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점(3)
그때였다.
밖에서 뭔가 인기척이 느껴졌고, 나는 곧장 손을 돌려 호신용 무기를 잡았다.
호신용으로 가져온 퍼거션 캡 쌍총신 권총을 쥔 직후,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사관 경비병과 누군가가 다투는 듯한 소리였다.
잠시 뒤, 경비병 하나가 노크를 했다. 정중히 노크하다가 손가락이 창호지를 찢어버리는 사소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경비병은 입을 열었다.
“저, 조선 측에서 관료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관료?”
“예, 어쩌시겠습니까? 당장 공사님을 만나야겠다고........”
“들여보내게.”
나는 대충 옷을 걸쳐 입었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머리를 대충 정돈한 직후, 문이 열리고 남자 하나가 들어섰다.
구면이었다.
“외무대신. 늦은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외무대신이라 불린 예조판서, 김좌근은 무심한 눈으로 슥 둘러보았다.
“이거, 제가 찾아올 시간을 잘못 고른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라일라에게 잠깐 시선이 머무른 걸 보니 라일라를 내 첩이나 그런 걸로 안 모양인데, 굳이 오해를 풀어줄 건 없겠지.
“나라의 일을 하는 것이 어디 낮과 밤을 가리면서 하는 일이겠습니까.”
나는 김좌근에게 자리를 권했다.
“편히 앉으십시오.”
“죄송한 일이지만 듣는 귀가 가급적 적을수록 좋은 일입니다.”
“이 아이는 저의 심복이고 수족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가 새어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김좌근의 눈썹이 살짝 보이지 않을 정도로 꿈틀거렸지만 그걸 가지고 투정부릴 때가 아니라는 걸 이해했는지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그러면, 조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대변합니까, 아니면 당신의 가문을 대변합니까.”
안동 김씨냐, 아니면 김좌근 개인이냐.
애초에 조선 정부의 밀사라는 가정은 하지도 않았다.
“우선은 저희의 가문을 대변하겠으나. 상황에 따라 다른 쪽이 될지도 모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쭙겠습니다.”
나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풍양 조씨를 압박하기 위해 저희 측의 도움이 필요하신 겁니까?”
“...........”
김좌근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김좌근이 당황했다! 나는 김좌근의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
“저희라고 해서 조선 조정의 사정에 깜깜이는 아닙니다. 당신들, 안동 김씨가 우리와의 협상을 주장하고, 풍양 조씨가 그 주장에 격렬히 반발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 그렇다면 이야기가 오히려 쉽겠구려.”
“화장실 갈 때와 화장실에서 나올 때 마음이 다른 법, 우리 군이 한양을 공성할 때는 겁먹은 조정 중신들이 협상에 찬동했을지 몰라도, 정작 상황이 끝나고 나니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당신들을 탄핵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 말이오, 그리고 그 선두에 풍양 조씨가 서 있지 않소?”
많은 부분은 지레짐작과 예측이다. 내게 들어온 보고는 김좌근은 병자호란을 거론하며 협상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이고, 결국 조정 중론을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이미 협상단이 나갔을 때는 성벽이 무너지고 영국군이 막 시내에 돌입하려는 참이었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는가.
“지난번 대화재 때문에 풍양 조씨의 입김이 조정에서 한참 강해졌소.”
“저희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나는 빙긋 웃었다.
“기본적으로, 저희는 장사치입니다. 조건만 맞고, 저희가 해줄 수 있는 범위 내라고 하면 뭐든 하죠, 대가만 적절하게 지불된다면 말입니다.”
“뭘 원하시오?”
“아쉬우신 쪽이 먼저 조건을 제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저 난전(무허가 시장)의 장사치들조차 아는 사실입니다. 누가 무엇을 파는지조차 모르는 상인에게 먼저 얼마를 주겠다고부터 제안하겠습니까.”
김좌근은 욕심이 많지만, 그게 멍청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무능한 놈은 세도정치의 정점이 되지도 못하니까.
“일단 도성 내의 병사들과 한강을 막고 있는 흑선들부터 치워주시오, 당장 저들이 한양에서만 사라지면 민심을 그럭저럭 수습할 수 있을 터이니. 지금 시중에는 우리가 양이의 속국이 될 지경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오.”
그건 조금 곤란한데, 지금 끄나풀들에게 뭔가 찾았다는 소식은 아직 안 들어와서 말이지.
내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자. 김좌근은 조금 초조한 듯 보였다.
물론 어지간해서는 눈치채기 어렵겠지만, 눈에 집중하면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김좌근은 초조했다.
‘이러다가는 내가 천하의 간신이 될 판이지 않는가.’
굳이 비유하자면 토목의 변에서 최악의 실책을 저지른 환관 왕진이나 될까.
실제로 이러다가는 농담이 아니라 역적이 될 판이다. 아니, 대왕대비가 건재한 지금이야 그런 소리를 하는 이는 없지만, 대왕대비가 죽고 수렴청정이 대비에게로 넘어가거나 국왕이 친정을 시작하기라도 하면 대놓고 역적 소리가 나와도 이상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완성부원군(최명길)이나 세 치 혀로 수십만 대군을 물러가게 한 서희의 흉내를 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흐으음.”
김좌근이 똥줄이 타들어가든 말든, 나는 고민했다.
어차피 이제 화산 이씨를 황손 대우해주면서 국외로 빼돌리기만 해도 조선에서 더 볼 일은 없긴 한데.
‘운산 금광이나 단천 은광을 달라고 해볼까.’
아주 잠깐 욕심이 들었지만, 곧장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내가 작정하고 뜯어먹으려고 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꿀꺽할 수 있다. 게다가 이제 막 개항한 놈을 뜯어먹으려고 하면 역효과만 날 위험도 크고.
‘천천히 하자, 천천히.’
누가 안 뺏어먹는다.
아니, 뺏어먹어도 토해내게 할 자신이 있다는 게 정확하겠지.
그럼 역시......
“가능은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합당한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뭘 원하시오?”
“우리 군사들이 오랜 원정에 지켰는데, 황해도와 평안도의 풍광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몇 달 정도 쉬었다가 본국의 훈령을 받아 철군하고자 하는데, 협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면돌파다.
그 말을 한 직후, 김좌근의 눈이 라일라도 알 정도로 크게 흔들렸다.
***
화산 이씨의 집성촌은 황해도다.
다만 현재 존재하는 화산 이씨는 대한민국에만 있는데, 내가 알기로는 북한에서 북돼지들이 권력을 잡은 뒤에 자기네 족보만 쏙 빼놓고 북한 내의 모든 족보들을 압수해다가 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 끝나고 한숨 돌린 북베트남, 아니, 그 시점에는 그냥 베트남 정부가 된 공산당 차원에서 화산 이씨를 북한에서 수소문하려고 했지만 이미 족보는 싹 불탄 지 오래인지라 허탕만 쳤다더라. 정작 화산 이씨를 본관으로 한 사람들은 북한에 더 많았음에도 냉전이 끝나고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한 뒤에야 화산 이씨 사람들을 베트남 내로 불러들일 수 있었고.
물론 옛 왕가를 찾아 예우해준 게 그 ‘공산당’이라는 게 웃기기는 한데. 애초에 베트남 공산당은 공산주의보다는 민족주의적인 세력이었다. 아마 자본주의 세력이 베트남 독립을 지지해줬으면 자본주의로 갈아타지 않았을까? 문제는 자본주의 열강들, 1세계의 강대국들은 각자 자기 꿍꿍이는 있었어도 대다수가 식민지인 입장에서는 한패였으니 선택권이 없었단 거고.
당장 ‘그’ 호치민만 해도 공산주의적으로 옳은 행동과 민족주의적으로 옳은 행동이 배치된다면 민족주의를 택하는 인물이었으니 뭐 말 다 했지.
아무튼, 이야기가 좀 샜지만 아직 황해도에 있을 화산 이씨 집성촌의 족보가 멀쩡할 때고, 따라서 우리가 황해도로 대놓고 들어가서 데려가는 것도 가능하다는 거다.
원래는 조용히 사람을 보내서 협상하고, 그쪽에서 싫다고 하면 방계라도 설득해서 어떻게든 구해보려고 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대놓고 데려가도 된다.
일단 안동 김씨가 움직였는데 지방관들 중에 항의할 배짱이 있는 인간이 이 시대 조선에 있을까?
정 명분이 필요하면 뭐 ‘수백 년 전에 불의한 일을 당해 전조(고려)로 도망친 왕족들을 가엾게 여긴 우리 국왕 폐하-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기는 했지만 일단 내게 명령을 내린 사람은 윌리엄 4세니까-께서 군대를 몰아 찬탈자를 축출하고 왕위를 돌려드리라고....’ 젠장. 내가 들어도 억지로 들린다, 리 왕조가 멸문한 게 몇백 년이 지났는데 아무리 후손이 확실하다고 해도 말이지.
근데 명분이 좀 어거지면 어떠냐, 힘 있으면 그만이지.
김좌근이 돌아간 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대사관에 담 같은 걸 빙 둘러 지어야겠어.”
공사관 수비대 건물도 만들고, 할 거 많네.
“나도 아편전쟁 끝나면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다, 이렇게 조약문에 명시시켜야 하나.”
시작이야 워낙 추하게 시작했으니 굳이 개입하고 싶지 않다. 괜히 내 이름만 더럽힐라.
솔직히 말하자면 아편 전쟁은 안 일어날 수도 있던 전쟁이다. 내가 알기로는 1839년에서 1840년이면 아편 무역상들이 거의 다 부도난 상태였고,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정도로 현지에서 날뛴 영국 관료만 아니었으면 아편전쟁을 피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중국 현지에 있는 관료들 중 나보다 상관은 없고, 당장 천비 해전에서 영국 상선 두 척을 동원해 전쟁명분을 만들겠답시고 멀쩡한 영국 상선 로열 색슨을 포격한 시점에서 내가 그놈을 여왕 폐하의 신민에게 관료라는 놈이 해적질을 하는 거나면서 조져버리면 아편전쟁 자체를 무마해버릴 수도 있다.
근데,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패배하나? 아니다.
내게 이득이 안 되거나 손해가 되나? 아니다.
내가 중국을 좋아하나? 아니다.
내가 받아먹을 수 있는 이득은 한없이 크고, 손해볼 건 단 하나도 없다.
물론 내 입장이 입장이니 이 지저분한 협잡에 굳이 끼어들 건 없고, 베트남에서의 공작 때문에 정신없고, 중국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서 신경을 못 쓴 걸로 해 두면 그만이다.
대신 중립적인 입장에서 사실만 보고할 수는 있겠지. 예를 들어 청나라의 군사력은 지금 개털이라거나. 현재 청은 난징을 방위할 능력도 없다거나.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 말아야 한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전쟁이 끝날 때쯤이면 본국에서 내가 요청하지 않아도 알아서 전쟁 종결에 관여하라고 시키겠지. 당장 극동에서 활동하려면 내가 깔아둔 기반을 이용하지 않는 건 쓸데없는 낭비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난징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는 내가 활약하겠지. 동양통이 없는 것도 아니고 멀쩡히 잘 일하고 있는 사람을 놔두고 누굴 시켜.
‘아편 전쟁이 끝나는 시점이 되면, 동아시아는 통째로 내 왕국이나 다름없게 되겠지.’
물론 불안정한 왕국이다. 내 영향력은 내가 영국의 영향력을 아시아로 투사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라는 데에서 기인하니까.
그러니 나는 영국이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내가 몸이 하나니 조선 공사, 일본 공사, 중국 공사, 베트남 공사 등을 전부 겸임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거기 공사들을 총괄하는 위치 정도는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붉은색 잉크로 그려진 원 안의 동아시아 지도는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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