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몰락귀족-33화 (33/60)

식민지(4)

돛이 빙글빙글 돈다.

내가 특허를 가진 로터 세일이 연돌 근처에서 빙글빙글 돌며 배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물론 로터 세일이 주 동력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보조동력.

진짜 동력인 증기기관은 힘차게 석탄 증기를 내뿜는 것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고 있었다.

“공사님.”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는 목소리, 라일라다.

“곧 케이프타운에 입항할 예정이랍니다.”

“........ 그래.”

나는 고개를 돌려 항구를 보았다.

바다는 고요했지만, 마음이 쓰였다.

“마님이 걱정되시나요?”

“단신부임이 맘에 드는 건 아니지.”

그래도 오래 있지는 않을 거다.

뭐든 성과를 내면 즉시 본토 근무하는 자리로 올려 주겠다니, 그거 하나만 믿고 온 셈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람 생명이 허망한 시대다.

“임산부가 지구 반 바퀴를 돌아가기는 무리죠, 출산 후에 출발해도 무리일 겁니다.”

“그래, 어차피 오래 있을 생각은 없으니 그냥 본토에 있으라고 할 생각이다, 1~2년 내에는 돌아갈 수 있겠지. 어머니가 잘 돌봐 주실 거고.”

그래도 첫 자식인데 태어나는 걸 봐주지 못한다는 게 맘에 걸리기는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첫 단추인 만큼 중요한 일이고, 나 외에 현 상황의 얼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서다.

앵글로색슨 계통의 공통점이라고 생각되는 게 문화상대주의라는 게 아주 쥐뿔도 없다.

이래서야 도와주러 들어갔어도 반감만 사기 딱 좋지.

그래도 썩 내키는 일은 아니다만........

나는 나도 모르게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

3개월 전, 런던.

“자네의 보직이 정해졌네.”

외무장관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 눈을 마주보았다.

“어디입니까?”

“베트남으로 가게.”

“베트남입니까.”

“그래, 베트남, 프랑스가 드디어 베트남에 대해 본격적인 야욕을 드러냈네. 그쪽이 제일 급해.”

“지원은 어떻게 됐습니까?”

“자네가 요청한 사안은 전부 승인되었네, 무기와 물자는 인도로 수송될 거고, 동인도회사에도 최대한의 협조를 지시한 바 있네, 다만 군사고문단의 편성은 인도 현지에서 해야 할 걸세.”

“구르카 용병들을 고용하고 싶습니다만.....”

“그렇게 하게, 조약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는 극동함대 역시 최대한의 협조를 할 걸세, 내각에서도 이번 일을 제법 진지하게 추진하고 있으니까. 세포이, 극동함대, 할 수 있는 만큼 마음껏 동원해보게나.”

“감사합니다.”

“우선 베트남 현지의 상황을 설명해주겠네, 얼마 전, 베트남에서 프랑스 선교사와 가톨릭 신자 다수가 참수당했네. 현재 프랑스와의 수교를 파기했고, 미국의 국교 수립 요청도 거부된 상태네.”

“프랑스가 가만히 있었습니까?”

“그럴 리가, 불과 얼마 전 프랑스 극동함대가 체포된 프랑스 선교사의 석방과 처형된 선교사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면서 대대적인 무력시위를 했네, 그런데 극동함대는 선교사가 석방된 뒤 일시적으로 항구를 떠났다가 베트남 해군의 군항을 습격, 초토화했다는군, 이 때문에 민망 황제가 격분했네. 개구리 놈들이 대체 어떤 이유로 그런 식으로 아주 당당하게 깽판을 쳤는지 모르겠네만.”

“그렇다면 아예 유럽인 자체에 대한 반발심리가 결코 적지 않을 겁니다.”

저놈들이 프랑스인, 영국인 가려가면서 혐오하진 않을 거 아냐. 싹 다 양이일 텐데.

“뭐,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게 해야지, 명분이 있거나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준이 아니면 적당한 무력시위를 해도 되네, 정당방위라는 명분도 좋겠지.”

나는 씩 웃었다.

“정당방위 좋죠.”

음, 총알 한 발이나 화살 한 대가 날아오면 포격을 퍼부어 해안을 초토화시켜도 정당방위 맞잖아?

“그래도 프랑스에 책잡히지 않게 조심하게나, 명분 없는 움직임은 안 돼. 우리가 제안한 조약을 우리가 깬다는 인상을 줘서는 안 되니까.”

“물론입니다.”

***

생각에 잠긴 주인을 바라보며, 라일라는 얼마 전을 회상했다.

주인마님께서 인도차이나로 가신다는 도련님에게 자신을 데려가라고 강권하신 건 그녀 스스로도 놀랄 일이었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납득은 갔다.

마님은 언제나 도련님을 걱정하셨으니까.

아니, 도련님이라고 불렀지만, 더 이상은 도련님이라 부르면 안 된다.

‘주인님.’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셨으니까.

포기하는 게 맞다.

이미 본국에 임신한 아내가 있으시지 않은가. 큰마님이 산달이 될 때까지, 그리고 그 뒤에도 도움을 주시기 위해서 하인들을 다 끌고 주인님의 집에 들어가 계시지 않은가.

하지만 주인님을 인도차이나에서도 보좌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잠시 옳지 않은 생각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원한다. 하지만 옳지 않다.

바르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어떨까. 만약, 정말 만약, 그럴 상황이 온다면.

그러면....

“라일라.”

“앗!”

깜짝 놀라 펄쩍 뛴 라일라는 크게 휘청했다.

즉시 젠티안 자작이 그녀를 낚아채서 바닥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는 다급하게 떨어져서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정신이 없겠지, 어머니도 참 너무 걱정이 많으셔서 문제야.”

“..... 주인님을 사랑하시는 겁니다.”

“그래, 그건 나도 알아. 아는데 그렇다고 배 한 번 안 타본 애를 굳이 힘들게 딸려보낼 것까지는 없다 이거지, 너도 런던에 있는 게 낫지 않았겠어? 당장 인도차이나에 황열에 말라리아에... 문제가 많은데 말이지.”

인도네시아에서 제충국이라도 구해야 하나, 아니면 계피? 수정과를 마시면 모기가 안 덤빈다던데, 근데 수정과 어떻게 만들지? 조선 가서 구해와야 하나?

“라일라, 너도 도착하면 계피 좀 먹어둬라. 물은 꼭 끓여마시고.”

마침 산지기도 하겠다 제충국이나 계피 구하기는 쉽겠네. 매일 저녁 수정과 넉넉하게 마셔두면 모기가 안 덤비니까. 계피를 뭐 주머니에 담아서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하나.

‘질병이 제일 무서워.’

모기 하나 물렸다가 훅가고, 물 잘못 마셨다가 훅 갈 수 있는 전근대, 어설픈 놈은 살아남을 수 없다 뭐 이런 거냐.

“아무튼 바람 너무 맞지 말고 선실로 들어가, 나도 곧 들어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라일라가 선실로 사라지자, 나는 베트남에 대한 서류들을 읽었다.

‘경제 파탄, 식량 부족, 기아, 역병, 각종 자연재해, 반란.... 대단하군.’

프랑스 선교사를 살을 집게로 뜯어 죽이는 능지형에 처하고, 다른 선교사는 참수하고 시체를 토막냈다. 이러니 프랑스가 작정하고 항구를 불바다로 만들지.

‘베트남 내 가톨릭 신도는 이미 수십만, 지배층은 이들이 반란 세력화하는 것을 우려해 가톨릭 확산을 막고자 하고 있지만, 역풍만 불고 있고, 반란 세력은 레 왕조 복고세력, 무슬림, 소수민족 등등 차고 넘치는군.’

이거, 생각보다 일이 쉬울 수도 있겠다.

“뭄바이항에 정박하면 동양함대 사령부부터 찾아가야겠군.”

***

인도, 뭄바이.

동양함대 사령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동양함대가 해줘야 할 일은 베트남을 압박하는 게 아니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말이오.”

“...... 그게 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공사님?”

“간단하오, 조선을 개항시키시오. 그리고, 조선에서 찾아야 할 사람이 있소...... 난 매독 안 걸렸으니 걱정 마시오, 내 정신은 멀쩡하니.”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좋소, 우선 베트남의 역사부터 설명해야겠지. 수백 년 전, 베트남에는 리 왕조라는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소, 이 리 왕조는 아직도 수많은 베트남인들에게 전설적인 군주들로 추앙받고 있소, 쿠데타로 멸망하고, 황족들이 멸족하기 전까지는 말이오.”

“... 뭐 그렇다고 치겠습니다.”

“잉글랜드로 치면 원탁의 기사단을 가진 아서 왕이나 엘리자베스 여왕 폐하 정도의 전설적인 왕조였다고 생각하면 편하오.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의 통일했었고, 중국과 정면대결을 벌여서 비등한 수준의 싸움까지 벌였으니, 아무튼 이 왕조는 반역으로 인해 공식적으로는 멸족했으나, 생존한 사람이 있소, 당시 황태자, 이용상이 살아서 달아났거든. 조선, 당시에는 고려로 말이오.”

“그 후손들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살고 있소, 아직 그 계보가 끊기지 않았지.”

나는 지도를 펼쳤다.

“물론 우리가 그걸 명분으로 밀고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베트남 내부 세력과의 거래에는 충분한 일이오.”

“베트남 내부 세력....입니까?”

“지금 베트남의 상태, 별로 좋지 않을 텐데 말이오?”

“어마어마한 규모의 반란이 지난 몇 년 간 세 차례나 일어났으니, 빈말로도 좋다고 하기에는 어렵긴 합니다.”

“그렇지. 그럼 프랑스의 만행에 대해서는 불만을 품었지만, 그래도 개화는 필요하다고 믿는 세력들, 있지 않겠소?”

현 베트남 정권과는 협상의 가망이 없다.

유교를 기반으로 한 이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일 생각도 없고, 개화를 시도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러니까 식민지가 됐겠지.

그러니까 엎어버린다.

리 왕조를 부활시킨다는 명목으로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이들을 배후에서 지원한다. 이들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켜 당당하게 쳐들어온 프랑스군을 격멸시키면 상황 종료.

“그러니까 시간이 없소, 프랑스가 완전히 준비를 마치기 전에 베트남의 정권을 엎어버려야 하니 말이오.”

“그래서 개항을 시켜야 한다는 말이군요.”

“개항을 시켜서 조선 내에서 활동의 자유를 얻어낸 뒤 화산 이씨를, 이용상의 후손을 찾으시오, 족보도 같이. 그 족보와 후손을 함께 손에 넣어야만 의미가 있으니.”

이미 응우옌 왕조는 민심을 잃었다.

사방팔방에서 반란이 줄줄이 터져나오고, 자연재해와 질병과 기근이 괜히 벌어지고 있겠는가.

인구는 느는데 사회의 생산성이 전혀 늘어나지 않은 탓이다. 그런데도 보수적인 왕가는 달팽이처럼 제 껍데기 안에 틀어박혀서 쇄국정책이나 펴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식민지를 만들려고 한다면 쇄국정책을 펴는 건 오히려 고마운 일이지만, 우리는 저놈들을 근대화시켜서 프랑스의 엉덩이를 걷어차줘야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까 두들겨서 깨워줘야 하지 않겠는가.

“조선도 어지간해서는 순순히 문을 열지 않을 거요, 그러니까 지상군도, 군함도, 물자도 넉넉히 준비해서 함대를 출항시키시오. 국왕을 위압해서, 무력을 써서라도 개항장을 받아내란 말이오. 어차피 조선과 일본, 중국은 조약에서 누군가의 몫으로 지정된 바 없으니 무슨 짓을 벌여도 빈 협약 위반은 아니오.”

“알겠습니다. 그럼 공사님은......”

“나는 로열 네이비가 그들을 찾아오는 동안 베트남 내부 파벌들 중 대영제국과 손잡기 가장 적절한 이들을 물색하고 있겠소. 필요하다면 내가 직접 가서 만나야겠지.”

시간이 없다. 정말로.

이미 역사는 틀어질 대로 틀어졌고, 언제 대규모 원정 준비를 프랑스가 시작할지 모른다. 지금이야 극동함대를 이용해 좀 찔러보는 수준이지만.

그러니 베트남이 군대라도 제대로 갖추게 시켜야 한다. 최소한 단기결전이라도 벌일 능력이 되게끔.

그렇게 성공해서, 런던으로 금의환향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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