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성혁명(1)
개성. 조선.
개성 시민들은 참으로 진기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선죽교 앞에서 자리 깔고 종이 뭉치를 끄적이는 서양인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 그 서양인이 나다.
‘원고가 많이 밀렸어.......’
나는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글을 끼적였다.
물론 내가 통행을 방해하는 민폐를 부리는 건 아니다. 선죽교는 사용되지 않는 다리니까.
이미 들어가지 말라고 난간까지 다 설치돼 있다.
물론 날 구경하느라 몰려든 인파 때문에 길이 막히는 건 별개기는 한데......
최소한 대놓고 덤벼드는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이다.
물론 내 곁에 무장한 구르카 용병 여덟 명이 있다는 게 영향을 안 미치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간에 사람들이 날 보는 눈은 신기한 구경거리일 뿐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아직 성계탕이 현역인 동네라 그럴지도?’
한성에서 뭔 난리가 났든 개성에서는 우리가 알 바냐...... 이런 식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는 일부러 시끄럽게 돌아다니는 중이다.
당장 내가 주민들의 이목을 끌 뿐 아니라 부하들을 시켜서 괜찮은 장신구들을 사들이라고 시키기도 했다.
팔아먹어서 이문을 남기기보다는 기념품이 되겠지만, 뭐 그러다가 진짜 문화재 같은 게 걸려들면 대박인 거고.......
‘잘 보관해 놨다가 나중에 유언으로 한국이 번듯한 나라 되면 반환하라고 해 볼까.’
솔직히 말해서 한국 근현대사가 오죽 험난했냐. 우리가 한국 문화재를 반출했다가 전쟁이네 뭐네 다 끝난 뒤에 반환해주면 감사받아도 모자랄 일 아닐까?
‘진짜 21세기 되면 한국에 반환해라 이런 식으로 유언장 남겨놓아도 괜찮을지도.....’
아편전쟁 끝나면 중국에서도 긁어모아볼까? 어차피 홍위병이 문화대혁명 때 다 때려부술 건데 내가 좀 보관해놔도 나쁠 거 없잖아?
물론 이 역사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날 확률은 미지수기는 하지만 미래는 모르는 일 아닌가. 내가 갖고 있는 게 확실하지.
조금 더 체계적인 문화재 약탈 계획을 고민하던 나는 슬슬 자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선죽교 방향으로 살짝 목례했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
“공사님, 임무 완수했습니다.”
“족보랑 사람, 둘 다 확보한 거 맞겠지?”
“물론입니다. 다만 공사님이 직접 만나고 확언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었다.
“미스터 리. 만나서 반갑습니다.”
책 한 다발을 곁에 쌓아둔 남자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제 이름은 에드워드 젠티안, 영국 공사입니다. 당신 가문의 정당한 왕좌를 되찾아주고자 합니다.”
“...... 당신들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 사실이오?”
“물론입니다.”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에게 중요한 건 당신의 몸 속에 흐르는 피와, 그것을 증명할 수단이니까요.”
족보의 진실성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우리야 족보 볼 줄 모르지만, 그거 볼 줄 아는 사람을 고용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돈은 언제나 답을 아는 법이다.
“월남의 미친 황제를 쫓아낸 혁명군은 역성혁명을 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했지만, 그 스스로가 제위에 오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정확히는 오를 수가 없는 거지만.
“그들은 정당한 군주의 핏줄이 제위를 돌려받기를 원합니다.”
아무 대가도 지불할 필요 없다. 그냥 너를 위해 준비된 왕좌에 올라라.
물론 네가 평생 꼭두각시가 될 것이며, 후계자도 네 마음대로 정할 수 없고, 혼인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것이며, 수틀리면 암살자가 찾아갈 거라는 말은 쏙 빼놨다.
막말로 정 꼭두각시로 쓰기 힘들겠다 싶으면 적당한 귀족 여자랑 식을 올리게 한 뒤 아이가 태어난 직후 제거해버리면 그만이다.
더 까놓고 말하면 임신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씨야 아무데서나 받아오면 그만 아닌가. 초야도 못 치러보고 독이 든 술을 먹고 죽어버려도 상관없다.
물론 그건 고깝게 굴었을 때 이야기고, 덴노처럼 장식품이 되든 만력제 혼이 씌어서 문 걸어잠그고 시녀들이나 주무르면서 놀면 암살자가 찾아갈 일은 없을 테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간에 아마 내가 개입할 일은 없을 거다. 응우옌 가문이 그런 건 알아서들 해야지.
‘그래도 막말로 도장 찍는 기계가 되는 대가로 평생 황제로 놀고먹을 수 있다면 좋지 뭐.’
공연히 권력에 욕심만 안 내면 천상의 직장 아니냐.
***
베트남, 하노이 인근 모처.
“그건 뭡니까?”
조이가 뭔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어색한가?”
“어색한 건 둘째치고 너무 길잖습니까. 어디서 나셨습니까?”
“조선에서 사 왔지.”
내가 개인적으로 이번 조선행에서 사들인 물건 중 딱 하나 건진 게 있으면 이거다.
옥으로 만든 허리띠, 금 장식이 달린 62마디의 네모난 판이 연결된 건데, 대체 언제적 물건인지 연결고리가 많이 삭아 있어서 차고 다니려면 분해해서 재조립해야 할 판이다.
이거 사온 놈에게 물어봐도 말이 제대로 안 통했던 모양인지 앞뒤가 안 맞는 소리나 하니 뭐 어쩌겠는가.
21세기까지 보존되면 문화재 소리 듣고도 남을 물건이지만, 그래도 한 번쯤 못 차볼 이유가 있겠는가.
그래도 내가 무슨 거인이나 고도비만도 아닌데 1.5m짜리 허리띠를 차보려는 건 아무래도 무리수가 맞았던 것 같다.
“실크햇 쓰시고 그런 허리띠는 솔직히 안 어울리죠.”
조연도 한 마디 얹었다. 옷 잘 입기로 유명한 얘가 한 소리 할 거야 이미 예상했지만.
19세기에 부활한 쯩 자매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 둘 덕분에 남부에서 시작된 반란은 이미 후에를 점령하고 하노이 코앞까지 진격해 있다.
참, 조연이 언니고 조이는 동생이다.
“아무튼 대포는 잘 받았습니다.”
“마음만 같으면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서양식 대포가 프랑스 원정군이 들고 온 숫자를 압도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하지만 그게 어렵지.”
대포를 사들이는 것도 문제지만 그걸 나르는 것도 보통 큰일이 아니다.
“그리고 조만간 전쟁이 날 거 같거든. 그래서 아무래도 무기 중 적잖은 수는 여기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전쟁? 어딥니까?”
“중국. 짧으면 1년, 길면 2년 내에 전쟁이 날 거 같아. 그리고 프랑스가 원정군을 슬슬 준비하는 단계라더군.”
이유는 굳이 말 안 했다. 솔직히 아편전쟁은.... 대영제국의 외교관으로써도 쪽팔린 게 맞긴 하잖아.
그렇게 말했지만 자매의 얼굴은 오히려 제법 밝았다.
“좋군요.”
“어차피 내란은 3개월 내에 끝날 거에요,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방세력들은 거의 다 우리 편에 붙었으니 독 안에 든 쥐죠.”
바다 건너로 도망가거나 숭정제처럼 목을 매는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그나저나 얘들도 중국계 혈통 섞인 거 치고는 중국 엄청 싫어하는구만.
“그리고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리 왕조의 후예가 도착했어. 하노이를 점령하면 즉위식을 해야겠지.”
제법 화려한 귀환이다. 내 계획대로 아예 시암을 대파해 고토까지 되찾으면 더하겠지.
“그나저나 딱 날짜를 맞춰서 오셨네요, 일부러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날짜?”
“오늘 하노이에 대한 마지막 공세가 시작될 거에요.”
하노이가 떨어지면 주요 거점은 우리 손에 전부 들어오는 셈, 근왕파 일부가 지방에서 저항하고 있지만, 조이가 장담했듯이 3개월이면 싹 쓸려나갈 거다.
베트콩 짓도 현지 민심이 자기들을 지지해야 가능한 거지..... 응우옌 왕조의 황족들이나 친황제파 귀족 및 토호들이 저항해 봤자 얼마나 하겠는가.
이미 백성들의 불만은 머리 끝까지 차오른 지 오래다. 응우옌 왕조는 개창 이래로 전조가 망한 원인이 된 친서민 정책을 폐기하고 토호들과 지주, 귀족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폈는데, 이게 귀족들을 만족시켜서 전조의 꼴을 모면했을지는 몰라도 민중들에게는 제대로 증오를 샀다.
지금 여기 있는 병력만 수만이라는 게 그걸 증명한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응우옌-몇 번이나 말하지만 황실 말고-가문을 따르는 병력이 10만은 너끈히 되리라.
“지금 병사들을 사열할 건데 같이 나가실 건가요?”
“내가?”
굳이 나가야 하나?
조이의 제안에 갸웃한 것도 잠시, 조연이 차분하게 부연설명을 했다.
“민중들은 바보가 아니에요, 이 무기들이 베트남에서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걸 아득히 넘고, 서양의 무기라는 것 정도는 모두가 압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서양에 나라를 판 게 아니라는 해명이 필요해서 소문을 좀 퍼트렸죠.”
“설마......”
“걱정하시는 종류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천주교도들이 탄압받는 걸 보다 못한 구라파의 부유한 귀족이 우리에게 무기를 구해줬다는 정도의 소문이니까요. 일단 퍼트려놓으니 살은 알아서 붙더군요.”
“개인적으로?”
“개인적으로요.”
“....... 뭐 그래.”
생각해 보니 프랑스인들도 바보가 아니다. 다낭 해전에서 그렇게 대승을 거뒀는데 다시 쳐들어왔을 때 전열보병이 있는 거 보면......
“그럼 내가......”
“그 이국의 귀족 역할을 해 주셔야죠, 그래도 공사님이 우리 진중에 계신 걸 본 사람들이 은근히 있으니 소문에 신빙성이 더해지긴 했지만, 저희랑 같이 계신 모습을 한 번 대놓고 보여주실 필요도 있어요. 저희가 아는 한 이 근방에 서양인은 없으니 더더욱 책잡히실 일은 없고요.”
하긴 선교사들을 그렇게 잡아죽인 베트남에서 프랑스 선교사가 이 근처에 돌아다닐 가능성은 낮겠지.
“군 내에 천주교도들은 없어?”
“제법 많죠, 그들은 이 전쟁을 성전으로 여기니까요. 다만 선교사나 주교, 신부 등은 진중에 얼씬도 못하게 하니 걱정 마세요.”
“후..... 그래. 어차피 내가 젠티안 자작이다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것도 아니니.....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내 실명은 모르는 거지?”
“당연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랜만에 코끼리 좀 타 보자.
내가 받아들이자, 곧장 조연이 앞장서고 나와 조이가 뒤따라갔다.
“내가 사열하면서 해야 할 거 있어?”
“연설 같은 건 언니가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근데 너무하지 않아요? 어떻게 저는 기회가 한 번도 없는지.......”
“네가 그렇게 덤벙대지만 않았으면 하기 싫다고 해도 시켰을 거야. 그리고 네가 하면 길어지잖아. 가뜩이나 말 많은 애가.”
“흠, 영국의 총리 중 하나가 예전에 했던 말이 있지, 연설은 여자의 치마와 같아서 너무 짧아도, 너무 길어도 좋지 않다고. 그 말이 좀 왜곡돼서 흔히 ‘연설과 치마는 짧을수록 좋다’고 알려지기는 했는데. 그래서 그 양반 연설은 짧고 굵기로 유명했지. 이 시대 사람은 아니라서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제법 카리스마 있는 양반이었다더라고.”
“저 녀석이랑 딱 정반대네요. 알맹이는 없고 쓸데없이 길기만 하잖아요.”
나와 조연의 합동공격에 입술이 부루퉁하게 나온 조이는 툴툴대면서 자기 코끼리로 걸어가버렸다.
“죄송해요, 조이 녀석이 좀 버릇이 없죠. 하도 오냐오냐 자라서 그래요.”
“저 성격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동생 보는 것 같아서 귀엽기도 하고요. 뭐 저야 형제자매가 원래 없긴 합니다만.”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감사한 일이죠.”
한숨을 쉰 조연의 등을 본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 근데 혹시 제 코끼리는 없습니까?”
“저랑 같이 타시면 됩니다. 제가 오늘 오실 줄 모르고 준비를 못 해서요..... 죄송합니다.”
애초에 내가 사열하는 것도 즉흥적인 거였으니 어쩔 수 없긴 하겠다.
“아닙니다. 어차피 코끼리 등이 말처럼 좁은 것도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럼 맡기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새로 개발한 신무기가 있는데 아직 전달을 못 했네, 이번 전투로 내란이 정말 끝난다면 이놈은 프랑스 침공 격퇴에나 실전투입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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