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3)
런던, 외무성.
“보고하게.”
“소총 약 20만여 정의 물량을 비밀리에 확보했으며, 100만 정까지도 늘릴 수 있습니다.”
“나는 그 정도까지 무기를 확보해야 할지는 조금 회의적이네만......”
“아시아는 우리보다 훨씬 인구가 많습니다. 장관님, 저기에서는 수만 명이 동원된 충돌이 국지전인 동네입니다. 한 국가의 군대를 완전무장시키자면 최소가 10만 정 내외로 필요합니다. 인도 아대륙 전체의 인구를 다 합해도 중국의 인구보다 수가 적을 겁니다. 인도차이나 역시 결코 인구가 적은 동네가 아니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산이 넘쳐나는 게 아니지 않나.”
“전쟁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싸게 먹힐 겁니다.”
“인도차이나부터 시작해서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와 접촉하는 건가?”
“아닙니다, 반드시 모든 국가를 장악할 필요는 없습니다. 몇몇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국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현지 외무성 인원들이 수집해오는 정보들을 종합하고 계속해서 가치평가를 해나가야 하겠으니, 현지 상황에 따라서 큰 틀을 유지하는 선에서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런던에 앉아서 모든 상황을 알 수는 없으니, 현지 공사관 등에서 수집해오는 정보를 통해서 상황판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나.
물론 그 판단은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실행도 내가 할 일은 없겠지, 이 정도면 나도 충분히 일했잖은가.
적어도 이번 안건이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통과되면서부터 내 외무성 내의 입지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졌으니까........
“그럼 언제쯤 출발할 건가?”
“.....예?”
“자네가 낸 안건이네, 자네가 끝까지 맡아 처리해야지. 공사 권한이면 일을 진행시키는 데 충분하지 않겠나? 아시아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이해도도 높지 않나.”
“...........”
그러니까.
지금 저더러 아시아에 가라굽쇼?
“아 물론 당장 가라는 건 아니네, 일단 내각 승인을 받기는 했지만 최종적으로 의회를 통과해서 특별예산이 배정될 때까지 시간도 필요하고, 자네가 공사로 임명되려면 현직 공사 임기가 끝나거나 해야 하니까. 어느 나라로 보내든 간에 아직 시간이 최소한 수 개월에서 수 년 정도 남았네.”
“의회 통과가 제법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습니까?”
“그렇네, 특히 이번에 보수당에서 탈당한 인원들이 자유당을 새로 창당해버린 탓에 의회가 제법 혼란스러워.”
자유당.
다행히 하나는 제자리를 찾았다. 글래드스턴이 탈당해서 자유당의 창립 멤버가 된 거다.
근데 그거 하나 가지고 안도의 한숨 내쉬기에는 이미 저질러놓은 짓이 많다.
“그럼........”
“일단 준비만 하고 있게, 정확한 보직은 추후에 결정될 테고, 부임 시기도 그때 가서 결정될 테니까, 다만 아시아 쪽으로 발령날 거고, 자작의 명예에 부끄럽지 않은 직책이 배정될 것, 이 둘 만은 확실하네.”
“...... 예, 알겠습니다.”
***
미치겠다.
아니, 아시아 쪽에 제대로 된 정보통이 없으니 내가 가라고? 나도 공식적으로는 아시아 쪽에는 연고가 없다는 건 똑같다는 걸 모르나?
아니, 생각해 보니 귀족 중에 아시아 쪽에 연고 있는 사람 찾는 게 더 힘들겠구나.
‘아시아. 아시아라.’
발령나면 어느 쪽이지? 조선......은 벌써 개항했을 리가 없고, 청나라가 이 시기에 개항을 했던가. 무역은 해도 공사관 설치는 없지 않았던가? 그럼 어딘지 짐작이 안 가는데, 일본인가? 근데 일본이 흑선내항을 이 시기에 했던가?
아니지, 가게 된다면 인도차이나가 우선이겠구나. 프랑스가 거기를 노리고 있으니.
‘말라리아 대비 철저히 하고 가야겠네. 키니네라도 구해서 가야 하나.’
인도에서 근무할 수 있으면 차라리 좋겠지만, 거긴 적어도 인프라가 그럭저럭 되어 있을 테니까.
근데 키니네가 무슨 나무 수액이었지?
***
“크루프 사에서 주문했던 야포 200문이 러시아로 들어갔습니다. 러시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항구를 이용해 벨파스트로 수송할 예정입니다.”
“스위스에서 주문한 라이플들 초도분량 8천 정이 런던 외곽의 창고에 도착했습니다. 현재.....”
정신없는 보고의 홍수, 자료를 뒤적이던 나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왕립 연구소에 다녀오겠네.”
“예?”
“면담 일정이 잡혀 있어서 말이네.”
이번 인물은 매우 유명한 사람이다.
아니, 이미 매우 유명한 인물과 결혼한 입장이긴 하지만, 아무튼 지금도 유명하고, 앞으로도 유명할 인물이다.
“그, 누구랑 면담하신다고 기록해야 합니까?”
“왕립 연구소 주임, 마이클 패러데이.”
“자작님, 안녕하십니까. 책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대영제국 최고의 천재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드워드 젠티안입니다.”
“하하하... 너무 띄워주시는 것 아닙니까? 자작님도 유명세로만 보면 제게 뒤지지 않으시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어차피 제 얼굴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제 이름 말하고 다니지 않으면 문장 있는 마차를 타고 다녀도 그냥 귀족인갑다 하죠.”
“그건 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무튼 이번 신작은 굉장히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저도 애독자입니다. 실험하다가 잠시 쉴 때면 읽곤 하죠.”
“겸사겸사 책이 두꺼우니 실험할 때 받침대로도 유용하지 않겠습니까? 책이 튼튼하니까요.”
“하하하하하하!”
기분 좋게 웃은 패러데이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전기분해 실험에 대해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 네.”
패러데이의 표정이 살짝 흐릿해졌다.
그야 세계 최초의 전기분해가 패러데이의 스승이지만, 지금은 차라리 남남이라 할 만큼 관계가 나쁜, 패러데이 이전 최고의 과학자 험프리 데이비의 작품이니까.
애초에 패러데이의 커리어가 험프리 데이비의 강연을 듣고 그의 조수 자리를 구하는 데 성공한 데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험프리 데이비는 자신의 모든 업적보다 패러데이의 발굴 자체가 더 높게 평가받는 것에 분개해 패러데이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논문에 맘대로 손을 대는가 하면 패러데이의 작품을 자기 것을 훔쳤다고 주장한다거나.
‘꼴사나운 질투지.’
왕립학회에 패러데이가 서른의 나이로 들어갈 때 나온 유일한 반대표가 험프리 데이비의 것이라는 건 이미 정설일 정도다. 물론 패러데이가 스승의 괴롭힘에 뭔가 보복하거나 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면 감정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그 전기분해를 통해 만들어내는 물질이 좀 대규모로 필요할 듯 합니다.”
“예? 정부의 업무입니까?”
“예, 정부의 업무입니다. 증기기관을 이용해 전기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시설과, 그 시설로 소금물을 분해할 수 있는 시설, 그리고 거기에서 산출되는 염소를 포집해 액화해 운반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합니다. 패러데이 박사님이 염소 액화를 최근 연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염소를 이용하는 목적을 혹시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알려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예산은 충분히 지급될 것이며, 예산이 허용하는 한 정부 차원에서의 보상도 있을 것입니다.”
“...........”
염소를 사용하는 목적?
뻔한 게 아닌가.
“박사님, 거절하셔도 됩니다. 제 명예를 걸고 맹세코 거절하신다고 해도 박사님께는 어떤 불이익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박사님의 애국심에 부탁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 알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약속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말씀해주십시오.”
“염소는 강한 자극성..... 아니, 냉정히 말해 독성을 가지고 있는 물질입니다. 정부가 어째서 그렇게 많은 액화 염소를 필요로 하는지는 제게 알려드릴 수 없다고 하셨죠, 하지만 만일 그 가스가 대기 중에 누출된다면 수많은 이들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패러데이 박사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본인이 연구한 기체의 성질을 모를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패러데이는 그게 어떤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바로 눈치챘으리라.
“네. 그럴 겁니다.”
“그리고, 군사용으로도 이용이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 예, 그렇습니다.”
“그 목적, 군사용입니까?”
“.......”
거짓말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실험물이 악용되는 것에 패러데이가 분개해 도움을 거부할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전기의 대량생산을 할 능력, 그리고 염소의 액화 기술을 가진 패러데이가 없으면 가스 개발은 한참 늦어지리라.
그러나,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위인을 상대로 해서가 아니다.
그냥, 저 선량한 사람을 거짓말로 안심시키고 싶지 않았다.
“높은 확률로 그럴 겁니다.”
“..... 그렇군요.”
패러데이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아까 말했듯이, 한 가지만 약속해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선이라면.......”
“자작님, 자작님은 젊으십니다. 그리고 젊으면서도 집안도 좋으시고, 재산도 있으시죠.”
저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 바닥에서부터 여기까지, 다시 여기에서 세계 과학계의 정점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남자가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자작님이 제 나이가 되었을 때에는 의회에 계시겠죠? 그것도 단지 한 명의 의원으로 끝나지는 않고, 더 높은 자리도 충분히 노리실 수 있을 겁니다.”
“.... 그렇겠죠.”
“그렇다면, 자작님은 후일 이 나라의 대외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때 제 부탁을 기억해주십시오, 그걸 개발하고, 배치하더라도, 최대한 사람을 상대로 사용할 일이 실제로 벌어지게 놔주지는 말아주십시오, 그저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이게 제 부탁입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패러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도와드리죠.”
“....... 해주시는 겁니까.”
“하나 여쭙겠습니다. 제가 없다고 해서 염소 가스를 이 나라가 무기화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 당장 염소가 아니라 시안화카코딜이라는 화학무기가 크림 전쟁에 최초로 실전투입되었었다. 염소 가스가 아니라도, 패러데이가 아니라도 화학무기는 반드시 만들어진다, 만들어져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리라.
“그럴 리는 없겠죠.”
“이 나라에 과학자가 저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니, 결국 어떻게 되든 이 나라가 결심만 하면 그런 무기를 손에 넣을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작님께 약속이라도 받아두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자작님께는 무리한 부탁을 드린 셈이 되었습니다만.”
죄책감이 피어올라 가슴을 쿡쿡 쑤시는 느낌이었지만, 표정을 관리했다.
“전쟁이 없으면 그게 사람을 죽일 일도 없을 테니까. 그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박사님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건......”
“괜찮습니다. 제 명예보다도, 누군가의 노력이 더 가치 있을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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