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2)
대영제국은 ‘공정’하고 ‘진보’적인 국가다.
물론 19세기의 ‘공정’과 ‘진보’는 21세기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예를 들면, 선거만 해도 한 표라도 달라고 공약을 내세우고 이것저것 해야 하는 현대와는 다르게, 문자 그대로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고, 없는 사람은 아예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여자는 투표권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고, 빈민들도 투표권이 없다.
일정 금액 이상 세금을 내는 성인 남성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는 시대.
이것이 그들에게 있어 공정한 사회였다.
아니, 세습이 아니라 어떻게든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할 정도의 노력과 행운이 뒤따른다면 평민이라도 기어올라갈 수 있는 바늘구멍이 있기는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나라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나은 건 맞긴 맞다.
그리고, 나는 이 호랑이의 등 위에 올라타고자 한다.
이미 나는 식민개척을 한 차례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어차피 제국주의는 시대적인 흐름이고, 이 폭풍에 거스르기보다는 올라타는 게 현명하다.
물론 어떻게 해서 그 제국주의로 인해 벌어질 착취와 학살을 원 역사의 것보다 그나마 나은 쪽으로 바꿀 수 있기는 할 거다.
그러나 그 흐름을 근본적으로 틀어막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영국의 왕이 아니라 일개 하급귀족이다.그리고 설령 대영제국의 군주라고 할지라도, 러시아의 차르라고 할지라도, 한 번 밀어닥치기 시작한 역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틀어막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게 되면 신이지.’
따라서, 나는 이 사상에 부역할 거다. 아니, 단순한 부역자를 넘어 선구자가 될 거다.
어차피 마크 트웨인 등 극소수 선구자들을 제외하고는 양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전 유럽 정부와 국민들에게 열렬히 지지받으며 전 세계를 지배할 관념이다.
최소한 내가 늙어죽을 때까지는 그렇겠지.
이론적으로 이들을 뒷받침하는 선구자가 되면 차라리 방향이라도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으니 차라리 낫다. 어차피 여러 사정상 제국주의는 필연적인 존재니까.
그래.
제국주의는 이 시대, 19세기에, 위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썩어가는 황금 가면의 시대에 필연적인 존재다.
경제적 이유가 아니다. 식민제국의 경제에서 식민지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영국이 절대 못 놓겠다고 20세기까지도 데굴데굴 구른 인도 식민지만 해도 사실 절대적인 비용을 따지고 보면 오히려 흑자보다는 적자가 날 때가 더 많았다. 물론 그딴 논리로 사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근대화시켜주기 위해 봉사했다거나 하는 놈들은 뚝배기를 깨야 마땅하지만.
식민지 경영으로 궁극적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는 지배국 정부가 아니고, 탄압당하는 피지배국의 정부나 국민은 더더욱 아니다. 진정 부유해지는 것은 식민지에서 이득만 얻고 식민지 유지를 위한 비용을 지출할 필요가 없는 지배국의 몇몇 개인과 기업들 뿐이다.
그렇게 발생한 국가적 손해는 결국 전 국민에게 전가된다는 걸 생각하면 식민지의 싼 원자재와 노동력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는 직접적인 피해 외에도 서민들의 삶에 간접적으로도 피해를 주는 셈이다.
식민지의 유지 목적은 이미 이 시대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변질된 지 오래다, 오랜 기간, 계급 사회를 통해 지속된 차별적인 대우로 인해, 오랜 빈부격차로 인해 지친 서민들은 뭔가 물고 빨 만한 국뽕을 원한다.
당장 동인도 회사만 해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적자 때문에 골골댄 지 오래다. 정치적 관심과 자국 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는 데에‘만’ 효과적인 게 식민지인데, 이 시대에 그 외에 국내 불안을 해소하는 수단은 혁명밖에 없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나는 혁명이라는 수단에 그다지 동의할 수가 없는 입장이고.
경제적으로는 식민지 다 독립시켜도 경제는 잘만 돌아갈 거다. 식민지는 유지하는 것보다 독립시켜준 뒤 자유무역을 하는 것이 국가적으로는 훨씬 이득이다. 마르크스가 잘못 판단한 부분이 거기다. 애초에 마르크스의 경제학이 중대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건 둘째 치더라도 이미 고무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충분히 필요량을 전부 충당할 수 있다.
물론 그 털보 아저씨는 아직 파릇파릇한 법대생일 시절이겠지만.
‘식민개척의 씨앗은 이미 싹을 틔운 지 오래인 걸 넘어 진작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열매를 맺는 걸 눈앞에 두고 있으니.’
이런 호랑이와 정면으로 맞붙기보다는 그 위에 올라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어차피 그 호랑이가 내가 죽기 전에는 멈출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그 호랑이의 방향을 조금이나마 조절해, 조금이라도 더 나을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어설픈 동정은 더 큰 비극을 불러올 수 있다. 감성을 따른 탓에 이성을 따랐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이 몇 번이나 일어났던가.
나는 펜을 들어 종이에 글을 적어내려갔다.
<문명의 개화>
첫 장이었다.
***
프랑스, 파리.
“파리를 향해 대규모 병력이 남하중입니다.”
“브뤼셀이 함락되었고, 칼레가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시간이 제법 지난 보고일 터, 칼레는 이미 함락되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라고 해 봤자 전서구니까.
“칼레, 아라스 방면의 병력을 아미앵까지 퇴각시켜, 아브빌-아미앵-생껑땅, 이 세 곳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설치해서 적의 공세를 방어한다.”
아르덴 방면은 스당이 굳건히 버티고 있다.
스당은 당장 보불전쟁에서 20만 대군의 가치가 있다고 알려진 요새, 그걸 잡고도 뚫릴 만큼 루이필리프가 어리석지는 않았다.
“..... 그리고, 협상을 요청하도록.”
“협상을 거부할 겁니다.”
당연하다, 자기가 한참 유리한 상황에 협상해줄 이유가 뭔가.
“아니.”
루이필리프는 이를 악물었다.
“모든 프랑스군을 아미앵으로 모아서 그곳에서 항전한다, 만일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면, 프랑스인 모두를 죽인 뒤에야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저들이 알도록 해라!”
“그 말씀은......”
“아미앵에서 적들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몽펠리에로 천도할 예정이다. 대비하도록.”
죽기 싫었다.
살고 싶었다.
그러니, 앞으로 흘러내릴 수많은 피를 인질로 잡아서라도.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고야 말 것이다.
***
브뤼셀, 벨기에.
러시아-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이 브뤼셀을 점령한 뒤에 처음으로 찾아든 손님들은 지친 표정으로 상대를 맞았다.
“앙투안 대사님.”
“..... 뵙게 되어 기쁘군요, 장관님.”
승자의 여유, 패자의 비애.
그러나, 그걸 얼굴에 드러내는 건 하책이다.
간신히 표정관리를 한 앙투안 대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이미 전달받으셨겠지만, 저희는 이만 이 전쟁을 끝내고자 합니다.”
“마음대로 시작하고, 마음대로 끝낸다. 참 프랑스인들의 사고방식은 편리하군요.”
통렬한 비아냥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간신히 막아낸 앙투안 대사는 간신히 표정을 관리했다.
“뭘, 원하십니까.”
“연합왕국, 러시아 제국, 네덜란드는 프랑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종전 조건을 제시하겠소. 첫째, 양측의 모든 전쟁 상태를 종식하며 외교관계를 재개함.”
전쟁을 끝낸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둘째, 군사력 제한이오.”
프랑스 해군이 가지고 있는 전열함 다수의 압류, 총기와 대포 다수의 압류, 동원상태 해제 등을 골자로 하는 요구사항이 들이밀어졌다.
“셋째, 미디 운하의 운영권을 영구히 공동으로 소유할 것, 미디 운하를 통과하는 3국의 선박에 대해 과세하지 말 것.”
미디 운하는 프랑스의 운하이며, 옥시타니아를 통해 지브롤터를 거치지 않고 지중해로 들어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이었다.
“넷째, 영국에게 프랑스의 ‘잉여’ 곡물들을 최우선적으로 구매할 권리를 200년간 넘길 것,”
애초에 영국도 프랑스처럼 정치적 문제로 밑도 끝도 없이 커져버린 사태가 아닐 뿐, 후일 있을 식량자원의 부족과 식량 무기화에 대한 걱정을 안 하는 건 아니었기에 포함된 조항이었다.
프랑스는 땅만 파도 먹고 살 수 있는 나라니까.
“다섯째, 네덜란드의 벨기에 지역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할 것,”
동맹 네덜란드에게 떼어줄 떡이었다. 벨기에가 독립한 지 10년도 안 되었으니 네덜란드에게도 충분히 명분이 있었다.
“여섯째, 영국-러시아의 동군연합 형성을 인정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국가가 있을 경우 프랑스는 최선을 다해 지원할 책임을 질 것.”
말은 복잡하게 했지만, 영국-러시아 동군연합이 형성되는데 이걸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어깃장 놓는 국가가 나오면 영국 측에 힘을 보태서 싸워야 한다는 소리였다.
“일곱째, 이건 당신네들을 배려한 부분이니 표정 푸시오.”
영국 대사의 말을 들은 러시아 대사의 콧수염이 움찔거렸다. 웃음을 참는 게 분명했다.
“일곱째, 99년간 지브롤터 해협에 댐을 놓을 권리를 프랑스에 임대한다.”
100년이 아니라 200년을 삽질해도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대충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시선을 던지기는 했지만, 아무튼 프랑스의 전쟁명분이었다.
즉, 프랑스의 전쟁명분을 달성은 시켜준 것.
이는 다르게 말해.......
‘살려는 드릴게.’
이미 영국은 부르봉 왕정복고를 했다가 7월 혁명으로 싹 뒤집어져서 그 여파로 인해 벨기에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꼴까지 봤다.
상대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아니고 이미 졸렬한 군사지휘와 국내 정치사정에 계속 휘둘린 끝에 악수만 연발하는 것으로 속 빈 강정이라는 게 훤히 드러난 루이필리프기도 하니, 무작정 목을 날리기보다는 앉혀놓고 이용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그렇기에 미리 정해놓은 대로, 지브롤터라는 당근을 적당히 내민 셈이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지중해로 가는 길이 막히는 문제는 미디 운하를 뜯어내는 것으로 갈음했다. 오히려 옥시타니아를 지나 지중해로 들어가는 미디 운하를 이용하면 지브롤터를 이용하는 것보다 시간이 단축된다.
성공하면 어차피 지중해로 다닐 일이 없고, 실패해도 미디 운하를 뜯어낸 이상 손해볼 게 없다. 프랑스가 99년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면 그냥 쓰던 대로 쓰면 되는 거고.
당장 이번 전쟁만 해도 지브롤터가 프랑스에게 점령되었어도 영국 함대는 모로코를 통해서 잘만 다니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지브롤터 댐 건설안에 대해 저울질해 본 영국의 수뇌부는 충분히 해볼 만한 계획이라고 결정내렸다.
어차피 네덜란드는 벨기에를 되돌려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판이었으니 그다지 발언권은 크지 못했다.
러시아는 애초에 본인들이 해양 세력도 아니거니와 갈망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도로 자기 품에 안길 수만 있다면 지브롤터가 어떻게 되든 간에 애초에 관심 자체가 없었다.
프랑스가 파산하든, 성장 동력을 잃고 주저앉든, 아니면 스스로 흐지부지하게 만들든, 대영제국이 손해볼 것은 단 하나도 없었기에, 영국은 이런 ‘관대한’ 제안을 내밀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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