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3)
청나라, 자금성.
“대외로 통상을 근절하게 하였으나 근절하지 못했고, 대내로 범법자를 체포했으나 소탕하지 못했으니 이는 결국 빈말로 어물어물 넘긴 것에 불과하다! 결국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수많은 파란을 야기했을 뿐이니 생각건대 분노를 금치 못할 만큼 참으로 분하고 답답하도다. 그대는 무슨 말로 짐에게 대답하겠는가!”
“폐하, 광둥의 관문 1개의 세금 중 1할만 소신에게 군비로 사용하게 허하소서, 그리하면 외적들은 어렵지 않게 격퇴할 수 있나이다!”
“허튼 소리!”
도광제는 소환되어 올라온 임칙서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양이들이 억울함을 벗겨 달라 표를 올렸다. 은을 넉넉히 내어주고 모든 일에 억울함이 없이 공정하게 행하였다면 저들이 톈진까지 올라왔겠는가! 더 들을 것도 없다! 임칙서를 흠차대신과 양광총독 지위에서 파면한다!”
“폐하..... 폐하!”
임칙서는 숨이 턱 막혔다.
대체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저들은 황제가 생각하는 단순한 오랑캐가 결코 아닌데......
그러나 질질 끌려나가면서, 임칙서는 허탈하게 웃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직예총독 기신이 협상을 제안해 왔습니다.”
직예총독, 곧 북경의 방어책임자다.
그런 인물이 협상을 제안해 왔다는 건 도광제가 협상할 의지가 있다는 것.
나는 홍차에 브랜디를 약간 부어 향이 나게 했다.
“협상은 귀관이 알아서 하도록.”
“예?”
“어차피 결렬될 협상에 내가 나갈 필요가 있겠나?”
“....... 결렬될 협상이라고 하셨습니까?”
“배상금이면 모를까 영토 할양은 청이 절대 동의하지 않을 거다. 쳐맞기 전까진 말이지.”
그 염병할 놈의 중화사상.
잠깐 한숨을 쉰 나는 지도를 가리켰다.
“협상은 시간벌이에 불과해, 즉시 조선의 개항장들에 물자부터 수송해, 물자집적소를 만들어두라고. 함대와 병력도 거기 배치한다.”
주산군도에 앉아 있다가 전염병으로 줄줄이 죽어나갈 일 있냐. 원 역사에서 전투로 죽어나간 사람보다 전염병으로 죽은 군인이 50배는 많았지?
차라리 주산군도에는 보여주기식 소규모 병력만 놔두고 주력은 조선에서 휴식하게 하느니만 못하다.
홍차를 좀 더 마시고, 그 빈 자리만큼 다시 브랜디가 부어졌다.
“앨리엇 제독, 다시 말하지만 나는 1차 협상에 나가지 않을 걸세, 자네와 자네 사촌동생이 1차 협상을 주관하도록.”
내가 결렬될 협상이라고 단정지어뒀기에 나가지 않을 뿐, 모든 전쟁과 협상의 주도권은 내게 있다는 것 역시 암시하자 앨리엇 제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전에 본국에서 전달한 협상 요건 있지? 그것만 보고 진행하게, 어차피 결렬될 테지만 명분이 그러니까.”
나는 이마를 찡그리며 한 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하는 시늉은 해야 하네, 어차피 결렬될 거라고 함부로 행동하지 말도록, 우리가 양측 입장의 조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명분은 있어야 하니까. 이 동네 말로 ‘결자해지.’라는 말이 있지.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이제 홍차에 브랜디를 부은 건지 홍차향 나는 브랜디인지 구분도 안 가는 지경이 된 홍차를 한 번에 들이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일어나 보겠네.”
제충국으로 만든 살충제에 적셔놓다시피 한 모기장 안으로 빨리 들어가고 싶었다. 신경 곤두세우고 있는 것도 한두시간이지.
내가 말은 안 했지만 조선에 주력부대 주둔시키라고 명령한 건 그것 때문도 있었다. 말라리아가 조선에 없는 건 아니지만 한반도 말라리아는 말라리아원충 자체가 동남아나 주산군도 등에 퍼져있는 놈들보다 약한 놈이라서 증상이 심하지 않고, 죽을 일도 적다.
조선 말라리아에 걸리면 멀쩡할 인간도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물리면 골로 갈 수 있다 이거다. 아종이 달라서 그렇다던데 중요한 건 아니고. 아무튼 나도 한숨 돌릴 수 있고 비전투손실도 줄어든다.
‘그나저나 이 살충제에 재워놓은 모기장 이것도 팔아볼까.’
아니, 근데 모기가 말라리아의 원인이라고 증명되지도 않았는데...... 그것도 내가 실험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던 나는 아편전쟁이나 끝나고 생각하기로 했다.
***
외로운 밤에는 말동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그 상대가 대답 없이 경청해주고만 있어도 상관없다.
“당신 소설에서는 그 땅의 사람들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묘사했죠, 악마나 다름없는 중국인, 그리고 비열하게 뒤통수나 치는 얍삽한 인물들로 묘사한 일본인과는 다르게요.”
“지옥의 밑바닥에서라도 기어올라올 이들이니까.”
“지옥의 밑바닥이요?”
“그래.”
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포기하지 않겠지, 끝없는 고통과 불행에 시달리더라도. 운명이 그들을 희롱하고 신에게 버림받고 세상에게 증오당한다고 해도. 달의 그림자만큼이나 어두운 어둠 속에서도.”
수천 개의 땅과 바다에서 솟아오른 별들이 꼬리를 끌며 땅으로 떨어져 대지를 불태워도. 질병과 전쟁과 기근과 죽음에 휩싸인 세계를 저주하고 싶어진다 해도.
“그 끝에는 빛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믿었다.
정말로 믿었다.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은 그저 상상뿐이었지만.
바깥에는 기다렸던 구원은 없고, 오로지 방관자, 배신자, 침략자뿐이었지만.
이런 입장이 되어보니, 조금쯤 엉뚱한 생각이 거대한 속삭임을 내 마음에 남긴다.
잊혀진 환상을 담아서, 핏빛 꿈을 담아서 환상을 노래한다.
어쩌면 이것은 역지사지를 실천할 때가 아닐까.
침략자를 침략한다. 배신자를 배신한다. 방관자를 방치한다.
그러면.......
“다른 생각하나 보군요.”
“잠깐.”
나는 나직이 말했다.
“예전 생각, 그리고 나중 일 생각을 좀 했지.”
이건 21세기 대한민국을 살던 나인가, 19세기 대영제국의 고위 외교관인 나인가.
19세기의 영국 외교관은 중국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을 이유가 없지만, 왜 나는 중화라는 말만 들으면 주먹이 쥐어지고 이를 악물게 되는가.
‘중요하지 않다.’
그래,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딴 생각할 필요도, 그럴 여유도 없다.
러시아가 남하한다. 그리고 영국은 북상한다.
중국을 인도 부왕령처럼 만들어버리기는 무리다. 너무 크다. 땅덩이만 크면 상관없는데 인구까지 미친 듯이 많다. 환장할 노릇이다.
인도는 그나마 민족과 종교가 철저히 분열되어 있었기에 디바이드 앤 룰이라도 통했지, 중국은 그놈의 중화사상 때문에 안 통한다.
여러 국가들이 나누어서 지배하는 것이 그나마 최선일까.
“프랑스는 일본도 개항시키겠다고 벼르고 있으니 베트남에 쏟을 여력은 조금은 줄어들겠지,”
대신 일본에서 뭔가 공작을 할 일이 생기면 그것도 내가 관할해야 한다는 소리일 가능성이 매우, 극단적으로 높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또........”
“그리고, 당신의 자랑이자 제 기쁨이라고 당신 입으로 이야기한 사랑스러운 아이가 저기서 자고 있죠.”
플로렌스가 내 말을 끊었다.
“....... 미안.”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암순응이 끝난 두 눈에는 잠들어 있는 앨리스가 보였다.
내 딸.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가지게 된 ‘나’의 자식.
“잠든 아이 옆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앨리스를 바라보던 플로렌스는 나직이 말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하죠.”
***
“알고 있지만, 전 당신을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에요. 당신도 마찬가지겠지만.”
부정할 수는 없었다. 서로에게 이득을 안겨줄 수 있기에 결혼했고, 적어도 그녀든 나든 그 계약에는 충실하다.
19세기를 살아가는 귀족의 결합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거래 조항에,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말라는 조항은 없었다는 것, 상기시켜드릴까요.”
“다른 남자라도 생겼나?”
나도 모르게 나간 퉁명스러운 말에 플로렌스는 고개를 저었다.
“전 애초에 남자에는 관심 없어요. 설령 누군가가 구애하더라도 거절했겠죠.”
그러겠지, 수많은 혼담도, 수많은 남자들의 구애도 죄다 뿌리친 게 저 여자인데 애인이 쉽게 생길 리가 있나.
“그럼?”
“당신이 쓴 구절을 인용해드리죠, 빛나는 별 아래 있는 소녀는 한 남자만을 위해 기도한다.”
잠깐, 저게 어디서 썼더라, 홈즈 시리즈는 확실히 아닌데.
하도 이것저것 잡스러운 거 많이 써서 헷갈리네.
“소녀는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지금 바로 그를 필요로 하기에, 그에 대한 감정이 자라다 못해 넘쳐흐르기에, 그녀 자신이 그의 운명의 별일까 궁금해하면서.”
이제 생각이 났다. 저 구절은.......
“소년에게 반한 소녀, 짝사랑 이야기인데.”
내가 끼적여서 한데 모아 출판한 단편집에 끼어 있던 내용이다. 별이 제법 중요한 키워드였지?
“내가 가진 모든 걸 줄게, 꿈을 향해 달리는 너만을 위한 등불이 되어줄게, 그럼 내 것이 되어줄까, 내가 당신의 별이 될 수 있을까.”
플로렌스의 말이 딱 멎었다.
“알고 있잖아요?”
내 시선이 앨리스에게 가 닿는다.
수백 년 동안 결코 일어나지 않을, 멋진 왕자를 기다리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곤히 자는 소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앨리스 때문에라도 할 수 없어.”
최소한,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만큼은 진짜니까.
어머니처럼은 될 수 없더라도. 전생이든 현생이든. 최소한 부끄럽지는 않으려고.
“알고는 있었잖아요.”
“그 애는 나한테 여동생 같은 애야.”
“그래서 그 애도 적극적으로 달라붙지는 못하는 거죠. 한 발짝 더 다가섰다가 지금의 그 관계조차도 깨져나갈까봐. 자길 가두고 있는 빙하처럼 그 추억들이 모조리 표백될까봐.”
예쁘다, 하지만 이성으로 본 적은 없다.
“차라리 대놓고 바람을 피웠으면 저만 눈감아주면 끝났을 일인데, 그러고 있으니 보기 답답해서 한 말이에요.”
저것도 남녀로써의 애정이라고는 한 톨도 없으니 태연하게 나오는 말이겠지.
“그래서 지켜봤죠, 대체 왜 저렇게 매달리는 걸까. 저런 무심한 사람이 뭐가 그리 좋아서.”
오늘따라 그녀는 제법 솔직해 보였다. 취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까 아니면 이 밤이 그렇게 만든 걸까.
“애초에 서로를 속박하는 건 계약 위반인데.”
스쳐가는 인연, 내지는 동업자 정도로만 생각했으니 서로를 진지하게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서로에게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으니 부부싸움을 할 일이 없다.
“괜히 질투가 날 정도더라고요.”
그러니 서로가 어떤 인물인지도 잘 모른다.
알아가려 한 적이 없으니까.
“제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사명은 사명이다. 이건 해내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인간관계는 전혀 별개가 아닌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가 아니던가.
수련마저도 잠든 잔잔한 공기 속, 새벽의 균열이 하늘 위로 번져가고 숲 속에서 나뭇잎들이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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