

“예, 그럴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싸울 건가?”

“해상이나, 해안에서는 승산이 없습니다. 내륙으로 끌어들여서 싸워야죠.”

“정면으로?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상황에 따라서 결정해야겠죠. 저희 군대는 무기는 뛰어날지언정 정예가 아닙니다. 화력을 이용해서 원거리에서 섬멸한다면 최적이겠지만, 상대도 야포가 있고 중화기가 있을 테니까요. 전조의 군대와는 전혀 다를 겁니다.”

포격에 군대가 패닉에 빠지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베트남의 군대는 약할 대로 약해져 있었기에 포격을 뒤집어쓰는 경험은 거의 해보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저들의 의지를 꺾는 데에는 정면대결로 승리하는 게 낫습니다. 확실히 이긴다는 보장만 있다면 더 적은 수의 전투로 최대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죠.”

국민들의 사기를 크게 올리고, 프랑스의 사기를 꺾는다.

“게다가 프랑스인들은 총검돌격을 비롯한 근접전에도 능하지만, 저희는 아닙니다. 총검술이나 기타 단병접전을 교육받은 이들은 전군에 한 줌에 불과하고 숙련도도 낮습니다.”

“냉병기 사용보다는 화기를 숙달시키는 게 더 중요하기는 해, 네 방식은 틀리지 않았다. 수가 많지는 않지만 신무기도 적극 활용해 봐, 내가 만든 거라서 유럽에는 전혀 없는 물건이니까, 프랑스군도 처음 당하면 패닉에 안 빠질 수가 없을 거다.”

정확히는 비슷한 건 있긴 한데, 이런 개념으로 만들어진 건 처음일 거다.

“하지만 저희가 단병접전에 약하다는 의미는 프랑스군을 절대 접근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뜻, 운이 나쁘면 프랑스군이 돌격하는 것만으로도 혼란에 빠져서 전열이 붕괴해버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 엄청나게 굴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확신하기 어렵다.

“비겁하게 싸우면 전투에서 이기기가 쉽고, 당당하게 이기면 전쟁에서 이기기가 쉽지만, 전투 하나하나가 도박입니다. 실패하면 끝장나는, 그래서 확실하지 않은 한 정면대결은 피할 생각입니다. 반드시 다수로 소수를 쳐야만 합니다.”

“정론이군.”

내 말에 조연은 약간 의아한 빛을 띄었다.

“뭔가 말이 이상하시군요.”

“정론이지만 해답으로써는 오답이야.”

“그렇다면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나는 입을 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지. 네가 비겁하게 싸우더라도 모두가 정정당당한 대결에서 프랑스군이 완패했다고 믿는다면 그건 진실이 되는 거다.”

방심시키든, 전염병을 퍼트리든, 보급을 끊든, 우물에 독을 타든.

“사람들은 짧고 간결한 것만 기억해, 네가 개활지에서 적들과 싸워 승리한다면, 프랑스군이 전염병으로 골골대고 있었든, 아니면 방심해서 야포도 안 끌고 왔다던가, 보급이 끊어져서 사흘째 물 한 방울 먹지 못했다거나 하는 건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

그건 유럽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굳이 자세히 설명해줘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현명한 존재다 보니, 대화의 맥은 끊어졌다.

그 침묵을 깬 건 조연이었다.

“오늘 밤의 여운을 곡조 삼아, 그리고 두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원하면서 한 곡 올려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단쩌인이 만들어내는 음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쉬움이 담긴 음악소리는 끊길 듯 끊기지 않으며 기름이 전부 닳아버린 석유 등잔이 살며시 꺼진 이후로도 보름달의 빛에 의지해 흘러나가 밤 속으로 녹아들었다.

복숭아나무 가지에서 떨어져나온 한 떨기 꽃잎이 밤바람 속으로 사라지듯이.

***

인천, 조선, 영국 원정군 사령부.

“공사님.”

급보를 받고 달려온 내게 제독은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수송선 너바다와 앤에서 체포된 포로들이 학살당했습니다.”

“황제의 명령이었다고 하더군, 얼마 전 우리가 난징에서 청군을 대패하니까 홧김에 처형 지시를 내린 거야.”

나는 냉정히 말했다.

“책임을 물어야겠지.”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우는 것도 허용하지 않을 거다.

“황제가 모든 책임을 지든가, 황허 이북을 통으로 내놓든가.”

러시아에게 빚을 지우고, 중국을 약화시킨다. 러시아가 그 뒷수습을 어떻게 하냐고? 낸들 아냐, 터지든 말든 질러놓은 지들 팔자지.

엘리엇이 풍토병에 걸려서 귀국한 탓에 새로 임명된 신임 제독은 쭈뼛거렸다.

“그리고 다른 소식이 있나?”

“청이 조선에게 출병을 명령했습니다.”

조선이 개항하고 통상한다는 정보는 분명 도광제에게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청의 조정은 이를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기는 뭐하지만 명나라 시절 마시를 명이 잠가버리자 생필품을 구하기 어려워진 여진족이 마시를 열어달라고 난동을 부린 것과 비슷한 취급을 한 것이었다.

거기에 베트남의 내란까지 있었기에 병력을 함부로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결국 청은 조선과 베트남 모두에게 조공만 계속 바치면 건드리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상황이 계속 나빠지자 도광제는 나선정벌 때를 거울삼아 조선군에게 출병을 명령했다.

팔기군이든 녹영군이든 패전에 패전만 거듭하고 있으니 조선군이라도 불러와서 러시아를 막겠다는 생각이었다.

“조선 측은?”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하면 영국군은 즉시 한성을 다시 한 번 불태워야 하니까.

“조정에서 갑론을박이 좀 있었는데, 거부하는 쪽으로 갈 거 같습니다.”

당연하다.

일단 조선이 청을 좋아하는지는 둘째치고, 파병할 병력이 없을 거다.

이미 조선의 군대는 무너질 대로 무너졌고, 우리가 결정타를 먹였으니까.

“미스터 킴을 불러.”

내가 미스터 킴이라고 하면 김좌근이다.

“그 자에게 확실하게 전하도록, 우리 군대가 인천에 있음을 기억하라고, 그리고 청이 조선을 침공했을 경우 우리가 조선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도광제가 설마 아편전쟁에 러시아 침략까지 받는 상황에서 조선을 침공한다는 무리수를 둘까 싶긴 한데, 그래도 혹시,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은가.

‘게다가 우리가 개입 안 해도 별로 상관은 없지.’

팔기군의 현실이 어떤지는 내가 도광제보다도 잘 알 거다.

러시아군의 주공은 몽골과 산해관, 중앙아시아 방면, 만주와 연해주는 의외로 공격당하고 있지 않거나, 그 공격이 약했다.

따라서 만주에 배치된 팔기 병력이 한반도로 진입하는 게 가능하기는 하다.

가능은 하다.

그러나 조선군이 팔기를 막지도 못할 정도로 약하다면 애초에 쓸모가 없고, 조선군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비슷하게 싸울 정도로 강하다면 팔기가 그들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청조에 있어서 최악의 시나리오, 즉 팔기가 조선을 침공했는데 정작 러시아는 못 막고 조선을 무너트리는 데에도 실패한다면?

일단 권위 실추는 권위대로 실추당하고, 러시아에게 땅은 땅대로, 영국에게 이권은 이권대로 뜯길 거다. 청조가 그대로 끝장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안 건드리는 게 차라리 낫지. 설마 그 정도로 주제 파악을 못했을 리가 있나?

***

베이징, 자금성.

“조선이 군을 제공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만주에 배치된 팔기를 동원해서라도 끌어내라!”

격분한 도광제의 고함이 황궁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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