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4)
지중해, HMS 테세우스.
3급 74문 전열함의 갑판 아래에서 나는 종이에 펜을 끄적이고 있었다.
“소위님, 뭐하십니까?”
“메모.”
“여기서도 글 쓰십니까?”
“놀면 뭐하냐? 생각나는 거 제때제때 적어둬야 글도 잘 나온다고. 난 내 기억력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 편이라 말이지.”
“멀미도 안 나십니까.”
“적응된 편 같네만.”
그래도 셜록 홈즈 시리즈의 작가인지라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꽤 많았다.
‘젠장, 그리스라니, 그리스라니!’
본토에 남아있으려고 별짓을 다 했는데, 뜬금없이 몇 개 연대가 그리스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그 가는 연대가 왜 하필 우리 연대냐고!
“그리스에서 전투가 있을까?”
“일단 어지간한 전투는 다 러시아군이 치른다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겠지?”
“애초에 본격적인 전쟁을 치르려고 했으면 이 정도 병력만 보내지도 않겠죠.”
현재 출격한 병력은 4개 연대.
이 병력들을 수송하느라 훈련용으로 전용된 구형 선박들까지 출격했다. 내가 수송선이 아닌 전열함에 탄 것 역시 수송선이 부족해서 장교와 고참 부사관 몇을 전열함에 낑겨태운 것이었고.
“그런데 지브롤터가 함락당했다고 하지 않았어? 지중해로는 어떻게 들어가려는 거지?”
“모로코를 통해서 들어갈 거네.”
그 순간, 나는 흠칫 놀라 일어났다.
“충성!”
이 배의 함장이라는 로버트 대령이었다.
대령은 껄껄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거 영광이군, 셜록 홈즈의 작가가 내 배에 타다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소위, 그래서 홈즈는 왜 죽였나?”
“...........”
‘에라이 진짜 더러워서.’
지금 쓰는 것만 다 쓰면 진짜 홈즈 살리든가 해야겠다. 서러워서 진짜.
***
현재 함대에 붙은 전열함은 6척, 그 외 수송선도 다수 붙어 있었다.
함대의 기함이 HMS 빅토리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있는 대로 끌어모은 것에 가까웠다.
19세기의 로열 네이비에 군함이 없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냐고 할 만하지만, 조금만 다시 생각해보면 군함이 많은 것과, 그 많은 군함을 적재적소에 투입할 수 있느냐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더욱이 이렇게 전쟁이 급하게 터진 마당이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군함들 중 적어도 3분의 1은 아직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도 전해받지 못했으리라. 전신조차 개발이 안 된 시대니까!
따라서, 본토에 있는 군함들을 모아서 영국 본토의 요지들을 방어한 뒤에 남는 함선을 보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고물선에 가까운 꼴이 되어 훈련함으로 전환되었던 HMS 빅토리가 일선에 다시 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배가 없으니까 급하게 재정비시켜서 내보낸 것이다.
그나마 러시아인들은 대규모의 수송선들을 내보냈지만 호위는 영국이 해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빠르게 오스만으로 들어갔다.
***
“갈리폴리 반도에 대한 방어를 강화해야 합니다!”
“전열함 6척이면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오지는 못해도 봉쇄는 확실히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 방면에 방어병력을 늘려야 합니다.”
“러시아군이 크림을 공격하고 있어서 그 방면에 병력 대부분이 묶여 있는데 이 상황에서 병력을 더 모을 수 있소?”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국가다.
따라서, 비 무슬림에게는 세금을 걷고, 무슬림은 징병해서 국가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그런 오스만의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행정력 부족이었다.
징병관이 어느 마을에 찾아가니 주민들이 무기를 들고 나와서 ‘우리는 대대로 기독교도들인데 무슨 징병이냐! 꺼져라!’라고 외치면서 징병관을 쫓아내고, 같은 마을에 세리가 찾아가니 ‘우리는 무슬림이다! 무슬림에게 무슨 세금이냐!’를 외치면서 세리를 위협해 쫓아내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였다.
즉, 오스만의 정규군이 전부 러시아를 막기 위해 몰려간 지금, 러시아가 그리스를 통해 제 2전선을 열어버리면 그에 대응할 병력의 동원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흐무트 2세가 예니체리를 숙청하고 만들어낸 신식 군대는 아직 창설된 지 10년조차 되지 않아 자리를 잡지도 못했고, 병력의 전체 수도 철저한 열세였다.
몇 세기 동안 제국을 지켜왔던 다뉴브 방어선이 붕괴하고 러시아군이 크림으로 물밀 듯이 몰려오는 지금, 새로운 병력을 뽑아낼 여유가 없었다.
“술탄이시여, 창고에 있던 무기들을 정비하도록 윤허하여 주소서, 그 무기들로 갈리폴리 반도를 지키겠나이다.”
“윤허한다.”
창고에는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사용되었던 그 유명한 ‘바실리카’를 비롯해 각종 병기들이 보관되어 있다.
바실리카만 해도 지난 그리스 독립전쟁 당시 로열 네이비의 군함 한 척을 굉침시키고 나머지 함선들을 퇴각시킬 정도로 아직 팔팔한 현역이었고, 그 외의 병기들도 그럭저럭 쓸만한 수준의 병기들.
다만 그걸 사용할 병사들의 훈련도 부족이 우려되었지만. 그건 지금 당장 어쩔 수 없었다.
“기독교도들은 어떻게 합니까?”
기독교도와 유대인 등의 ‘이교도’들은 콘스탄티노플 내에도 굉장히 많다.
그리고, 그들이 내부에서 호응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코앞까지 러시아군이 오게 놔둔다면 그건 이미 진 거나 다름없다.’
최악의 경우, 앞에서 공격당하는데 뒤에서 수비군 규모 이상의 반란이 일어나 양쪽에 끼어서 아작나는 수가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내의 정교도들만 해도 수십만 단위, 거기에 내심 제국에 반감을 품고 있을 이민족 무슬림들 등을 계산하면 도저히 견적이 안 나온다.
즉, 어떻게든 그리스-러시아 연합군을 요격해야 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영국에서 몇 개 연대와 군함 다수를 지원을 위해 파견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주력군은 아닐지언정 상당히 위협적인 부대입니다.”
애초에 왕립해군과 레드코트가 아무리 2선급 병력이라고 해서 만만한 상대일 리 없다. 특히 오스만군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대영제국은 해군이든, 육군이든 모두 최정예니까.
해군의 군함 개별 성능은 프랑스나 스페인에 비해 부족하다는 게 중론이지만, 그 숫자와 뛰어난 사관단은 왕립해군을 세계 정상에 군림하게 한다.
절대적인 머릿수가 적을 뿐, 소수정예인 레드코트의 훈련도 역시 세계에서 비할 데가 없다. 장교들의 지휘능력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거기서 거기일지언정 그 틈새를 부사관단과 사병들의 훈련도로 메꾼다.
사격실력이 좋은 레드코트가 이룬, 타국에 비해 얇고 긴 진형을 일컫는 말, 씬 레드 라인.
그들을 적으로 만난 군대 중 막대한 피해를 면한 군대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번에는 오스만을 노리고 있었다.
***
런던, 버킹엄 궁전.
“폐하. 이번에.......”
“다섯.”
“예?”
“짐이 생각하는 게 맞다면, 자네가 이번 일로 날 찾아온 다섯 번째 사람이네.”
국왕의 말에 장관은 고개를 숙였다.
“짐이 왜 방위군에서 급히 병력을 빼서 러시아 제국을 지원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게 아닌가?”
국왕은 군의 최고통수권자다.
당연히 군주가 전쟁을 지도하면 군은 따라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 러시아에 지원을 보낸 건 윌리엄 4세의 의지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근위사단을 비롯해 상비군이 있으니 급편한 연대 몇 개 정도를 투입하는 건 큰 문제까지는 아닙니다만......”
“짐은.”
윌리엄 4세는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오스만을 우선순위에 두기로 결정했네.”
어둑어둑한 하늘에는 짙은 구름이 가려 별이 보이지 않았다.
“오스만은 많은 병력도 필요 없으니까.”
사실이다.
러시아의 군대는 잘해야 이류, 나쁘게 보면 삼류다.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같은 일급 강국은 물론이고 오스트리아 제국 같은 1류라고 하기는 어렵고 2류, 잘 쳐줘야 1.5급 열강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저 무서운 건 그 물량뿐이다.
물론 그렇게 저평가받는 국가마저도 유럽 밖에서 다른 나라들을 상대하자면 그 국가들에게는 악몽이나 다름없긴 하지만, 러시아는 질을 양으로 보충하는 국가이기에 열강이라는 게 유럽 국가들의 인식이다.
그런데 그런 러시아조차도 어렵잖게 두들겨패는 게 유럽의 병자 오스만이다.
그렇가면 질적인 면에서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려운 강군인 대영제국의 레드코트가 투입된다면 그야말로 작살낼 수 있다. 부족한 수를 러시아와 그리스가 보충해준다면 일방적인 피해를 강요하면서 적을 붕괴시킬 수 있으리라.
“프랑스를 상대하려면 아직 준비가 많이 필요하지만, 오스만은 빠르게 잘라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병력을 좀 빼돌린다고 해도 왕립해군이 건재한 이상 본토는 안전하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폐하.”
“적어도 프랑스인들의 심리에는 타격을 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기회에 오스만을 완전히 무너트린다면..... 그것도 이득이 되겠지.”
“이제 결단하신 겁니까?”
“왕위를 물려받을 이도 별달리 없고, 아직 어리다고는 해도 혼처로는 최적 아니던가.”
“............”
“무엇보다, 나는 그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 공녀, 그리고 그녀의 내연남 존 콘로이.
남동생이 죽자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는 제수와 그녀와 붙어먹는 인간이 밉상인 건 인간적으로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두 연놈이 대영제국의 차기 여왕을 손에 넣고 이 나라를 망치려고 한다면 이건 단지 분노 수준에서 끝날 수가 없었다.
왕은 아직 그였다.
그러나 그는 늙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은 바짝바짝 말라가고 힘은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성년이 되는 그 날까지만이라도 버텨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아직 어린 빅토리아가 제 어머니와 제 어머니의 내연남에 정서적인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 차라리 막강한 위세를 지닌 약혼자를 붙여줘서 그 먕할 연놈의 영향력을 축출하는 게 완벽하다.
그리고, 그렇게 결혼식이 이루어지면 세계는 크게 맥동하리라.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두 국가, 러시아 제국과 대영제국의 국혼이자, 대영제국의 여왕이 될 자와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될 자의 결합이니까.
동군연합.
물론 동군연합도 동군연합 나름이다. 단순히 같은 군주만 섬기는 인적 동군연합, 그리고 사실상 한 나라인 물적 동군연합.
그리고 윌리엄 4세는 이번 기회에 영국과 러시아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같은 관계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되면 대영제국에게는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지금 이 상황처럼 프랑스를 비롯한 대륙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동맹을 찾으러 뛰어다닐 것도 없이 러시아군을 동원하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이번 전쟁은 울고 싶던 차에 따귀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이번 전쟁을 통해, 전 유럽에 두 국가의 동군연합을 용인받는다.
이를 통해 대영제국의 지위를 전 유럽에 더할 나위 없이 확고하게 못을 박아놓는다.
프랑스와 독일 모두가 군소리할 수 없도록. 명확하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