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질서(3)
디즈레일리와의 티타임이 끝난 뒤, 나는 글래드스턴과의 만남을 가졌다.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입니다.”
“에드워드 유진 젠티안입니다.”
“젠티안 자작님께서 조만간 결혼하실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 네, 그럴 예정입니다.”
“미리 축하드리겠습니다.”
“혹시 의원님도 식장에 와주시렵니까?”
“연락만 주시면 일정 비워놓고 가도록 하죠.”
기분 좋게 대화를 시작했지만, 얼마 안 가 대화가 시작되었다.
“생존을 위해 식민지를 개척해야 한다고 자작님은 주장하셨죠.”
“그렇습니다. 호주나 캐나다처럼, 세상에 빈 땅은 많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는 것도 알고 있죠.”
글래드스턴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자작님도 저들이 진화가 덜 된 인간이라 생각하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저들은 인간입니다. 인간이고, 인간이었으며, 앞으로도 인간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작님... 어떤 사람들의 견해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보다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누군가의 말을 자기 편할 대로만 해석하죠.”
“권위와 권력을 심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도덕이다. 합법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성을 송두리째 위협한다면, 우리는 불법을 통해서라도 싸워야 한다.”
“..........”
“늑대는 달을 보고 울지 않는다 22장의 내용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읽어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읽어봤습니다, 사실, 전 당신의 애독자이기도 하거든요.”
“그렇습니까.”
“개인적으로 홈즈는 언제 결혼하는지 묻고 싶더군요, 신부는 당연히 애들러 양이겠지요?”
“.............”
그거 계획 없었는데.
“아무튼, 이렇게 과격한 내용이 제 책에 있었다는 것에 조금 당황하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내용이 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대부분이 모를 겁니다. 짧게 스쳐지나가는 내용이고, 사실 이건 인용이긴 하지만 문맥을 무시하고 하는 인용이거든요.”
“...........”
“저는 그저 글을 썼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전쟁이 일어나더군요.”
“그게 자작님의 책임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제게 책임을 물을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 손에서 나오는 글이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리고 의원님 역시 그것을 염려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역사를 되돌아 보면, 문명과 문명 간의 접촉은 충돌과, 유혈을 수반했습니다. 현지인과 이주민의 충돌, 열강 간의 충돌까지도 말입니다.”
“평화롭게 두 세계가 맞닿은 사례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사실상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저는 간혹 인간의 본성이 전쟁과 이기심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감도 듭니다.”
“그 본성을 이겨내고 이성을 따르기에 인간인 것이이죠, 인간의 본성이 폭력과 유혈에 있다 한들, 그것을 이겨내어 문명을 구축한 것이 인간과 짐승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이성이 평화를 보장한다? 웃기는 소리다.
이성적으로 만들어진 계획에 따라 짜여진 학살공장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아직 없었으니 그런 말을 하겠지.
이성적으로 만들어진 강간공장을 알지 못하니 그런 말을 하겠지.
이성적으로 만들어진 민족말살계획을 모르니 그런 말을 하겠지.
이성은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더 높은 ‘효율’을 보장할 뿐.
“본론으로 돌아가면, 저는 그 식민지 개척의 과정에서 유혈이 발생하는 걸 우려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야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현지인들이 이성을 잃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섞어야죠.”
나는 무 자르듯 말했다.
“뒤섞어야 합니다.”
“뒤섞는다고 하셨습니까?”
“본래 가깝게 붙어 있는 국가들은 서로 원수지간인 법입니다. 서로를 침략하고, 침공하고, 서로 싸워나가죠, 그렇다면 그런 A국과 B국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국제회의를 통해서 A국과 B국을 ‘보호’하기로 결정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때 A국과 B국을 대영제국이 혼자 다 지배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다른 열강들이 불만을 품겠죠. 그러니 A국은 영국이, B국은 프랑스가 지배한다고 합시다. 그리고 인구압을 해소하기 위해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이 이주해서 지낸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럴 경우, B국을 지배하는 프랑스는 프랑스 정착민들과 B국의 주민들의 화합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음........”
“저희를, A국을 지배하는 영국을 적으로 만드는 겁니다. A국은 B의 국민들에게 증오의 대상이고, 프랑스인들이 영국인들을 좋아할 리 없죠. 그러니 프랑스는 B에게 영국과 A를 묶어서 하나의 적으로 과시하면, 프랑스는 자연스럽게 적의 적, 즉 아군이라 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보통 높은 확률로 적의 적은 또 다른 적이지만.
“반대로 저희는 프랑스와 B국을 A국에서 욕해야겠죠.”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증오가 심해져서 전쟁으로 번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 이성을 사용해서 양국 수뇌부가 전쟁까지는 가지 않도록 해야죠.”
물론 개소리다. 국민들의 열망을 무시하는 게 쉬웠으면 프랑스가 영국에게 선빵을 때렸겠냐.
이것과 그것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쟁을 결정하는 게 증오심에 가득찬 국민들을 상대해야 하는 A국 B국이 아닌, 유럽 대륙에 있는 영국과 프랑스가 그들의 목줄을 잡아놓고 선택을 내리게 된다는 점이다.
주인이 으르렁거리는 개의 목줄을 잡고 못 달려나가게 버티듯이.
하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그 수명을 다하면 그 지역은 반드시, 무조건적으로 피바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글래드스턴의 논리는, 아니, 더 나아가 이 시대 유럽의 논리는 여기에 대한 반박을 허용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립할 정도의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면 유럽 국가들이 그 목줄을 잡고 있는 동안 전쟁을 일으킬 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무조건적인 이성 제일주의의 폐혜다.
당장 결투에서 꽁무니를 빼는 게 왜 불명예인가, 공포라는 정념에 이성이 압도당했으니 명예롭지 못하다는 것 아닌가.
명예가 곧 이성이며, 이성이 곧 세상의 모든 선이고 진리인 이 시대에는 반박할 수 없는 논리다.
그들 스스로도 이성적이라고 부르기에는 극히 무리가 있음에도.
‘모순적인 자들.’
그러니, 글래드스턴이 이 허점 많은 논리를 납득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가치관이 다르니까.
19세기에 영국의 부유층의 자식으로 태어나 낙선 한 번 경험해보지 않고 의원직에 진출한 인물이 가진 가치관과, 역사의 온갖 사건들을 다 보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같을 수가 없으니까.
내 입장에서는 문제점이 차고 넘치지만, 글래드스턴이 보기에는 완벽한 논리처럼 보이는 것이다. 허점이 허점으로 보이지 않으니까.
“맞는 말씀이군요.”
“그렇기에, 대영제국은 식민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성적인 지도자들이 존재하는 한 말입니다.”
글래드스턴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었다.
“외무부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소문 참 빠르게 나는군요.”
“제가 뭔가 도와드릴 일이 있겠습니까?”
“적어도 지금은 없는 듯 합니다, 하지만 의원님의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
글래드스턴과의 만남은 디즈레일리보다 훨씬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그 대화에서 나는 한 가지를 느꼈다.
이 사람이 왜 원 역사에서 칭송을 받았을지언정 성공한 정치인이 될 수 없었는지를.
‘도덕 외교는, 이 시대에는 그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방식이다.’
그 뜻은 위대하다.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노블리제 오블리주를 세계 단위로 확대한 것이니까.
하지만 룰 브리타니아는 그러한 도덕 외교를 펼치기에는 생각보다 강고하지 못하다.
인간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저기 어디 미개인들이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문명을 가졌든 가지지 못하고 있든 간에 이성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적이라고 할지라도 그 이성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다.
이성이 감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말은 결국 헛소리다.
모든 것은 정도를 지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욕구가 없으면 발전이 멈추고 정체하다가 멸망하게 되지만, 욕구가 과하면 죄악이 발생한다.
칠죄종을 아는가?
일곱 가지 죄악, 교만, 탐욕, 질투, 분노, 음란, 인색, 나태.
그런데, 이들이 그 자체로 죄인가?
모든 사람이 나태하지 않다고 하자, 그렇다면 조금 더 편해지고 싶은 마음에 벌어지는 발명이 생겨나겠는가? 사람들이 며칠 더 쉬다가 느긋하게 출발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었으면 고속 이동 수단이 발명되었겠는가?
모든 사람이 순결하다면 자손을 번식할 수는 있는가?
모든 인물이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 누가 정의로운 분노로 불의를 막아서는가?
모든 이가 탐욕스럽지 않다면 세계의 발전은 불가능하다. 그 누가 열정을 가지겠는가.
그 누구도 질투하지 않는다면 한 지역의 발전은 다른 지역의 발전에 영향을 주기 어려우리라, 그러한 욕구가 없으니 경쟁도 없을 테니까.
겸손이 과하면 사람들이 무시하며, 지나친 절제는 구두쇠가 된다. 지나친 자선은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게 한다.
애초에 칠죄종에 대해서 가장 엄격한 교파조차 ‘그 자체로는 죄가 아니지만, 그것이 죄를 야기하게 되며, 일부러 그 상태에 머무는 것은 명백한 죄이지만 그런 유혹을 받는 자체만으로 죄라고 할 수는 없다.’라고 하는 걸로 안다. 애초에 유혹은 이겨내는 것이지 아예 안 받는 건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나.
아무튼, 이 이야기를 한 것은, 결국 ‘정도껏’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그 중심을 잘 잡고 외줄타기를 하듯이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넘어지지 않는 것. 그것이 죽음과 죄 사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행하는 좁은 길이다.
그것은 인간의 내적 투쟁이기도 하고, 동시에 사회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문제는, 19세기의 유럽 사회는 너무나도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외눈박이 세상에 두 눈 뜬 사람이 이상한 존재인 법, 그러니 일단은 나도 한 쪽 눈을 감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본래부터 외눈박이가 아니며, 내 반대쪽 눈은 멀쩡하다는 것만큼은 기억해야만 한다.
언제가 되든, 정말 필요해지는 순간에 두 번째 눈을 뜰 수 있도록 말이다.
***
“도련님, 마님께서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소식?”
“상대 쪽에서 결혼에 동의했다고 합니다. 결혼식 날짜가 잡혔습니다.”
“언제인데?”
“다섯 달 뒤입니다.”
“...... 진짜 얼마 안 남았네,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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