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몰락귀족-39화 (39/60)

개항(4)

무장상선 한 척이 접근해오는 걸 본 헤이우드 제독은 인상을 팍 구겼지만, 잠시 뒤 표정을 폈다.

저 배에 누가 타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뒤, 기함에 그 무장상선을 타고 온 인물이 승함했다.

사열을 받으며 당당하게 탑승한 젠티안 공사는 태연하게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이구려, 제독, 그런데 아직 한양에 도달하지 못했소? 내가 마지막으로 보고를 받기로는 한강에 진입했다 하여 지금쯤이면 왕궁에 유니언 잭을 내걸었을 줄 알았는데 말이오.”

“..........”

뻘에 얹혀 좌초한 배들과 그 배들을 지키느라 남아 있던 병사들을 못 보지도 않았을 텐데 은근슬쩍 아직도 승전하지 못한 것을 추궁하는 공사의 태도에 헤이우드 제독은 남몰래 이를 갈았다.

“처음 들어오는 해안인지라 사고가 빈발했고, 조선인들의 저항이 격렬했습니다.”

“그래서 본 공사가 인도에서 추가로 구르카 용병들을 고용해 왔소, 현재 베트남에서의 일은 웬만큼 끝났으나 제독의 업무가 예상외로 늦어지는 바람에 충분히 빠르게 끝내지 못할까 우려되는구려.”

“너무 우려하지 마십시오, 조선인들은 조만간 협상장에 나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를 바라겠소. 진심으로 말이오.”

공사가 그렇게 말하고 제독을 지나쳐가버리자, 제독의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

병신.

내가 헤이우드 제독에 대해 내린 평가다.

내가 정보를 안 줬냐? 충분히 한강 수로에 대한 정보를 살피든 현지인을 매수하든 해서 수로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하고 들어가라고 했을 텐데?

심지어 자기 아랫것들도 완전히 방심하고 노략질을 시도하다가 매복한 조선군에게 박살이 났다면서? 인도 출신 세포이들만 죽어나갔기에 망정이지 영국 정규군에서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으면 어쩔 뻔했나?

아, 모양새 보니까 어떻게든 자기가 배 무턱대고 들이밀다가 좌초시킨 건 묻어버리려고 어떻게든 배를 빼내려고 난리치는 모양인데. 니가 보고를 미루면 내가 싱가포르에만 앉아 있을 줄 알았냐.

이미 모든 보고는 내각으로 실시간으로 날아가고 있다. 조선에 대한 압박이 지지부진한 것과 헤이우드 제독의 추태도 싹 적어서 올렸다.

물론 지금 시대의 범선으로는 그 보고가 중앙까지 올라가기에는 반년은 걸리겠지만-속도에 중시한 클리퍼 선 같은 건 아직 없기에 기존 범선을 연락선으로 써야 하고, 수에즈 운하도 없어서 희망봉을 돌아서 가야 한다, 내가 아는 한 영국에서 유일하게 상업운항을 할 수 있는 놈은 브루넬이 만든 그레이트 웨스턴뿐이다-아무튼 간에 내 보고서 내용이 바뀔 일은 없다.

동방의 조그마한 나라 상대하다가 격침당한 것도 아니고 함대 운영을 잘못해서 멀쩡한 군함을 여럿 좌초시켰으면 모가지까지는 안 당하더라도 한직으로 쫓겨나는 건 감당해야겠지. 그러고 보니 해군에 대놓고 연공서열 때문에 퇴역처분은 못 해도 적당히 한직으로 쫓아내는 제도가 있었지.....?

“하지만 헤이우드 제독이 공사님께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면 어떡하나요? 그 사람도 집안이나 연줄이 적지는 않던데........”

“내내 베트남에 있던 나한테 무슨 수로? 조선 개항의 필요성은 내각에서 승인한 일이고, 내가 정보조사를 제대로 안 했다고 뒤집어씌우려고 해도 기본적으로 들어온 정보를 검증도 안 했다는 소리니 결국 본인 목을 조르는 짓이다.”

라일라의 말에 코웃음을 쳐준 나는 자료를 폈다.

“현재 베트남 신정부군의 최고위 인사는 40명 정도로 압축할 수 있지, 그 중 가장 세력이 큰 사람이 그때 그 노친네고.”

40명이 너무 많지 않나 싶겠지만, 애초에 종교도 다르고 출신도 다른 이들이 응우옌 왕조 타도라는 기치 아래 뭉친 군벌연합체에 불과하니 오히려 생각보다 적은 거다.

“그 중 응우옌-당연히 황실과는 무관하다-가문 사람만 22명, 그 다음이 라오스 반군 출신의 군벌 대표자 4명, 이슬람계 반군 지도자가 8명, 힌두교 반군 지도자가 1명. 캄보디아 반군 출신이 5명인가.”

물론 저 군벌연합체가 정권을 잡았다고 해도 라오스나 캄보디아를 순순히 놓아주진 않았을 거다. 힌두교나 이슬람이야 타협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러니 결국 정부를 타도한 뒤에는 내전이 터질 거다.

“라오스나 캄보디아가 프랑스 손에 들어가는 것도 귀찮아지기는 마찬가지, 차라리 반군 전체가 아니라 응우옌 가문에 작정하고 지원을 해주는 것도 괜찮겠지.”

조금 더 조사해서야 알았지만, 우리가 후원하는 응우옌 가문은 객가에 기원을 두고 있다. 쉽게 말해서 중국계라는 거다. 한족의 일파로 분류됨에도 중국의 유대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민족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직접 제위를 노리기는 많이 어려운 거겠지. 베트남의 반중정서는 전근대에도 보통이 아니니까.

당장 우리가 조선을 침공한 이유인 화산 이씨만 봐도 당장 리 왕조가 그토록 추앙받은 이유가 송나라와 싸워서 비등비등한 결과를 낸 뒤 유리하게 평화협정을 체결했다는 거 아니었던가?

그러니 우리 측 제안도 쉽게쉽게 받아들인 것일 거다. 어차피 자기들은 황제 자리 못 노리거든. 원래는 떠이선 왕조의 생존자를 찾아내어 추대하고 자기들은 실권을 장악한 2인자 자리를 노릴 모양이었던 것 같다. 그래,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처럼.

‘하지만 내가 리 왕조의 후예들을 찾아다주겠다고 약속했으니 굳이 필요없어진 거겠지.’

나는 간단히 결론을 지었다.

“베트남 신정부가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장악하는 건 대영제국의 국익에 부합하며, 이를 위해서라도 신정부가 자치권을 허락하고 종교 탄압을 중단하는 정도에서 타협해야지, 라오스나 캄보디아가 베트남에서 분리독립하는 건 동의할 수 없다. 그러니 반군 지원도 선별적으로 해서 응우옌 가문에만 지원을 집중하는 것으로 한다.”

사실 아예 시암에 쳐들어가서 시암을 병합해버려도 나쁠 게 없다. 영국의 목적은 단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손을 떼게 만드는 걸 넘어서 아예 프랑스를 아시아에서 축출해 프랑스군이 인도에 손댈 여지 자체를 없애는 거니까.

나는 아무리 검토해도 기우라고밖에 생각이 안 들지만, 내각에서는 라오스나 캄보디아, 시암에 주둔한 프랑스군이 그 정글과 산악을 넘어서 미얀마와 동인도회사령 인도까지 진격할 거라고 긴장해 있는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다. 하여튼 원 역사에서도 히말라야 넘어서 러시아가 인도를 침략할 거라고 벌벌 떤 놈들 아니랄까봐.

‘그런 인간들을 안심시키려면 베트남에 친영 정권이 들어선 상태에서 동남아를 장악하게 만들어버려야지.’

프랑스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베트남에 한 10차 20차 침공군을 조직해 보낸다면야 베트남이 아무리 지역강국이라도 프랑스를 견뎌낼 여력이 없을 게 뻔하다. 프랑스는 열강이니까.

게다가 너무 무식하게 덩치를 불려버린 베트남도 내부적으로 반란 등이 끊이지 않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시암을 비롯한 베트남의 주변국들이 독립국인 상태로 놓아두는 것보다는 낫다.

이유? 뻔하지 않은가. 베트남 주변국들도 베트남만큼 키워주면 자기들끼리 죽어라 치고받으면서 국력을 소모시킬 게 뻔하다. 그러면 프랑스는 손쉽게 그들을 집어먹을 수 있다.

하지만 흔들어볼 여지가 없는 단일 강국이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면, 프랑스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상대를 무너트리지 않고서야 인도차이나를 장악할 수 없다.

그리고 인도차이나에서 패배하고 그대로 포기하고 끝낸다? 그건 프랑스의 방식이 아니다.

인도차이나를 정복하거나, 아니면 다른 벌충할 만한 식민지를 얻거나.

하지만 다른 벌충할 만한 식민지는 사실상 없다. 프랑스는 간신히 알제에 군대를 주둔시킬 권리, 그리고 인도차이나를 식민화할 권리만 얻고, 나머지 지역은 다른 유럽 국가들이 사이좋게 나누어 가진 지 오래.

논의된 적 없는 중국을 쳐서 식민화하거나, 아니면 조선이나 일본에 손을 대는 게 한계다.

물론 그런 상황을 영국이 구경만 할 가능성은 없으니, 당연히 조선과 일본, 중국에서도 대판 싸움이 날 거다. 중앙아시아 지역이야 프랑스가 무슨 재주를 부려도 러시아보다 더 빠르게 장악할 리가 없고.

아시아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식민지를 찾는다? 영국이든 아니면 프로이센이든 러시아든 간에 전쟁을 대판 하고 나서야 빼앗을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한다면, 베트남을 때려잡는 것보다 영국이나 기타 국가들을 상대로 전쟁을 해서 이기는 건 훨씬 난이도가 높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만들어낼 베트남 신정부가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지.”

우리가 태국 등과 접촉한 것보다 베트남과 접촉한 이유도 그렇다. 프랑스의 침공을 제일 먼저 당할 입장이니까.

그때였다.

“공사님! 조선 조정에서 협상할 사절을 보내왔습니다!”

“내 예상보다 늦었군,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조선 중앙 조정에서 보낸 사신이 확실한가? 지방관 따위를 사절이라고 보낸 건 아니겠지?”

일본이라면 영주의 대리인 정도가 오면 협상할 수 있어도, 조선은 철저히 중앙집권 국가라는 걸 아는 입장에서 지방관과 협상할 수는 없었다. 이건 위신 문제니까.

“아닙니다. 조선에서 판서, 그러니까 장관급에 해당하는 인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됐군.”

나는 씩 웃었다.

강화도 조약 때 판중추부사가 나왔던가? 아무튼 판서급이면 조선도 슬슬 다급해지기는 한 모양이다.

***

“전하! 저들이 양곡이 떨어지고 주리게 되면 곧 물러나리라 이야기하오나, 저들은 이미 한강의 수심을 재어 물길을 스스로 알아내고 있고, 계속해서 선박을 통해 식량과 물자를 보급받고 있나이다. 또한 도성을 굳게 닫아 지킨다고 할지라도 한강이 계속 막혀 있으면 조운선이 도성으로 올라올 수 없나이다!”

“정 그렇다면 임시로 파천하소서, 정조대왕께서 건축하신 화성으로 잠시 몸을 피하여 근왕군을 불러모으면......”

“이판! 그게 무슨 소리요! 고작 몇 척의 이양선이 두려워 전하께 파천을 권하다니! 전하, 저들을 적절히 효유하여 돌려보내게 하소서. 저들이 여러 가지를 원하나 그 근본은 오랑캐이옵니다. 저들을 예와 덕으로 꾸짖어 물러가게 하소서.”

“사신을 보내 천자께 청병하여 저들을 물러가게 하소서, 대국의 위엄을 보이면 저들이 실로 두려워해 반드시 물러갈 것입니다.”

영국 함대가 조선군을 연파해 가면서 한양으로 접근하자, 조정에서는 당연히 난리가 났다.

그럼에도 협상과 항전의 주장은 팽팽했다. 영국 함대가 수로를 거슬러 올라오면서 벌인 추태 탓이었다.

특히 대비 신정왕후 조씨를 중심으로 뭉친 풍양 조씨는 통상에 격렬히 반대했고, 양이가 정면으로 침략해 온다면 청에 병력을 요청해서라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협상을 주장하는 파벌 역시 당연히 있었다. 그 선두에는 풍양 조씨에게 이리저리 치이고 있던 안동 김씨였다.

당연하지만 이들은 협상을 하고 싶어서 주장한 게 아닌, 풍양 조씨의 세도를 흠집내려는 생각이었다.

이 선두에 선 이는 현재 수렴청정 중인 대왕대비 순헌황후의 남동생이자 안동 김씨의 수장, 하옥 김좌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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