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질서(4)
난 결혼식 날까지 신부를 보지 못했다.
21세기에 결혼하는 남녀가 밤낮 안 가리고 붙어다닐 확률이 높은 것과는 제법 대조적이다.
물론 정략혼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혼 준비 자체에 간섭을 못하다시피 하는 건 좀..........
“그건 백작부인께서 극성이신 게 맞는 거 같습니다만.”
한참 웃어댄 브루넬은 보틀쉽을 만지작거렸다.
“조만간 진수식을 할 겁니다.”
무엇의 진수식인지는 뻔했다.
“그레이트 웨스턴.”
“그레이트 웨스턴이 성공하면, 바로 다음 작품에 들어갈 겁니다.”
“그레이트 브리튼과 그레이트 이스턴이었지?”
“그렇습니다.”
그레이트 웨스턴보다 한층 더 뛰어나게, 진보적으로 설계된 증기선.
그레이트 웨스턴은 목제지만, 그레이트 브리튼부터는 전금속제로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내 견해네만, 군에 납품할 생각이 있으면 기존 전열함이나 프리깃을 개조해 실을 수 있는 증기기관을 규격화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걸세. 군은 기존 전열함을 버리기 싫어할 테니 말이야.”
“그건 기술자로써의 제안입니까 아니면.....”
“투자자로써 하는 소리네.”
“알겠습니다.”
사장 위에 대주주 있다는 것은 주식회사가 나온 이래의 진리였다.
나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작은 브루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면 이번에 추가 투자금은 조금 넉넉하게 기대해 봐도 되겠습니까?”
“그레이트 브리튼을 얼마나 더 번쩍거리게 만들 생각인가?”
“배수량 2만 톤 정도를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선체는 2중 강철로, 외륜과 스크류를 모두 쓰고, 돛은 6개, 엔진은 4개를 달 겁니다. 속도는 15노트가 목표고 말입니다.”
“거 참.”
“자작님이 제게 아이디어를 한가득 안겨주셔놓고 빼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아니, 내 말은..... 너무 크지 않나. 여객선으로만 쓰기에는?”
적자날 거 같은데.
“그레이트 웨스턴을 일정에 맞게 진수시키는 거나 걱정하게. 아차하다가 따라잡히면 큰일 아닌가.”
무슨 지금 쓰는 거 완결도 안 났는데 차기작 끼적이는 작가도 아니고.
“이미 거의 다 끝났습니다. 어차피 기관의 시험 가동 정도만 해보면 끝이니 제가 더 개입할 일도 없고요.”
제작자가 탑승하는 거 아니냐고 물으려다가 당연히 기술을 갖춘 선원들이 있으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하기아 상용화하려면 당연히 기술을 갖춘 선원이 타겠지, 브루넬이 직접 몰고다니는 게 아닌 이상.
“그나저나 증기선 그거 군 납품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군에서는 좀 보수적이라서요.”
“외륜선이야 함선의 전투력 저하를 불러오니 그렇다 치겠는데 스크류를 쓰는 함선을 제시해봐도 그런가?”
“예, 저 개구리 놈들이 증기선 만들어서 배치하기라도 해야 화들짝 놀라서 사줄지 모르겠군요. 물론 그럴 돈이 있을까 의문입니다만.”
대부분의 사람의 생각이 일치한다.
현재 기술로 가능하지도 않고, 비용도 어마어마하게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프랑스 정부와 루이필리프는 어거지로 가능하다고 선전해대면서 댐을 쌓고 있다. 안 그러면 당장 지난 전쟁이 왜 일어났냐고-루이필리프가 아무리 여론에 떠밀려서 전쟁을 결정했다고 한들 뒤돌아보면 결국 책임질 사람은 본인이다-비난을 받고 최소가 권력을 잃고 퇴위, 최대 혁명을 직격타로 맞고 단두대행일 테니까.
그 비용은? 전부 국고에서 충당하고 있다.
농담이 아니라 완성이 되든 완성을 못 하고 포기하든 간에, 그 결과로 프랑스가 파산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 이 상황은 문자 그대로 치킨 게임이었다.
루이필리프가 권력을 잃거나-권력을 잃으면서 진실이 드러나든 진실을 알고 분노한 국민들이 루이필리프를 박살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프랑스가 파산하거나.
“그러니까 프랑스인들이 해군 증강에 돈을 쏟아부을 여유가 있을지는 의문이죠.”
“하지만 그건 봐야 아는 거네, 프랑스인들의 잠재력은 엄청나, 여기 있는 포도주만 해도 프랑스산 아닌가? 솔직히 말해 영국에서 영국산 와인을 마시는 사람은 웰즐리 공 혼자뿐일 걸세.”
웰즐리 공작의 식성은 특이하다......보다는 맛에 대한 개념이 다른 사람과 다른가 싶을 정도긴 하다. 얼마나 유명하냐면 개인적으로 친분도 없는 내가 다 알 정도니까.
“식재료만 해도 프랑스에서 수입한 게 대부분 아닌가? 프랑스인들이 정말 해낼지도 모르지.”
물론 그렇게 죽어라 댐을 만들어서 얻을 거라고는...... 쥐뿔도 없겠지만.
그래, 쥐뿔도 없다.
“물론 루이필리프가 댐을 짓는 시늉만 해도 안 될 건 없다지만.....”
글쎄다. 지금까지 상황 돌아가는 거 봐서는 루이필리프가 그런 선택을 할 거 같진 않다.
아니, 진지하게 따져보자, 루이필리프는 몇 년 시간 끌면 그만이 아니다. 임기제 대통령이 아니라는 말이다.
평생 해먹어야 하는 왕이고, 자기 아들에게 자리 물려줘야 하는 존재다.
지금 루이필리프가 60대였나. 60을 넘었던가 안 넘었던가 모르겠지만, 그래서 언제 가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라지만, 이건 왕정의 존속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문제다.
“보나파르트가 아직 프랑스 땅에서 숨쉬고 있으니까.”
나폴레옹 3세.
그 자가 있는 이상 루이필리프는 죽어도 눈 감고 못 죽을 거다. 자기 자식이 걱정될 판이니까. 심지어 나폴레옹 3세는 아직 젊다. 젊어도 엄청 젊다.
프랑스인들은 명백히 나폴레옹을 그리워한다.
괜히 영국과 러시아가 루이필리프를 쫓아내는 게 아니라 모가지를 붙여주고 이용하는 걸 택했겠는가. 루이필리프를 쫓아냈다가 보나파르트 황실이 귀환하는 감당 못 하는 사태를 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다.
물론 나폴레옹 3세의 군재는 처참한 수준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지금 시점에 그거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려나.
뭐, 내가 안다고 해서 써먹을 일이 있겠냐마는.
“그나저나, 외무성에 들어가신다고 하셨습니까?”
“아마 그렇게 될 것 같네.”
이미 거의 대부분의 절차는 처리되었지만, 아직 들어가지는 않았다.
“결혼하고 한 달쯤 뒤? 그쯤에 정식으로 들어가게 되겠지.”
아직 신혼여행이라는 개념은 딱히 없지만 그래도 결혼하고 나서는 얼마간 신혼을 즐기게 해준다는 개념은 서양에도 당연히 있다.
당장 결혼을 앞두고 있거나 신혼인 사람은 전쟁이 나도 합법적인 병역 면제 사유라고 구약성경에까지 적혀 있는데 신혼인데도 일을 하는 경우는, 특히 결혼하는 상대가 귀족가라면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자리는 정해지셨습니까?”
“뭐..... 우리 가문이랑 나이팅게일 집안 쪽의 체면이 있으니 말단은 아닐 거고, 적당히 교육을 시킨 뒤에 조그마한 나라 공사 정도로 내보내지 않겠나?”
프랑스 주재 공사, 러시아 주재 공사,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 등 주요 강대국들에 파견되는 공사면 상당한 요직이라서 아무한테나 주어질 수는 없지만, 독일 내 조그마한 소국들이라거나 어디 공국이라든가 같이 외교적으로도 중요도가 떨어지는 약소국으로 가는 공사면 적당히 신분 있는 귀족을 앉혀도 무방한 자리다.
더 나가서 동남아시아 같은 데까지 가면 아예 한직으로 분류해야 하는 자리고.
어차피 외교가에서는 어디 아시아로 가지 않는 한 다같이 프랑스어를 쓰니까 언어 문제도 그다지고, 유럽 기준으로도 다른 나라도 신분 있는 귀족이면 어차피 공들여 연줄 만들 것도 없이 몇 다리 건너면 친인척인지라.......
“바다 건너가실 일이 있으면 이 배를 타고 가셔도 좋겠군요.”
“응? 대서양 항해에 투입 안 하나?”
“원래는 대서양 항해에 투입할 예정이기는 합니다만, 시운전을 다른 나라까지 해볼 수도 있겠죠, 물론 최초의 대서양을 돛 없이 횡단한 기록을 양보할 일은 없겠으니 뉴욕까지는 한 번 다녀와야겠습니다만, 아, 말이 나와서 그렇습니다만, 혹시 그 진수식 때 부인께서 병을 깨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 부인? 자네가 아니라?”
“그...... 원래 상선은 선주의 부인이나 딸이 하잖습니까. 그런데 저희 회사는 주식회사 아닙니까?”
“사장은 자네 아닌가. 내가 대주주라지만......”
“뭐, 나름 신혼의 추억 정도 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시일이 대충 맞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흐음........”
“어차피 제 집사람은 어차피 배의 대모 노릇은 앞으로 할 기회가 많지 않겠습니까? 이번 배가 마지막도 아닐 거고 말입니다.”
“뭐.... 해봐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하네만 일단 내가 그쪽에 물어보고 알려주도록 하겠네, 나 혼자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애초에 진수식의 대모라는 게 딱히 준비가 필요한 건 아니지 않나?”
그냥 묶어놓은 밧줄을 끊어서 떨어지는 속도를 이용해 묶어놓은 병이 선체에 부딪혀 깨지게만 하면 된다. 도끼를 내리쳐서 밧줄을 끊을 최소한의 체력과 근력만 있으면 되는 거다.
애초에 배의 대모가 무슨 호적에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관습의 일부일 뿐이니 당연히 뭐 호적에 올리고 그런 것도 아니다.
“물론입니다. 진수 하루 전에만 알려주셔도 준비는 충분히 가능하니까 말입니다.”
“제안해준 건 고맙네, 좋은 추억 만들어주려고 자네가 마음 쓴 거라는 거 아니까.”
“고마우시면 투자 좀 더 팍팍 해주십시오.”
농담 섞어 말한 브루넬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외무성에 들어가시면 그 일 관련해서 움직이게 되시는 거 아닙니까?”
“그 일?”
“러시아 측의 제안으로 신성동맹 회의가 빈에서 열리기로 했지 않습니까.”
“무슨 회의 말인가?”
“뭐 아시아와 아프리카 관련 논의라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정말 모르셨습니까? 이쪽 업계에까지 들려올 정도면 파다하게 퍼진 이야기일 텐데 말입니다.”
“금시초문인데? 아시아와 아프리카?”
이 시대에 아시아와 아프리카 관련 국제적 논의면 아무리 생각해도 식민지 어떻게 갈라먹을지 논의하는 것밖에 생각 안 나는데, 그걸 전 유럽 국가들을 다 모아놓고 하겠다고?
‘이 인간들은 무슨 19세기판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라도 맺겠다는 건가?’
아니, 근데 이런 회의가..... 원 역사에 있었나? 비스마르크가 그 비슷한 거 했다고는 아는데 비스마르크가 지금 태어났던가.......? 아무튼 활동기는 아닐 텐데?
‘설마 이것도 내가 뭐 건든 건 아니겠지.’
아니, 글래드스턴이 뭐 이상한 걸 읽었는지는 몰라도 보수당에 들어간 것도 모자라서 더 이른 세계분할이라니, 아무리 내가 조금 조장한 감이 없지는 않다지만 너무 빨리 움직이는 거 아닌가?
설마 이 세계에서는 글래드스턴이 열렬하게 아편전쟁을 지지하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으음..... 그거 일정은 어떻게 되지?”
“아마 자작님 신혼 치르시고 나면 적당히 끝날 때쯤 되지 않겠습니까? 힘든 일은 다 끝났을 때 딱 자리잡으시겠군요.”
힘든 게 문제가 아니라 그럼 내가 이 조약에 관여할 틈이 없다는 소리잖아 이거. 근데 그렇다고 무리해서 상황을 비틀 수도 없고, 미치겠네 이거.
그러나, 내가 고민을 하든 말든 시간은 흘러갔고, 얼마 가지 않아 결혼식날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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