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5)
“연합왕국 베트남 주재공사 에드워드 젠티안 자작입니다.”
“조선 예조판서 김좌근이네.”
김좌근.
내 눈앞에 있는 저 양반이 정말 김좌근이란 말이지.
사극에서 많이 보고 상상한 그 모습과는 느낌이 좀 다르긴 하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사실 내가 본 사극 태반이 고증은 그래서 개나 준 게 대부분이었으니.’
“우선 협상 시작 전에 한 가지를 명확히 하고 싶습니다. 귀측은 조선 왕국에서 전권을 위임받은 것이 맞습니까? 제 말은,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조약을 맺을 권한을 가지고 왔느냐는 말입니다.”
곧장 김좌근은 고개를 저었다.
“본인은 국왕 전하를 대리하여 이 자리에 있을 뿐이오, 국왕 전하께 모든 것을 알리고 처결받지 않으면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소.”
지랄 말라는 소리를 해주고 싶었다. 내가 당신네들 세도정치를 모르는 게 아닌데 왕은 개뿔이 왕이냐. 허수아비겠지.
“그렇다면 회담이 길어지겠군요.”
나는 몸을 기대어 자세를 편하게 했다. 일견 오만해보이기도 했지만, 외교관은 원래 좀 오만해야 한다. 그 오만이 회담 자체를 결렬시키면 안 되지만, 적어도 기선 제압은 확실히 해야 하니까.
“우선 회담 시작 전에 당신들에게 전달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순수한 호의에서 전달하는 내용이며, 거짓은 없습니다. 당신들이 믿든 말든 상관없지만 제 말을 무시해서 당신들이 입을 손해는 오로지 당신들의 책임이란 것,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거만한 태도로 말하자 김좌근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우선, 당신들은 우물 안 개구리라는 걸 지적해두고 싶군요,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 연합왕국의 지배권이 미치는 지역은 당신들이 중국이라 부르는 지역보다 훨씬 넓으며, 우리의 군대는 훨씬 적은 수로도 알량한 조선 왕국의 군대만이 아닌 청의 군대를 상대로도 일방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아, 그리고 최근 연합왕국은 혼인 동맹을 통해 러시아 제국, 당신들이 몇백 년 전 나선이라는 이름으로 교전했던 그 나라와 한 나라로 합쳤으니 그 영토는 다시 몇 배로 넓어졌다는 것도 알아두셔야겠군요.”
엄밀히 말하자면 식을 올리기는커녕 아직 빅토리아 공주와 황태자가 왕위를 이어받지도 않았으니 엄밀히 말해서는 블러핑이기는 하지만, 뭐 어떤가.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국가이며, 당신들이 상상도 못하는 지역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군대 역시 당신들보다 훨씬 강하죠.”
그러니까 개수작 부리지 말고 알아서 기라는 경고였다.
“청은 당신들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모든 책임이나 회담을 청 측에 떠넘기고 이 자리를 모면하실 생각이라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청이라고 한들 우리의 정예군을 이겨낼 수는 없을 겁니다.”
이건 전혀 거짓이 아니다. 아편전쟁이 코앞이니까, 내가 굳이 뭘 개입하고 할 것도 없다.
조만간 청이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굶주린 늑대떼는 늙은 사자의 뱃가죽을 찢어버리고 내장을 움켜 나누리라.
내 발언이 유출되더라도 문제는 없다. 조선이 유럽에다 알릴 것도 아니고, 청에다가 알려봤자 청이 안다고 아편전쟁을 이길 수 있겠냐?
가장 귀찮은 경우가 조선이 청에 알리고, 청이 이를 이유로 항의하는 건데, 잡아떼면 그만이다. 아니, 오히려 청이 뭔가 실질적인 행동에 들어가면 상인들이 입은 피해를 명분으로 전쟁을 결의하지나 않으면 ‘청나라 입장에서’ 다행이겠지.
“그러니 회담에 성실히 임하십시오,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대들이 원하는 것이 풍신수길이 임진년에 요구했던 것과 같은 것이오? 정명가도, 아니, 정청가도, 청나라를 정벌하게 길을 내라?”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당신들이 가진 길이 뭐 정비가 잘 되어 있으면 얼마나 잘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길에 포석 비슷한 거라도 깔렸는지요, 울퉁불퉁해 마차로 지나가지도 못하는 그런 길 따위 하등 가치가 없습니다.”
나는 미리 만들어온 조약문의 중국어판 사본을 꺼냈다.
“우리의 요구사항입니다. 아주 상식적인 요구사항이죠.”
내가 내민 조약서를 훑어본 김좌근은 이를 악물었다.
조정에서는 저들이 정확히 어떤 조건을 내세웠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걸 받아들일 수준의 권한은 없었다. 차라리 금은을 내놓으라고 하거나 하면 대강 내쫓을 수 있었을 텐데 개항에, 조선 내를 저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도록 하고, 심지어 상관-김좌근은 영사관을 상관 개념으로 이해했다-까지 설치하겠다고?
이걸 받아들이고 돌아가면 조정에서 어마어마한 폭풍이 몰아치리라. 그가 아무리 대왕대비의 오라비라고 해도 무사할 재간이 없다. 당장 풍양 조씨에서 대비가 나오지 않았는가. 아직 안동 김씨의 세도는 충분히 튼튼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는 안동 김씨의 정점도 아직은 아니었다.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적어도 한성이 공격당해 조정 중론이 돌아설 때까지는 어렵다. 차라리 여기서는 단호하게 꾸짖어야 한다.
“그대들은 통상을 위해 왔다고는 하나 포대를 공격해 무너트리고 불을 지르며 민가를 약탈함이 극에 달하였소, 어찌 그 저의를 믿을 수 있겠소? 또한 조선은 예로부터 군자의 나라라, 배가 난파하면 산 자들을 구호하였고 죽은 자들은 예를 다하여 장사지내었으며 표류한 자들은 그들이 원래 속한 곳으로 송환하였으니, 이는 그것이 덕이기 때문이오.”
“또한 그대들은 상인이며 매매하고자 한다고 하나, 우리 조선은 물산이 풍부하지 못하여 팔 것은 없으나, 무언가를 사들일 만큼 빈한한 것도 아니니, 그대들이 온다 한들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오, 또한 외인들을 국내에 들이지 않으며 백성들이 함부로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하는 것은 이 나라의 국법이니, 이는 허용할 수 없소.”
“그것은 동의할 수 없군요, 당신들의 나라에는 중국인이 이미 많이 돌아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은 국외가 아닌 것입니까? 중국인과 일본인은 내국인인 것입니까?”
“.... 그것은 경우가 다르오. 그들은.....”
“당신들과 오래 전부터 교류해왔겠죠, 하지만 결국 다 같은 국가입니다.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죠.”
“국가가 동등한 위치라니, 그렇다면 대청과 조선국이 같은 나라라는 말인가? 천자와 제후는 격이 엄연히 다르거늘.”
하여튼 못 배워먹은 오랑캐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이 부분의 인식 차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하기로 하죠, 하지만 한 가지는 확인받겠습니다. 결국 조선 정부는 본 조약의 조건을 조정하거나 할 의사는 없으며, 문자 그대로 모든 조항에 대해 거부 의사를 표한 것이라 보아도 되겠습니까?”
“당연한 것은 굳이 글로 쓸 필요가 없고, 당연하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소.”
“심히 유감입니다.”
나는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면 기꺼이 조만간에 수천 군사를 몰고 귀국이 그 요구를 받아들일 마음이 들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조약의 내용은 불변이 아니며, 얼마든 더 가혹해질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이건 평등한 조약이 아니다. 명백히 불평등조약이다.
그러나 약자들의 의견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약하면 당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시대다.
그걸 알아차리고 스스로 강해질 생각을 하지 않으면 잡아먹힐 뿐.
이번에 턱을 돌려줬을 때 현실을 부정하면서 정신승리를 할지, 아니면 본인들도 벌크업을 해서 자기 턱이 돌아갈 일을 만들지 않고 남의 턱을 돌려줄 능력을 갖추려고 발버둥칠지는 오로지 저들의 선택에 달렸겠지.
적어도 지금은 전자일 확률이 훨씬 높아 보이지만.....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
“조선의 현 왕은 어리기 때문에 왕의 할머니가 전권을 잡고 있다고 합니다.”
“마치 카트린 드 메디시스 같군요.”
음, 곽덕린.... 아니, 카트린. 앙리 2세의 왕비였으며 앙리 3세의 어머니였지만, 결국 그녀의 자식들이 영 칠칠치 못했던 데다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결국 실패한 여군주였지. 사실 성 바르톨로메오 학살은 그녀의 책임은 아니었고, 그녀는 평생 종교계의 화해와 화합을 꿈꾸기는 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조선을 카트린 드 메디시스 치세의 프랑스와 비교하는 건 카트린 개인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싶다. 카트린은 그래도 능력은 있었는데 후계자들이 다 덜떨어진 놈들에 도저히 국제 상황이든 국내 상황이든 안 따라줘서 실패한 거고, 저놈들은 그냥 나라 기둥뿌리가 뽑히더라도 자기 잇속만 채우려 드는 놈들이잖아.
그나마 세도정치 가문 중에 안동 김씨가 그래도 자기 가문 사람이라도 능력이 있어야 벼슬을 줬기에 그나마 나은 가문이었다는 건 희극인지 비극인지.
“조선의 상황은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당연하지만 일단 유럽과 동양, 특히 동아시아 왕조들의 국왕의 개념 역시 전혀 다르다는 것 역시 주지할 만 합니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현재 조선 왕조의 왕권은 극도로 약화되어 있으며, 실권은 몇몇 가문들에게 나뉘어져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명목상으로나마 왕은 모든 신하와 백성들의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겠죠.”
설령 반역을 저질러도 함부로 칼춤을 추면 안 되는 유럽과는 전혀 다르다. 적당한 명분이 있으면, 아니, 명분이 없어도 욕 좀 먹는 걸 감수하고 밀어붙이면 누구든 죽일 수 있다.
“그렇기에, 국왕과 왕족들을 확보하는 게 최우선입니다.”
“국왕은 그렇다쳐도 왕족들은 어째서입니까?”
“조선의 사례가 아니라 중국의 사례지만, 과거 몽골과의 전쟁에서 황제가 친정하다가 대패하고 생포당하자 정부에서 황제를 폐위하고 황태자를 즉위시킨 사례가 있습니다. 현 왕은 너무 어려 확정된 후계자가 없어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왕만 사로잡는다고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건 아닙니다. 가급적 수도 전역을 장악해야죠.”
당연히 파천 같은 걸 하게 놔둘 생각은 없다. 이미 구르카 용병들이 정찰을 다니고 있고, 왕이 도망가는 낌새를 보인다면 즉시 함대에 연락이 올 거다.
그럼 우리는 그나마 오래 버틸 수 있는 성을 버리고 기어나온 멍청함을 비웃어주면서 조정을 통째로 사로잡으면 그만이다.
“한양이라고 하는 조선의 수도는 그리 방어력이 강해 보이지 않습니다. 성벽이 과도하게 길어 성벽 전역을 방비하려면 몇만 명은 족히 필요할 겁니다. 성벽을 넘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또한 성곽의 상태 그 자체만으로도 개판이군요.”
“전형적인 구식 성벽입니다. 중포 사격을 조금만 가해도 붕괴하겠군요.”
“본래 방어용으로 지은 성곽은 아니고, 그저 도시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세운 성벽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전시지휘부인 산 위의 요새로 자리를 옮기는 게 조선의 방식인데, 그렇게 되면 증원군을 불러오는 게 불가피해지고 전쟁 기간도 길어집니다.”
제독과 함장, 참모들이 모인 작전회의에서 해병대와 해군, 세포이들과 구르카 용병들의 배치와 공격 경로가 계속 논의되었다.
“만일 국왕이 이제라도 급하게 탈출해 요새로 가려는 징후가 발견된다면 즉시 기병들을 동원해야 합니다. 헤이우드 제독, 군마는 충분합니까?”
“인도에서 보충을 받아온 덕에 기병을 운용하는 데 부족할 것 같진 않소.”
기병이 죄다 드라군들뿐이라는 게 아쉽긴 하지만, 바다 건너서 원정 온 입장에서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간단합니다. 최소한의 피해로 조선 왕궁을 함락하고, 조약을 체결합니다. 그 이상의 과욕은 부릴 필요 없습니다. 부려서도 안 되고요, 조선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전장이고, 우리의 목적은 인도차이나 반도임을 잊지 마십시오.”
나는 헤이우드 제독을 한 번 바라보았다. 헤이우드 제독 역시 내 시선을 전혀 피하지 않고 맞받았다.
“너무 걱정할 거 없소, 공사, 저 원숭이들 따위에게 우리가 패배할 일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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