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1)
안타깝게도, 루이필리프는 어느 작가가 콘스탄티노플 인근의 군영에서 편히 잠든 것처럼 마음 편히 앉아 있을 상황이 되지 않았다.
“러시아군과 영국군이 대거 네덜란드에 강습했습니다! 병력 최소 30만!”
“폴란드 방면에 러시아군이 집결하고 있습니다! 병력의 통과를 허가하라고 프로이센을 압박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벨기에군이 영국-네덜란드군과 싸우다가 완패하고 패퇴했답니다! 거의 전멸.....”
“그만! 그마아안!”
머리를 쥐어뜯으며 팔걸이를 내리친 루이필리프는 시체 같은 안색으로 물었다.
“프로이센에 보낸 대사에게서는 소식이 없나? 아니,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사르데냐, 어디든 좋네. 우리 요청을 받아들여준 국가가.......”
“프로이센 정부는 확답을 피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측에서는 원론적인 답변만..... 사르데냐-피에몬테 역시 그다지......”
“협상은 어떤가, 교황청을 통해 중재를 청해보는 건......”
“저들이 받아주겠습니까?”
현재 프랑스는 전쟁을 할 여력이 없다.
패면 패는 대로 얻어터지지나 않게 버텨야 하는 처지.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에 어마어마한 상흔을 남겼고, 그 상흔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당연하다, 나폴레옹이 아무리 천재라고 한들, 나폴레옹이 동원한 군대들은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군대다. 폴란드군을 비롯한 외인부대도 다수 있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소규모였다.
그렇게 죽어나간 이들은 프랑스에서 농사를 짓고, 노동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어야 할 프랑스인들이었다.
독일과, 영국과, 스페인과, 러시아와, 그 외 유럽의 사실상 모든 국가를 대적하면서, 아무리 나폴레옹이 뛰어난 영웅이라 한들 국가의 역량을 좀먹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폴레옹 본인이 그렇게 말했듯이, 군대는 먹어야 진격하니까.
아무리 전체 인구에 비해서 손실 자체는 미미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노동가능 인구였다면 그 피해는 숫자로 보는 것보다도 클 수밖에 없는 법이었기에,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한 세대도 지나지 않은 지금 이 순간, 루이필리프는 징집할 군대가 많지 않다는 현실을 자각해야만 했다.
러시아의 물량에 깔려죽고, 동시에 로열 네이비에게 말라죽는다. 라인 동맹에 덴마크까지 거느렸던 나폴레옹도 그렇게 망했는데 프랑스 하나만 달랑 가지고 있고, 거기에 더해 전쟁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루이필리프가 카를로스파 하나만 믿고 버틸 수 있을까?
반대로, 가만히 있으면 결국 패배하게 될 텐데, 굳이 영러가 협상을 해줄 리가 있겠는가.
“급보입니다! 러시아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졌습니다!”
“파리 시내에서 배급량 감소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시위대가 무장하고 있어 총격전이 발생했습니다!”
“군 병력을 투입해! 당장! 총을 몇 발을 쏴도 좋으니 당장 이 사태를 진정시켜!”
***
런던, 외무성.
“슬슬 협상을 해도 좋은 시기일 듯 합니다.”
“그렇습니까?”
“루이필리프 정권이 패전으로 인해 무너지면, 그 다음에 세워질 프랑스인들의 정권은 어떤 쪽이겠습니까? 상기시켜 드리자면, 저희는 이미 부르봉 왕정복고라는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설령 온건파가 세워지더라도, 강경파가 그들을 다시 뒤엎어버리고 재집권하겠지요, 이해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측도 이런 전비소모를 장기간 지속하기에는 타격이 너무 큽니다.”
지금은 나폴레옹 전쟁기가 아니다.
식민지에서도 불온한 움직임이 계속되는 판에, 프랑스에게 집중하는 것이 실익이 클 리가 없었다.
“프랑스에게 어느 정도 빠져나갈 구멍을 준 상태로 전쟁을 끝내는 걸 모색해 볼 수 있겠습니다. 문자 그대로 어느 정도 김을 빼는 거죠.”
억누르기만 하고 분출할 구멍을 주지 않으면, 언젠가 터진다.
차라리 혁명으로 들고일어나기보다는 프랑스에게 어느 정도의 체면을 차리게 해주는 게 나으리라.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총리 각하, 국내에서는 프랑스에게 보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을 텐데요.”
“프랑스에게 최소한의 자비만 배풀면 되오, 그들의 전쟁 명분이기도 했던.”
“..... 설마 지브롤터를 포기하시겠다는......”
“포기가 아니오, 건설 권리지.”
“예?”
“루이필리프는 국민들에게 보일 최소한의 성과가 필요하오.”
지브롤터의 소유권 문제는 어차피 스페인이나 웃을 일, 프랑스와는 관계 없었다. 지브롤터에 대한 권리는 하나면 충분하다.
댐 건설 권리.
“프랑스 정부에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권리를 일단 프랑스 정부가 소유했다는 점 하나만 명확하게 하면 국민들은 안심할 겁니다. 따라서 댐 건설과 관리권, 그리고 이에 필요한 각종 권한들이 프랑스에 귀속된다고 해 주면 됩니다.”
프랑스는 이 권한을 넘겨주는 데 대한 비용이라는 명분으로 어느 정도의 배상금까지 낼 의사가 있다고 어필하면서 그 권리를 얻어내고자 했다.
그리고 영국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지브롤터에 댐을 세우겠다는 계획은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시간과 자원을 소모하리라는 게 뻔히 보였다.
그런데 그 자원은 어디 거저로 나오나?
결국 프랑스는 어마어마한 기회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다.
즉, 프랑스가 총대를 매고 그놈의 댐을 짓겠다고 하면 박수를 칠 일이지 굳이 말릴 의리는 전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애초에, 현재 건설 기술로, 얼마의 자금을 쏟아붓든, 얼마의 비용을 들이든, 그게 가능할지도 솔직히 미지수인 일 아니오, 거기에 열심히 삽을 푸면서 고생을 하고 싶다면 고생하게 놔둡시다. 적어도 그 국력을 댐에 쏟아붓는 동안에는 헛짓을 하지 못하지 않겠소.”
그게 단순히 경제적 이유로 시작되는 사건이라면, 멈출 수 있다.
하지만 사상적, 이념적 이유에서 시작된 행동은 결코 멈출 수 없는 폭주기관차다.
그리고 과도하게 시간과 비용을 쏟아부은 끝에 프랑스가 영국의 패권에 도전할 수 없을 정도로 몰락한다면 영국에게 있어서 나쁠 것도 없었다.
그 대화가 오가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던 러시아 특명전권대사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오스만의 처리 문제를 확약받고자 하오.”
“그에 앞서,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동군연합 문제부터 해소해야 합니다.”
영국의 특명전권대사는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빅토리아 공녀님은 여러.......정황상,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의 왕관을 넘겨받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십니다.”
“그렇소.”
“그리고 알렉산드르 황태자 전하께서도 러시아 제국의 제위를 물려받으실 터, 두 분이 혼인하시게 되면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러시아 제국과 대영제국 모두의 계승자가 될 것입니다. 이에 동의하십니까?”
“당연한 거 아니오?”
“본국은 이를 공식화하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게거품을 물 나라들이 한둘이 아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열강급에서도 셋이다.
하지만, 프랑스가 이번 전쟁을 종결시켜주는 대가로 입을 닥치기로 한다면 어떨까?
그럴 경우 합스부르크와 호엔촐레른만 남고, 그 둘은 결국 물과 기름, 자기들끼리 뭉쳐서 항쟁하더라도 얼마 못 간다.
“러시아 제국은 이번 전쟁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서 확실히 영토를 넘겨받을 생각입니다.”
크림, 그리고 발칸, 아나톨리아, 궁극적으로 흑해를 러시아의 호수로 만들고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것.
러시아 제국의 오랜 꿈이었다.
“러시아 제국은 이번 전쟁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을 기독교도들의 손으로 되돌려놓고자 하오.”
그냥 자기가 쳐먹겠다는 것이다.
러시아 대사는 세계지도에 선을 죽죽 그었다.
“거기에 더해, 이 영토들을 얻어내고자 하오, 아직 우리 군이 도달하지는 못한 영토이오만.”
“이 정도 영토라면 오스만은 발칸과 아나톨리아에서 사실상 쫓겨납니다만.”
“이 지역, 쿠르디스탄이 각국의 완충지대 역할을 할 거요.”
오스만 제국의 사실상의 멸망을 선고한 러시아 대사는 완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대를 내거나 하라는 요구는 하지 않을 거요, 오롯이 러시아 제국의 손으로 이룩될 업적이니 말이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숙원을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국가는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오. 차르께서는 그 무엇이라도 이를 위해 희생할 각오가 되어 계시니 말이오.”
러시아 제국은 이를 위해서 동군연합에 관련된 사항도, 종전의 조건도 전부 양보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무슬림들에게서, 이교도에게서 제국의 심장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 어떤 대가도 기꺼이 감내할 의사가 있었다.
“대영제국은 동군연합이 될 러시아 제국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니, 결국 프랑스에게 이번 조약에서 오스만에서 손을 확실하게 뗄 것을 명시받아 달라는 것이군요.”
“그리고 오스만의 처리 조약에서 이 영토들을 양도받는 것이오.”
“어렵지는 않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외무장관은 빙긋 웃었다.
대영제국 외교단의 역량은 충분하다. 아무리 자신의 조국의 상황이 참담하고 암울하다고 해도 저런 암담한 표정이 아닌, 포커페이스로 블러핑을 쳐서라도 어떻게든 조국에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존재들.
“말 같지도 않은 명분으로 선제공격을 가한 국가이니, 충분히 뜯어낼 수 있겠죠.”
물론 프랑스 입장에서는 할 말이 아주 많다.
프랑스는 영국과 다르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다.
물론 훌리건의 나라나, 혐성국이나, 그런 부분은 접어두기로 하자.
여기서 중요한 건 영국 정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영국 국민들이 정부를 엎어버린 사례는 딱히 없다는 것이다.
영국의 왕은 폐위된 적도 있고, 찬탈당한 적도 있고, 살해당한 적도 있고, 기타 여러 경우들이 있다. 심지어 공화정이 된 일도 잠시나마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전부 귀족층, 그리고 왕가의 일이었다.
아서 왕 시대, 브리튼인들이 앵글로색슨인들과 싸우고, 칠왕국이 세워지고, 바이킹들의 침략, 이교도 대군세의 공세, 그리고 크누트 대왕의 북해 제국의 건설, 그리고 노르만 왕조의 건설, 장미전쟁, 잉글랜드 내전, 그리고 엘리자베스 시대, 나폴레옹 전쟁까지.
그 수많은 시대 속에, 단 한 차례도 귀족이 아닌 민중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려는 시도는 일어나지 않았다.
단 한 차례도, 민중들은 군주를, 최고지도자를 그들의 손으로 죽이지 않았다.
감히 그들에게서 권력을 빼앗고자 하지 않았다.
물론 마그나 카르타나, 다른 방식으로 군주의 권한을 제약하고자 하는 시도는 있었다. 국왕의 목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귀족이었다.
지배계층 사이의 일이었다.
평범한 무지렁이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반면, 프랑스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그들의 군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왕과 왕비를 죽이고, 수많은 귀족들을 죽였다.
혁명이라는 사상을 세상에 퍼트렸다.
그리고, 부르봉 왕조가 어떻게 끝장났는지를 알고 있던 루이필리프는 자신도 단두대에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국내의 각종 불안요소, 부족한 임금과 사회복지 등을 들어주는 것보다는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 훨씬 쉽다.
그래서 영국의 소설을 확대해석해서 적을 만들었다.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구호.
그 구호는 국민들의 불만을 제법 효율적으로 억눌렀지만, 그로 인해 발생한 조류는 루이필리프의 능력으로는 견뎌낼 수 없었다.
그래서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쳐발렸다.
그러니,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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