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몰락귀족-42화 (42/60)

전환점(2)

경운궁, 조선

“국왕 폐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순간적으로 나는 아직 어린애인 조선 왕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윌리엄 4세 폐하께서 서거하셨다고?”

“예, 공사님.”

“그럼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공녀님이......”

“빅토리아 여왕 폐하로 즉위하셨습니다.”

연락선이 온 시간을 감안하면..... 대관식 같은 건 진작 다 끝났겠군.

“내각에서는? 뭔가 추가 명령은 없나?”

저번에 조선 개항 성공과 베트남의 내전 상황 등을 상세하게 적어 보냈는데 그게 아직 내각에 도착하지는 않았을 거다.

“추가 명령은 없습니다. 기존 공작을 계속 진행하랍니다. 여왕 폐하께서는 대관식 후 현 상황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받으신 뒤, 기존 공작을 계속 진행하라 명하셨습니다.”

“됐군.”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군주가 교체된 것에 따른 혼란은 아무리 영국이 입헌군주제 국가라지만 하루이틀에 가라앉지는 않을 터.

내가 아시아 지역을 내 입맛대로 판도를 뒤바꿔놓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베트남이야 쯩 자매의 환생이라 해도 믿을 조씨 자매가 있으니 왕만 보내주면 프랑스가 내려오지 않는 한 별 문제 없겠지, 혹시 본국의 전문에 프랑스의 조짐에 대한 건 없나?”

“프랑스에서 인도차이나 원정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움직임은 4년에서 5년 정도 걸리지 않을까 한다고.......”

“4년에서 5년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넉넉하진 않지만 부족한 것도 아니군.”

영 안 좋으면 구르카라도 대거 투입해야 할까 생각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최대한 빨리 수소문을 끝내고, 군사고문단은 도착했나?”

“이미 현지에 도착해 있습니다. 크루프에서 주문한 대포도 인도가 진행 중이고요.”

영국식으로 훈련된 전열보병에 크루프 야포까지 하면 응우옌 왕조의 최후는 이미 시간문제고. 시암도 위험하다.

“시암이 강해봤자 프랑스군을 목표로 훈련해온 신정부군을 막을 수준은 아닐 거고, 국내 지지 확보용으로 희생되겠군.”

나는 편히 앉았다.

“그거면 됐어.”

어차피 동남아 패권은 베트남에 넘겨줄 생각이었다.

“인도 동쪽을 둘로 나눠서 동남아시아, 그리고 동북아시아로 나누어서 한 쪽은 싱가포르에서, 한 쪽은 한양에서 관리하게 하면 되겠지.”

문제는 내 몸은 하나라는 거지만.

일단 당분간은 조선에 있을 거지만, 급한 일만 끝내면 싱가포르로 귀환할 거다.

“일단 공사관은 내년에 만들 인천 영사관과는 별개로 운영해야겠지. 이건 내가 자리를 비워도 어느 정도 상주 인원을 남겨뒀다가 여왕 폐하께서 조선 공사를 임명하시면 그들에게 넘겨주는 게 좋을 걸세.”

“알겠습니다.”

***

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

한옥에서 등잔불에 의지해 밤을 지새고 있으니 기분이 참 묘했다.

이제 사서삼경을 읽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내가 꺼낸 건 한자로 가득한 고서가 아니라 지도와 영어로 된 온갖 종류의 서류였다.

동아시아를 그려놓은 지도를 나는 천천히 짚었다.

“아편전쟁.”

3년쯤 남았던가. 그 전쟁이.

그리고 프랑스에서 준비되고 있다는 원정군, 본국의 첩보에 따르면 4년에서 5년쯤 걸린다지만 그보다 훨씬 짧은 시간 내에 들이닥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다.

“역시 올해 내에 확실하게 응우옌 왕조를 멸망시켜야겠어.”

원정군의 규모가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우리가 가진 크루프 야포를 몰아주면 프랑스 극동 원정군보다 베트남군이 유럽제 야포를 더 많이 보유하고 있는 막장스러운 상황이 벌어지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다.

‘리 왕조를 복위하고, 혹시 여유가 있다면 고토수복을 명분으로 시암과 한 판 붙어서 군의 상태를 가늠해보고 군을 확실하게 장악시켜야겠지.’

국론을 통일하고, 반대파를 숙청하고,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것, 모두 전쟁중에는 상대적으로 손쉬운 일이다.

프랑스가 금방 쳐들어온다면 준비 시간이 부족한 대가로 응우옌 가문-멸족 예정인 황실 말고 우리와 협력하고 있는 반군 가문-을 중심으로 기타 잡스러운 세력들을 깔끔하게 흡수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 전에 내분이 터질 가능성이 크니 가볍게 시암에 잽을 날려보라는 뜻이다.

물론 프랑스가 쳐들어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하고, 프랑스와 싸우는데 뒤통수를 맞을 위협도 없지는 않다.

‘아예 합병해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기는 하겠지만 반란의 가능성이 존재하니.’

리 왕조를 부활시키고, 사실상 세습될 총리직과 내각의 요직에 응우옌 가문을 앉히며, 이들을 지원해 프랑스와 기타 세력들을 박살낸다.

프랑스가 베트남에 눈이 멀어 이를 악물고 침략을 지속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다.

하지만 만일 베트남에 프랑스가 흥미를 잃는다면?

‘그럼 베트남의 가치도 딱 거기까지인 거지.’

그 다음에는 아마 높은 확률로 조선과 일본, 중국에서의 경쟁을 벌여야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마 프랑스가 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끊는다면.......

‘근대화가 완전히 끝났다면 장기말로 쓰이거나 견제당할 거고, 그조차 아니라면 그냥 가난하게 살라고 버려지거나 역으로 식민지로 삼으려 들 가능성도 없다고는 못한다.’

베트남이 정말로 운이 좋다면 원 역사의 일본제국처럼 열강의 말석에나마 오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거기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그날, 앙코르와트에서 한 말은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나는 베트남에 애착이 없고, 내가 원하는 건 프랑스가 거하게 꼬라박는 것, 그리고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 더 많은 권력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틀어낼 것이다.

즉 베트남이 일본 제국 정도의 국력을 가지고, 원 역사의 일본 제국과 똑같은 짓을 할 조짐이 보인다면 망설임없이 잘라낼 거다.

물론 베트남인들도 손해볼 게 없었으니 나와 손을 잡았던 거지만, 그것은 서로에게 그만한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손을 잡았을 뿐이다.

조선은....... 그래, 조선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다.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느끼는 게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니까.

그때,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렸다.

“라일라?”

“네, 주인님.”

메이드복을 입은 라일라가 소반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저거 말고 그 여성용 한복을 입히면 그럴 듯...... 아, 몸에 안 맞겠구나.

내가 여기를 공사관으로 정한 이후로 집안일을 해줄 사람이 필요해서-조선인들은 신뢰할 수가 없었다-데려온 라일라는 대접에 검은 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사약 비주얼인데. 라일라가 언제부터 금부도사였지? 경희궁 방면을 향해서 절을 올려야 하나?

“이게 뭐냐?”

“커피입니다. 찾으실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크림은 구하지 못했어요. 커피 잔도 분명히 보내달라고 했는데 오지를 않아서....”

“조선에서 크림을 구하는 게 이상한 일이지, 우유 자체가 귀한 동네인데.”

나는 살짝 찝찝한 표정으로 새까만 물을 보았다. 저거 엄청나게 쓰지 않을까.

문제는 라일라가 나를 너무 잘 안다는 거다. 솔직히 말하자면 졸려서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아이리시 위스키는 질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있어서 설탕이랑 같이 해서 좀 섞었어요.”

오, 아이리시 커피? 그거면 좀 낫지. 크림이 없다는 게 아쉽기는 한데.

“고맙군, 근데...... 이거 너무 많지 않아?”

그러자 라일라가 얼굴을 붉힌다. 아니, 등잔불에 비쳐서 그렇게 보이는 건가?

“비율 조절을 잘못해서 다시 맞추려고 하다 보니 양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죄송해요.”

“아냐, 아냐, 조금씩 마시다 보면 다 마시겠지 뭐. 너도 좀 마시고.”

솔직히 저 한 대접을 마시면 내일 엄청나게 고생할 거 같으니 둘이서 나눠마셔야지.

너무 뜨겁지 않게 적당히 식힌, 내가 딱 좋아하는 커피 온도에 아이리시 위스키 향이 섞였다.

“역시 감 안 떨어졌네.”

칭찬해준 뒤 나는 펜을 들었다.

“베트남은 어차피 조선에서의 일이 끝나야 뭔가 진행이라도 되겠지. 반란 진행 동안은 내가 개입해서 뭐 할 일도 없고,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건 역시 일본과 중국인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흑선내항이 일어난 시기가 남북전쟁과 거의 비슷했다는 건 안다.

그렇다면 내게는 선택지가 있다.

첫째, 일본의 문호를 강제로라도 개방한다.

둘째, 10여 년 뒤에 흑선내항이 자연스럽게 벌어질 때까지 일본을 내버려둔다. 즉 현상유지다.

전자를 선택하면 우선 본국과 조율을 해봐야 한다. 당장 원 역사에서 벨로네 공사가 제멋대로 병인양요를 일으켰다가 본국에서 월권을 저질렀다면서 거의 모가지가 날아갈 뻔했고, 병인양요의 실제 진행에도 거의 개입하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인도 동쪽에서 뭘 하든 내 마음대로 하면 된다고 해도 그건 프랑스를 막는 것과 관련이 있으니까 그런 거다.

조선의 개항은 프랑스의 저지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개항은 그런 것도 없다.

메리트는 일어날 모든 일을 조율할 수 있다는 것. 디메리트는 내가 가지고 있는 미래지식 상당수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후자를 선택하면 그냥 내 일만 해도 된다. 본국과 뭐 조율할 것도 없고, 책임을 추궁당할 일도 없으며, 무엇보다 내 업무량이 급감하며 미래지식도 사용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동아시아 역사가 제법 바뀐 상황에서 과연 페리 제독이 처음으로 일본을 개항시키는 사람이 될까? 프랑스나,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나..... 아니, 독일과 이탈리아계 국가들은 지금 유럽 대륙 사정으로도 바빠 돌아가실 지경이고 러시아는 태평양에 별반 거점이 없고, 극동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니 일본을 개항시킬 상대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정도로 압축된다. 미국을 빼면 말이다.

미국은 지난번 빈 회담에도 초대되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빈 회담은 유럽에 있는 강국들이라면 거의 다 참가했지만, 유럽 밖에 있는 국가들에게는 그 힘이 아무리 강대하다고 해도 형식적인 초대장 한 장조차 가지 않았따.

애초에 대부분의 유럽인들에게 미국인들은 천박한 상인들이고, 미국은 남북갈등이 문제지 한가하게 식민지 개척이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기는 하니까. 괜히 페리 제독이 기항권만 얻어놓고 간 게 아니다. 자국 포경선의 피항처가 필요했을 뿐 식민지 후보로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지.

지금 미국에서는 한창 서부극이나 찍고 있을 때니까. 뭔가 개척을 하려면 당장 자기 나라를 개척하는 게 더 나았을 거다.

“놔두는 게 낫겠지.”

아직 10년이 넘게 남았다.

10년은 긴 시간이다. 강산이 바뀌고, 어린아이가 청년과 처녀가 되고, 청년이 연륜을 가지게 될 만큼이나 긴 시간이다.

그러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 않는가.

차라리 코앞의 아편전쟁에 관여하여 중국을 갈라먹을 궁리를 하느니만 못하다.

커피 대접을 한 모금 더 마시자 진한 위스키 향이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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