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몰락귀족-29화 (29/60)

신질서(5)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빛이 쏟아져들어왔다.

정오가 가까운 성당은 수많은 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중 태반은 나 역시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었지만, 그래도 아는 얼굴이 드문드문 있었다.

제법 앞쪽에 앉아 있던 브루넬이 눈인사를 건넸고, 초대를 하니까 진짜 와 준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턴이 같이 앉아 있었는데..... 뭔 일이 있었는지 얼핏 봐도 둘 사이의 냉기가 심상찮다. 여기가 결혼식장만 아니었으면 이미 한바탕 큰소리가 오갔을 거라고 온몸으로 시위하는 모양새인 두 의원에서 시선을 돌리자, 저 앞에 앉아 있는 신부 측 가족들, 그리고 어머니와 어머니 곁에 앉아 있는 라일라, 그리고 연단에서 주례를 서기 위해 있는 신부(神父), 그리고 오늘의 신부(新婦)가 보였다.

흰 드레스를 입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화사한 옷에 아름다운 미모.

원 역사의 그녀와는 많이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다.

그녀는 내 신부고, 나는 그녀의 신랑이다.

사랑이 아니라 두 가문 간의 계약에 가까운, 그리고 나와 그녀 사이의 거래에 더 가까운 결혼이라지만, 그렇다고 해도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뒤, 나와 그녀가 나란히 서자 연단에 서 있던 신부가 입을 열었다.

“에드워드 젠티안 자작, 주님의 앞에서 한 점 거짓 없이 맹세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대는 플로렌스 양을 아내로 맞아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그녀를 남편으로써 보호하고, 그녀와 믿음과 사랑을 나누어 화목한 가정을 이룰 것을 맹세합니까?”

나는 아주 잠시, 잠깐 뜸을 들였다.

이 순간이 지나면 법적으로도, 그리고

“예.”

“플로렌스 양, 주님 앞에 한 점 거짓 없이 맹세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는 젠티안 자작을 남편으로 맞이해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남편을 존중하고 신뢰하며, 남편만을 사랑하며 화목한 가정을 이룰 것을 맹세합니까?”

“예.”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두 사람이 주님 앞에 화합하여 하나의 가족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

나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가면서도, 아까의 짧은 말미 동안 나눈 대화를 회상했다.

‘전 제 의지로 이 결혼을 선택했어요, 하지만 후회하지 않게 해 줘요.’

‘저 동방에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지, 당신이 사람들을 돕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면, 혼자서 노력하는 것보다는 둘이서 노력하는 게 낫지 않을까.’

‘믿을게요. 그러니 그저 제가 후회하지만은 않게........’

‘당신을 위한 기회는 반드시 찾아올 거야, 당신은 그냥 내 아내라는 이름만으로 끝날 사람이 아냐, 어쩌면 미래에는 당신이 나보다 더 유명해질지도 모르지. 백의의 천사.’

내가 어릴 적에 셜록 홈즈 작가가 아서 코난 도일이란 건 몰랐어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위인전에서 읽었다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지만, 그저 농담인 줄 알았는지 플로렌스는, 이제 플로렌스 젠티안 부인이 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그녀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물론, 나도 빈말로 넘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랑이나 애정이 있든 없든, 그녀의 능력은 도저히 썩히고 싶지 않을 만큼 출중하니까. 크림 전쟁은 없더라도, 내 돈을 털어서라도 병원은 한 채 지어줄 생각이다.

물론 나이팅게일은 의사가 아니라 간호사지만...... 그러고 보니 의사도 좀 위생 신경쓰는 사람으로 넣고, 제멜바이스 그 양반이 몇 년생이지?

아무튼, 최소한 내 건강을 믿고 맡길 만한 병원을 만들고 그녀에게 재량권을 최대한 줄 생각이다.

간호학의 효시이자, 현대 의학의 효시가 될, 천 년이 지나도 불멸의 이름을 의학사에 새길 만한 병원을.

수많은 편견과 압력에 맞서 외로운 투쟁을 이어가야 했던 그녀에게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고, 그녀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후원자가 붙는다면, 그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20년 내로 알게 될 터였다..

‘나이팅게일이란 성도 사실 듣기 좋은데, 미들네임으로라도 남겨놓으라고 권할 걸 그랬나.’

잠시 딴 생각을 하는 동안, 아는 얼굴 둘이 다가왔다.

빅토리아 시대 신사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모습을 하고 온 두 남자, 대영제국 현역 초선 하원의원이자 미래의 수상들이 내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네러 왔던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제게 지론이 있다면, 결혼이란 무덤에 들어가는 어리석은 짓이란 거긴 합니다만.... 그러니 제 축하 인사는 1년 후로 미뤄두죠.”

글래드스턴은 밝게 웃으며 말하고, 디즈레일리는 농담조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물론 표정 관리를 잘 한 것일 뿐일 뿐, 이미 밖에서 거하게 다툰 게 분명한 두 사람의 팽팽한 분위기를 보면 아마도..... 상대가 면전에 있는 것만 아니면 나랑 쌍욕이 적절히 버무려진 뒷담화를 시작했을 분위기이긴 한데.

근데 디즈레일리가 저런 농담도 하긴 하는구만, 그러고 보니 저 양반은 결혼 아직 안 했던가. 뭔가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유부남의 애환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근데 저 양반 불륜하다가 깨진 걸로 아는데.’

프렌시스 사익스 경의 아내인 헨리에타 사익스였나? 아예 본인 경험담을 책으로 써서 출판까지 했더만? 난 안 읽어봤지만 내용은 대충 안다, 근데 또 깨졌고, 그것도 몇 년 전 얘기다.

원래 불륜으로 맺어진 커플은 99.999% 확률로 깨진다고 어디서 들었던 거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다. 하여튼.

물론 나 역시 그걸 면전에서 지적할 만큼 경우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누가 압니까, 제가 내년에는 디즈레일리 의원님의 결혼식장에서 웃고 있을지.”

“제가요? 하하하!”

아니, 내가 알기로는 저 양반 결혼을 하기는 한다고 아는데? 돈 때문에 결혼한 거긴 하지만 결혼한 뒤에 서로를 사랑하게 됐다던가? 암튼 나도 나름 주워들은 게 있긴 했는데......

하긴 역사가 이렇게 틀어진 마당에 저 양반이 평생 독신으로 산다고 해도 이상한 건 아니겠지.....만 만약에 결혼 한다고 하면 쫒아가서 꼭 놀려먹어줄 테다.

“그나저나 이번에 외무성으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알고 계시는군요.”

“이번 조약에 대해서는 관심이 저도 제법 있으니까요, 물론 자작님이 외무성으로 들어가신다는 걸 안 것은 우연에 가까웠습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이들이 그... 자작님이 강론하시던 선각자의 의무를 얼마나 지킬지 저는 우려스럽습니다. 식민지로 만들어서 착취하려는 의도가 너무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심지어 이번 조약이 체결되면 대영제국은 국가적인 수단으로든 아니면 민간 수단으로든 해당 지역에 대한 어떠한 구호나 인도적 의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글래드스턴이 딱 글래드스턴이 할 만한 소리를 하자 곧장 디즈레일리가 반박해 들어갔다.

“글래드스턴 의원, 그건 중요하지 않네, 자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국가는 자선단체가 아니지 않나, 그리고 문명 개화를 하는 데에 수업료를 받지 말라고 하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그 수업을 거부할 수도 없는데 수업료는 집안의 기둥 뿌리까지 뽑아내려 든다면 어쩌겠습니까?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도의적 안전장치가 타국의 개입 가능성인데.......”

“타국의 개입을 허용한다면 남는 건 전쟁뿐이네, 자네는 그토록 전쟁이 하고 싶나?”

글래드스턴과 전쟁광이라는 이미지만큼 안 맞는 것도 드문데. 무슨 선진병영 일본군 같은 느낌?

내가 봐도 글래드스턴은 기가 차서 도저히 말이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디즈레일리가 비약이 좀 심하긴 했어.

그러니 호스트로써 좀 중재를 해야지.

“크흠, 좋은 날에 이렇게 다투시는 것도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싸우는 건 의회에서 하는 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다들 식사라도 하시죠.”

***

빈, 쉰브룬궁 내 신성동맹 회담장.

글래드스턴의 희망사항과는 다르게, 디즈레일리가 기대하는 방향 그대로 회담은 굴러가고 있었다.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땅따먹기.

“프랑스령 알제리를 보장해 달라는 요구는 과도한 것 같군요.”

전쟁을 일으켜놓고, 또 참패한 주제에.

“알제리를 프랑스가 정복, 아니, 정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해안지대 몇 곳만 간신히 발 걸친 건데 그걸 정복이라고 하면 조금 그렇지 않겠습니까.”

“뭐, 아무튼 프랑스가 알제리로 진출한 지 10년도 안 되지 않았습니까? 그나마도 식민지를 정식으로 설치한 게 아니라 해적 토벌이 명분이었죠. 즉 프랑스 정부가 알제리에 계속 발을 붙이고 있을 명분은..... 솔직히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좋게 말로 할 때 알제리에서 손 떼고 나가시지.

“우리 러시아 제국은 유럽의 열강으로써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우선 지중해의 해적 억제를 위해 흑해함대에서 병력과 군함을 차출, 지중해 함대를 창설할 예정입니다. 이에 대해 영국의 협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레이트 브리튼은 우방 러시아를 위해 군항의 공동사용과 군사고문단 파견, 군함의 수출을......”

지들끼리 잘도 물고 빨고 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프로이센 대표와 오스트리아 제국 대표는 암흑 대륙(=아프리카를 유럽에서 19세기경에 지칭하던 말)의 어디쯤에 식민지를 놔야 경영하기 편할지를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괜히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갈라먹을 범위를 다 정해놓고 갈라먹자는 논리.

영국은 이미 인도에 깃발을 꽃아놓고 있었고, 러시아는 곧장 인도로 이어지는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 등을 선점했다.

원 역사대로라면 영국이 거품을 물고 뒤집어졌어야 할 부분이었지만, 오히려 영국은 러시아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두 나라는 조만간 동군연합으로 한데 묶일 상황이었으니까.

오히려 영국 정부는 러시아와 함께 과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그랬듯이 단순한 동군연합을 넘어 두 나라를 통합하려는 구상까지 진행하고 있었으니 더더욱 러시아의 식민지 개척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러시아가 대놓고 아프리카에 숟가락질을 시도할 때 거들기까지 했다.

즉, 저 둘은 이제 명백한 한 패였다.

아직 공주가 왕위를 물려받지도, 황태자와 결혼하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저만큼 일심동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본 타국 외교관들의 표정은 가면 갈수록 좋지 않아졌고, 결국 분위기는 영국과 러시아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프랑스가 은근히 견제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역시 최소한의 입지는 가져갈 수 있엇다.

물론, 그것이 프랑스가 만족할 만큼이냐고 물으면 결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단지 힘이 없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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