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3)
베트남, 후에 황궁.
“폐하! 폐하!”
다급히 궁으로 달려들어온 전령이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냐?”
“반역이옵니다!”
“뭐라?”
“대대적인 반역이 일어났나이다! 여문회의 난에 뒤지지 않는 규모이옵니다!”
명명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문회의 난, 그리고 거기에 연계해 일어난 참파의 봉기와 농문운의 난이 일어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았다. 잊혀지기에는 너무 가까운 과거였다.
그의 치세 동안 벌어진 250회가 넘는 반란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반란과 맞먹는 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들은 명명제는 고함을 질렀다.
“당장 장명강과 여문덕, 배공훤과 범문전을 들라 하라!”
지난 난의 진압에서 맹활약한 장수들의 이름을 거론한 명명제는 이를 갈았다.
“그리고 당장 서역의 선교사들과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내는 대로 처형하라! 그놈들이 협력했으니 난이 일어난 것 아닌가!”
지난 여문회의 난 당시 여문회는 프랑스에게 지원을 요청하며 새로 수립될 베트남의 국교를 가톨릭으로 만들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실제로 베트남 내 가톨릭 세력은 여문회에게 상당수 동조했으며 선교사들도 여문회에게 많은 지원을 했다.
그 덕분에 꼬박 1831년부터 35년까지 4년간 전 국토를 초토화시켜 가면서 대규모 전쟁을 해야 했던 명명제 입장에서는 찢어죽여도 모자랄 자들이었고, 그들이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 판단했다.
물론 이번에는 헛다리였지만.
***
-탕! 타타타탕!
기병들의 일제사격에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 줌의 베트남 관군들은 총에 맞고 픽픽 쓰러졌다.
그 모습을 멀리서 구경하던 나는 두 팔을 벌렸다.
“아아, 이것은......”
“뭐하십니까.”
“그냥 이런 거 한번 해 보고 싶었네.”
괜히 코끼리 위에서 폼 잡던 나는 머쓱하게 팔을 내렸다.
“그런데 저건 진짜 뭡니까?”
“모르는가?”
반군의 두 최고위 지휘관 중 하나인 조씨연에게서 지랄 말라는 듯한 표정이 보이는 것 같다. 얘들이랑 너무 부대꼈더니 날 너무 잘 알게 됐어......
“흠, 나보다는 자네들이 더 잘 알 만한 물건이지, 알다시피 우리도 권총, 피스톨은 있지만 그걸 여기서 생산하기는 기술이 부족하잖나.”
휠락이든 플린트락이든 간에 스프링 기술이 특히 어려울 거다. 그렇다고 매치락 권총을 말 위에서 화승 들고 다니면서 쏘는 미친 짓을 할 순 없고.
“그래서 저 조선에서 오래전 개발한 물건을 가지고 왔지, 수백 년 전에 조선에서 만든 물건을 자네들이 못 만들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실제로 만들고 있지 않나?”
나는 쇠집게에 물려진 조그마한 금속 통을 흔들었다.
“아아, 이것은 세총통이란 것이다.”
물론 당연히 모를 물건이다. 세종대왕이 여진족 상대로 사용하기 위해 최초로 개발한 뒤, 명중률이 떨어지고 화약이 부족한 탓에 대량으로 실전배치되지 못해 실전 한 번 못 겪어보고 사라진 물건이거든.
다만 마상에서 쏘면 어차피 마상권총은 상대의 몸에 총구를 대고 발사하는 거라는 소리를 듣는 만큼 명중률은 서양과 도긴개긴이고, 화약이야 뭐.... 인도에서 실어나른 초석으로 만든 화약을 우리가 대주니까.
“어떤 면에서는 유럽의 권총보다 나은 물건이지.”
손잡이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어서 쇠집게에 끼워서 발사하는데, 쇠집게를 이용해 총통을 빠르게 교환하는 방법으로 빠른 재장전을 할 수 있다는 게 최대장점. 최대사거리는 250m에 달하며 휴대도 쉽고, 말 위에서 여러 개를 소지하면서 연사도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세총통의 세부구조는 잘 몰라서 전생에 박물관에서 본 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거기에 유럽제 퍼거션 캡식 피스톨을 좀 참고해야 했지만. 그 기본 틀은 같으니까 어떻게 세총통이라고 해 줄 순 있겠지.
“조선에서는 저런 무기를 씁니까? 몰랐습니다.”
“뭐 지금 쓰진 않을 텐데...... 15세기인가? 그때쯤 발명된 물건으로 알고 있네.”
일단 싸고 이곳에서도 만들기 쉽기도 하거니와 성능은 프랑스 흉갑기병용 플린트락 권총보다 못하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연사력은 그보다 위다.
무엇보다 어디서 보든 간에 영국과의 연관성을 입증하기는 어려우리라는 게 플러스. 아니, 서양과의 연관성을 생각해보기도 어려울 거다. 딱 봐도 동양적이잖아?
“아무튼, 난 이번 전투를 끝으로 빠져 있겠네,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알려지면 안 좋으니까.”
“알겠습니다.”
영국 공사가 프랑스 지역의 반군이랑 하하호호하는 거 들켰다? 바로 협정 위반이지. 나는 베트남에 있으면 안 된다.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장교들을 통해 연락하도록, 나는 싱가포르에 있을 테니.”
지금쯤 도착했을 연락선을 통해 본국에서의 훈령도 받아야 하고, 조선으로 가서 협정을 마무리짓기도 해야 한다. 지난번에 전령을 통해 협상의 얼개를 전달한 이후로 소식을 못 들었는데, 조선은 결사항전하기로 했을까 아니면 협상장에 나왔을까?
***
“이 빌어먹을 원숭이 자식들이!”
“제독님, 진정을......”
“진정은 무슨 놈의 진정!”
헤이우드 제독은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전투 한 번에 7명이 죽고 60명이 다쳤어! 대체 뭐라고 보고를 올려야 한단 말인가!”
물론 이건 전적으로 헤이우드 제독의 실책이었다. 방심하고 야포도 안 끌고 조선의 요새로 접근하다가 매복해 있던 조선군의 일제사격에 크게 당한 것이었다.
후퇴한 뒤에 야포를 끌고 와서 요새를 함락하기는 했지만, 상황이 계속 악화된다는 것은 명확했다.
심지어 한강을 따라 올라가던 프리깃 중 두 척이 좌초하는 사태까지 터졌고, 이걸 인양하지도 불태울지도 결정하지 못했다. 인양하자니 적지 한가운데였고, 적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불태우자니 후일 있을지 모를 질책이 두려웠다.
가능한 방법은 병력을 남겨 지키게 한 뒤 조선에게 항복을 받아낸 뒤 천천히 인양하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배를 살려오기만 하면 좌초했던 일은 적당히 넘길 수 있지만, 배를 불태우면 빼도박도 못하고 청문회에 끌려나가리라.
“제독님, 공사님께 연락을 보내서 세포이들을 증원해 달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동인도회사는 이미 전적으로 협력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니 몇천 명이라도 동원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안 되네.”
제독은 고개를 저었다.
“공사는 베트남에서의 공작에 정신이 팔려 있어, 베트남에서의 공작을 원활하게 해주는 조공이나 다름없는 조선의 개항을 위해 베트남에도 동원되지 않는 세포이 수천 명을 투입해? 공사 본인의 입지도 부담이 될 테니 들어줄 리가 없다.”
뭣보다 아무리 내각에게 전권을 위임받았다지만 새파랗게 젊은 놈이 거들먹거리면서 자기를 아랫것 대하듯 하는데 그런 놈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제일 컸다.
“그럼 어쩌시겠습니까.”
“우리 전력만으로 어떻게든 해낸다. 조선의 수도까지 진격해서 점령하고 개항을 강요한다. 저놈들도 우리가 수도에 진입하면 현실을 인정하겠지. 조선의 수도까지 해로로 고작 14마일이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순 없어!”
***
내 관사는 싱가포르 해협식민지에 있다. 내가 부임하기 이전에 베트남 제국은 서양의 모든 국가와의 국교를 단절했고, 덕분에 나도 명목상 베트남 공사지만 베트남 공사관에 머물 수가 없었다.
덕분에 내 관저는 해협식민지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거기에 안 둘 거면 아예 인도로 가야 하거든. 문제는 인도는 너무 멀다는 거고.
사실 싱가포르도 내가 관할해야 하는 조선, 일본과의 거리가 가까운 건 아니지만..... 그 동쪽에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식민지를 찾으려면 아예 호주까지 가야 한다. 보르네오를 비롯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령, 필리핀은 스페인령이다.
그나마 베트남과는 코앞이니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명색이 베트남 공사가 베트남을 밀입국하듯 드나들어야 한다는 게 웃기는 일이지만.
아무튼, 나는 연락선이 한 다발 쏟아놓은 편지들을 읽어야 했다.
제일 먼저 영국 정부에서 온 공문은 별 내용 없었다. 프랑스가 식민개척을 위해 명분을 쌓고 있고, 루이필리프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나 원정대 구성부터가 난항을 겪고 있다, 파리 외방전도회가 적극적인 움직임을 아무리 보인다고 해도 나라가 지금 전쟁 후반의 충격으로 숨이 넘어갈랑 말랑 하는데 쉽게 편성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보낸 중간보고가 영국 본토에 도착하려면 또 한참 걸리겠지, 그 전에 조선을 완전히 개항시키고 베트남 정권을 엎어버린 뒤 본격적인 근대화를 실시한다.
참, 저번에 요청받은 베트남 반군의 유학생 파견 요청도 보냈다. 아마 거절하지는 않을 거다. 대가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고 원래 유학생이라는 게 자국과 친밀한 세력을 상대에게 심어놓는 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지 않은가?
뭐 그 외에는 단지 두루뭉술하게 과업에 매진하라 이런 소리가 있었다. 그야 내가 제안한 계획은 영국 외무성의 최중요 기밀일 테니 함부로 적어서 보내기가 뭐했겠지.
그 다음으로 뜯어본 건 집에서 온 편지였다.
<....... 플로렌스가 아이를 낳았다. 귀여운 딸이더구나, 사실 아이 이름을 짓는 데 약간 의견충돌이 있었다. 네 아내는 앨리스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어하더구나, 나는 앨리스보다는 메리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만 네 아내는 그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눈동자가 너를 똑 닮아서 누가 봐도 네 자식이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어찌되었든 이름을 앨리스로 하기로 했다. 그 아이가 배를 탈 수 있을 수준이 되면 네 아내와 딸도 거기로 보낼 거다. 물론 그 전에 네가 귀국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국가의 일을 하니만큼 어서 돌아오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자리에서도 최선을 다해주거라, 식사는 매 끼니 빼먹지 않고 하느냐? 너는 툭하면 일에 정신이 팔려서 끼니를 거르고는 했지, 라일라가 잘 챙겨주리라 믿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니 좀 걱정되는구나.>
어머니가 보낸 장문의 편지를 세 번이나 읽은 나는 그 편지를 조용히 품에 집어넣었다.
다음 편지는 나이팅게일..... 아니, 플로렌스가 보낸 편지였다.
<잘 지내고 있나요? 제가 편지를 쓰는 이 순간은 당신이 아버지가 된 지 3일째 되는 날이에요. 밖에는 비가 올 것처럼 흐리지만 정작 비는 오지 않고 있고요.>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 그러니까 미숙한 하녀 하나가 그릇을 깨트리는 바람에 거의 쫓겨날 뻔했다거나. 어머니가 고양이를 기르는 걸 진지하게 고민하시기 시작했다거나 친정을 빼고도 내 지인들에게서 여러 선물이 왔다거나 하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얼씨구, 글래드스턴이랑 디즈레일리 이 양반들도 축하 선물을 보냈네? 브루넬이야 예상했다만.
선물을 보내줬으면 감사편지를 보내야 한다. 하, 나는 이런 쪽으로는 별로 글재주가 없는 거 같은데 말이지. 한동안 문구 고르느라 대가리 깨지겠구만.
그리고 그 다음은 브루넬이 보낸 편지였다.
<득녀를 먼저 축하드립니다. 공사님, 일 이야기를 하자면 본국 의회 놈들이 드디어 현실을 인정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범선을 쓸 작정이었는지. 아무튼 간에 프랑스인들이 군비를 다시 확충하면서 로열 네이비에 도전하기 위해 기존의 전열함을 개조해 증기선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에 로열 네이비 역시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열함들을 개조해 증기기관을 장착한 기범선으로 개조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한두 척도 아니고 향후 10년간 본토함대에 있는 모든 전열함을 개조하겠다고 했고, 5년여의 시간을 더 들여서 본토와 식민지 등에 남아 있는 프리깃 이상 등급의 모든 함선들을 모두 증기선으로 개조하는 방안이 의회를 통과했습니다. 저희 회사는 세계 최초로 대서양을 건넌 증기선을 건조한 회사니, 당연히 저희 사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과 함께 넉넉한 배당금을 전달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기쁩니다.>
브루넬은 좋아 죽으려고 하고 있겠구만. 흥분이 편지를 넘어서 느껴진다.
그 다음은..... 허, 글래드스턴이다.
<아시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윌리엄 4세 폐하의 건강이 계속 악화되시고 계십니다. 아마 이 편지가 도착했을 즈음에는 참람된 일이 이미 발생하였는지도 모르겠군요. 현재 폐하께서는 본인이 살아 있는 동안 공주님과 황태자가 주님 앞에 부부로써 선언되도록 밀어붙이고 계십니다. 이 탓에 내각과 의회가 제법 시끄럽습니다. 아직 러시아와의 협상이 다 끝나지도 않은 입장인지라 국왕 폐하의 추진 명령에 논란이 제법 있군요.>
글래드스턴은 어렵잖게 지난 선거에서 재선된 모양이었다. 흠, 이 양반에게는 뭐라 답장을 보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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