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질서(1)
전쟁은 끝났다.
총성은 멎었다.
........라기에는 전쟁 내내 진짜로, 진짜로 총 한 발 안 쐈네.
“해군은 그래도 꽤 치열하게 싸웠다는군, 격침된 함선도 나오고 전사자도 천여 명 내외로 발생했다던데. 본토에 남아 있던 다른 연대들도 저지대에서 죽도록 싸웠고.”
그래.
따지고 보면 이 전쟁에서 그리스로 온 건 오히려 엄청난 행운이 아니었을까?
솔직히 이런 전장에서 총질하다 죽으면 억울해서 성불도 못하고 귀신이 될 것만 같은데 말이지.
“누구는 명예를 얻을 기회를 날렸다고 땅을 치고 아쉬워하겠지만, 나는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네.”
“왜 그렇습니까, 대령님?”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목숨은 내 손에 달린 일일세, 사망자 없이 모두 가족의 품으로 되돌려보내주는데, 다행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나는 순간 멍하니 연대장님을 보았다.
이 미친 시대에 들은 몇 안 되는 정상적인 말이라서 그런 걸까.
솔직히 말해 감동적일 정도였다.
“연대장님, 그 말, 제 소설에 넣어도 되겠습니까?”
“뭐? 하하하하하핫!”
폭소한 연대장님은 눈물을 닦아내면서 해안선을 바라보았다.
“조만간 도착하겠군, 저기가 그 유명한 헤이스팅스다, 소위, 헤이스팅스 전투에 대해 아나?”
“물론입니다. 노르만 왕조를 시작시킨 전투 아닙니까.”
“바로 저곳에서 일어났지.”
연대장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해안을 바라보았다.
“돌아가면 뭘 할 건가?”
“결혼...이야기부터 해야죠.”
“결혼하나?”
“이야기 중인 상대가 있긴 있습니다.”
“흠, 미리 축하하겠네.”
껄껄 웃은 연대장은 선실로 향했다.
“차 마실 시간이군, 같이 들겠나?”
“감사합니다.”
얼마 뒤, 우리는 런던에 도착했다.
런던의 하늘은 오늘이라고 딱히 예외는 없다는 듯 구름이 끼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이 흐릿했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많은 시민들이 부두에 나와서 귀항하는 함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대영제국 만세! 국왕 폐하 만세!”
“승리 만세! 국왕 폐하 만세!”
유니언 잭이 휘날리는 가운데 함선들이 하나 둘 닺을 내리고 부두에 접안하기 시작했다.
돌아온 병사들이 행진하는 동안 그들의 머리 위로 꽃잎들이 뿌려졌다.
그 사이에서 화룡점정을 찍는 인물들이 있었다.
“나의 신하들이여. 조국을 위해 싸운 영웅들이여. 귀향을 환영하노라.”
윌리엄 4세의 환영사가 우리를 마중하고 있었다.
***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러 하녀들이 깜짝 놀란다.
“어머, 도련님?”
“마님! 도련님이 오셨어요!”
“그게 정말이냐?”
저 멀리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어머니가 레일라의 부축을 받으면서 내려오신다.
‘머리가.........’
하얗게 세셨다. 몰라볼 정도였다.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다친 데는,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직접 팔다리를 더듬어 가시면서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만져보신 어머니는 별 문제 없다고 느끼셨는지 나를 꽉 끌어안으셨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사실 무기를 들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정말 소풍 같은 전쟁이었어요.”
“...... 다른 곳에서는 그런 이야기는 들리지 않더구나, 저지대에서의 전투는 제법 치열했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들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도 그랬다고 하던데 말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사상당한 건 해군과 해군 육전대가 거의 전부고 나머지는 러시아인들이에요, 그리고 전 저지대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고요.”
“그래, 잘했다.”
키가 한참 큰 내 가슴팍에 얼굴을 잠시 묻으신 어머니는 기력이 떨어지셨는지 휘청거리셨고, 레일라가 황급히 어머니를 부축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곧장 레일라는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는 인사였다. 오래전이었으면 폴짝폴짝 뛰었을 텐데 말이지.
“고마워, 레일라.”
조금 성숙해진 걸까.
내가 아는 이 녀석이라면 매일 무사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는 둥 신나게 새가 지저귀듯이 떠들었을 텐데 말이지. 지금은 제법 사무적이다.
“레일라, 식사를 준비해다오, 다소 이르다만 저녁을 먹어야겠다. 대체 뭘 먹고 다녔길래 이렇게 앙상해진 거냐.”
“전 괜찮은데.....”
“내가 괜찮지 않다.”
“알겠습니다. 마님.”
레일라가 총총 부엌으로 사라졌다.
“레일라가 주방을 맡았나요?”
“요리사에게 전달하는 거지, 네가 없는 동안 하녀도 좀 늘리고 집을 보수하는 겸 조금 넓혔다. 네 방은 레일라가 철저히 지켰으니 딱히 변한 건 없을 거다.”
“그거면 됐어요.”
괜히 치웠다가 뭐가 어디 있는지 못 찾으면 골치아프니까 레일라에게 누가-어머니나 하녀들이라도-내 물건 함부로 치우지 못하게 하고 정 청소해야겠으면 레일라 본인이 먼지를 털든 걸레질을 하든 하면서 물건은 있던 자리에 그대로 놔두라고 했었지, 내가 군대 간 동안에도 그거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충성스러운 애다. 나중에 네가 결혼하면 데려가거라. 지금은 너무 어려서 그렇지 하우스키퍼(메이드들의 인사관리를 포함해 집안 살림을 총괄하는 관리직, 흔히 메이드장과 혼동되지만 메이드장보다도 상위직이며, 집안의 내밀한 사정을 주인보다도 잘 아는 관계로 보통 스스로 그만두지 않는 한 주인 입장에서도 쉽게 해고하기 어려워 대부분 종신직이었다) 자리를 맡길 만한 애니까.”
“예? 어머니는 어쩌시고요?”
아까도 부축 받으시는 거 보니까 정상은 아니신 거 같던데.......
“내가 괜히 하녀들을 더 고용했겠느냐, 괜찮다.”
“아니 그래도 몇 년 넘게 알고 지낸 애랑 고용한 지 얼마 안 된 하녀들이랑 같나요.”
레일라가 이 집에 처음 왔을 때 10살 안 되지 않았었나. 그쯤 되면 그냥 여기서 태어나지만 않았지 사실상 식구다.
“그 이야기는 식사 하면서 이야기하자꾸나. 그리고 아직은 걸어다닐 만 하다, 최근에 자꾸 허리랑 무릎이 아파서 그렇지.”
벌써 관절염이 오실 나이인가. 아니면 젊은 나이에 고생을 많이 하셔서 그런 걸까. 왜인지 코끝이 찡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잠깐 제 방에 가보겠습니다.”
“그러거라. 식사할 때 보자꾸나.”
방에 들어가자 입대하던 날 아침에 나간 내 방 모습 그대로였다.
심지어 툭 쳐서 약간 비뚤어진 잉크병의 위치도 그대로였다. 정작 흘렸던 잉크 자국과 쌓인 먼지 따위는 없는 걸 보니, 이 방을 청소하느라 벌어졌을 고생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레일라에게 뭐라도 해줘야겠군.’
고생 많았는데 뭐라도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근데 뭘 해주지. 보너스라도 줘야 하나.
레일라 하니 부축을 받으시던 어머니의 모습과 마른 손이 마음에 걸렸다.
‘이따 불러봐야겠군, 포상도 포상인데 물어볼 게 많아.’
식후 일정을 하나 잡아놓은 나는 벌떡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마침 메이드 하나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아, 도련님, 식사 준비가 끝나서 모시러.....”
“알았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뒤, 식탁에서 전채요리를 앞에 둔 어머니는 미리 준비하셨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가 없는 동안에도 이야기는 제법 진행했다. 이제 네가 귀환했으니 날짜를 잡아야겠구나.”
“..... 예?”
“내 개인적으로는 5월 12일이 좋겠다.”
“........ 예?”
아니, 무슨 이야기 진행 속도가 5G급이세요? 아니 이건 5G도 아니고 6~7G쯤은 되는 거 같은데?
“제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데 그러셨다고요?”
“원래 네가 전장에 나가기 전에 식까지 다 치르고 보내려 했었다. 그런데 그쪽에서 미적거리는 바람에 늦어지지 않았더냐.”
“............”
아니 근데 냉정하게 말해서 내가 전장에서 못 돌아오면 어쩌시려고 그러신 건지 이해가 안 가는데?
“아무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네가 혼인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내 소원은 그것뿐이다.”
“........네.”
***
힘들다.
아니, 내가 집에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됐나? 응? 한 달이나 지났나? 일주일? 아니, 하루도 안 지났는데, 근데 왜 또 내가 결혼 소리를 들었어야 했을까?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도 안 돼서 이런저런 데 다시 끌려나가기 시작하고.
누구...... 아무튼 이름 까먹은 어느 높으신 양반이 연 파티가 있고, 참석했다.
사실 초대가 온 이상 참석 안 하는 건 무례고, 괜히 척져서 좋을 일 없는 만큼 초대가 오면 정말 피치 못한 사정이 없는 한 참석하는 편이다.
물론 이건 명백히 정치적인 파티이기는 하지만.
영국 보수당. 얼마 전까지는 토리당이라 불렸던 정당의 고위 인사들이 한가득 참석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내가 보수당과 껄끄러운 관계는 아니다. 오히려 코드가 맞는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집안 단위로 코드가 맞았다. 어느 정도냐면 어머니에게 제법 최근에야 들은 이야기였지만, 아버지는 아예 보수당.....의 전신인 토리당.....의 전신인 휘그당 탈당파이자 초대 당수인 소 피트 파벌의 일원이셨다고 한다. 물론 의원직을 역임하거나 하신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기억하는 당원이 없지는 않을 거라나.
하기야 애초에 서로 우호관계가 아니고서야 굳이 초대를 했겠냐마는.
프랑스산 와인 한 잔을 홀짝이는데, 한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흠, 잘 즐기고 계십니까?”
“아, 남작님.”
보수당의 후원자 중 하나이자 이번 파티의 호스트인 나이 지긋한 남작이었다.
‘근데 무슨 남작이었지......’
잘 기억이 안 나네, 나중에 초대장 다시 확인해 봐야지.
그런데 혼자 온 게 아니다.
“이쪽은 셜록 홈즈와 그 외 다양한 저작을 집필하신 대작가, 젠티안 자작님이십니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혹시 이분의 성함을 저도 알 수 있겠습니까?”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이분은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 출신이시고, 지난 선거에서 처음 당선되신 초선의원이신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의원님이십니다.”
잠깐.
잠깐잠깐.
‘그’ 글래드스턴이라고? 초선의원 시절 글래드스턴? 위대한 평민?
근데 이 양반이 왜 보수당에 있어? 이 양반 자유당 아냐? 내가 또 뭔가 역사 엄청나게 바꿔버린 건가? 보수당에 있어야 할 인물은 글래드스턴이 아니라 저 양반 평생의 정적이자 숙적, 라이벌이었던..........
내가 얼떨떨해하는 순간 남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곳에 계신 의원분이 한 분 더 계시는데, 같이 소개시켜 드리려고 했네만 잠깐 자리를...... 아, 오셨군.”
잠시 뒤, 한 남자가 더 나타났다.
“이분도 초선의원이시네, 고명한 역사가이신 아이작 디즈레일리의 장남이시자, 자네와 같은 작가이기도 하셨으며 그 명성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하신 분이시지. 벤저민 디즈레일리 의원이시네. 디즈레일리 의원님, 셜록 홈즈의 작가이신 에드워드 젠티안 자작이십니다.”
미친.
미친.
이 파티, 안 왔으면 평생 후회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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