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2)
나는 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살짝 목례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붉은 코트에 흰색 장구류, 허리에 찬 검.
영국군 장교의 복장을 한 나는 어머니께 고개를 숙였다.
“성공하지 않아도 좋다. 네 몸만 잘 돌봐라.”
어머니는 그렇게 당부하듯 말씀하시면서 내 어께에 손을 얹으셨다.
나는 고개만 끄덕이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으니까.
***
런던은 상당히 특이한 도시다.
1205년, 마그나 카르타에서 런던의 특권을 진정하여 관세를 면제받게 된 이후 런던은 상인들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를 비롯해 많은 자치구들은 엄밀히 말해 관행적으로 런던이라 부를지언정 아직은 별개의 시로 구분되어 있긴 하지만, 이 시기에 런던이라고 하면 엄밀하게는 시티 오브 런던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그나 카르타에 의거해 세무조사나 압수수색조차 허용되지 않는 지역인 시티 오브 런던은 금융인들과 탈세, 자산은닉의 천국이다. 심지어 대영제국의 군주조차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고 별도의 시장인 가장 명예로운 런던 시장 경(21세기에 흔히 런던이라 불리는 그레이터 런던의 시장과는 별개의 직책이며 왕의 의전상 대리인인 시티 오브 런던의 로드 레프테넌트를 당연직으로 겸직한다.)의 허가 없이는 이 지역에 발을 들일 수 없다.
수많은 기업들이 이 지역에 본사를 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존, 나네.”
“에드워드 경.”
나이 지긋한 노인은 젊은 청년에게 고개를 깊숙하게 숙였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감사드립니다.”
“뭘, 그나저나 제법 놀랐네, 프랑스 놈들이 진짜로 전쟁까지 결의할 줄은 몰랐거든.”
“여론이 너무 끓어올라서 루이필리프가 겁을 집어먹은 겁니다, 이제 그 대가를 치르게 되겠죠.”
“호, 자신감이 넘치는군?”
“여러모로 알아봤으니까요, 이번 전쟁, 프랑스가 궁극적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한 판입니다.”
나폴레옹이 없는데, 나폴레옹 전쟁 시기보다 사정이 더 나쁘다.
그러니, 프랑스의 패망은 어마어마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한 필연.
그렇기에 그들은 그 다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녀님이 황태자와 결혼하고, 러시아와 정식으로 동군연합이 형성되면 러시아의 싼 인력을 대량으로 들여올 수 있습니다. 목재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도 폭락할 거고요. 게다가 러시아라는 거대한 시장은 그야말로 기회의 땅입니다.”
“그건 자네들 같은 상인들이나 좋아하는 거 아닌가.”
“그 상인에게 투자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번 배당금도 제법 크게 드렸습니다만.”
“그래, 아직 본격적인 시작도 안 했다면서 대단하군.”
“베링 해협 공사든, 지브롤터 공사든, 실패하든 성공하든 간에 결국 저희가 물자를 공급하게 될 겁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이권이죠.”
댐을 세우는 데 시멘트는 얼마나 드는가? 철근은? 공사비는?
그리고 러시아와의 동군연합이 형성되어 러시아 내에서 영국 자본이 활개치게 되면? 지브롤터는 아예 영국 영토니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프랑스가 주 사업자라고 한들 영국의 회사들과 거래하지 않으면 시멘트를 실어나르기도 힘들 터.
이만한 눈먼 돈을 빨아먹지 못하면 상인이 아니었다.
“루이필리프가 정치 논리로 일을 키운 이상,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댐 건설은 해야 합니다. 단두대에 오르기 싫다면 말이죠.”
“이번 전쟁의 결과로 바로 권좌에서 끌려내려오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그렇습니다. 뭐, 제놈들이 어쩌겠습니까. 죽기 싫으면 알아서 짜내야죠.”
그들은 뭐든 할 수 있었다.
전쟁이든, 사기든, 독과점이든.
황금은 정치를 마음대로 비틀어 꺾을 수 있었다.
정치도 결국에는 돈 없이는 안 되니까.
“루이필리프가 중간에 쫓겨나도 이미 집행된 예산을 돌려받을 수는 없을 거고, 루이필리프가 댐을 완성하면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습니다. 완벽한 꽃놀이패죠, 베링 댐은 아직 러시아 정부 측에서 추진 의지가 명확한 건 아니라 다소 우려됩니다만......”
“차르만 설득할 수 있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공녀님의 결혼식 뒤라면 훨씬 쉬워지겠지.”
“아, 그런데 ‘그’ 사람이 계속 반발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저번에도 사설을 내려고 하는 걸 제 친구들이 신문사를 통해 틀어막았습니다.”
“쯧, 귀찮게.......”
귀찮다.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그 사람은 이번 일에 대해 모르니 그럴 만 하긴 하죠.”
프랑스가 그 결과로 얼마의 국력을 잃든 간에, 그 대가는 결국 그들의 주머니를 채워주리라.
“이번 전쟁에 자원입대한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돌아오면, 그 때 대리인을 보내서 교섭 좀 해 봐, 입 좀 다물고 있으라고.”
수십 년 뒤에 그것 때문에 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았겠지만, 대중은 근거도 불충분하고 딱히 와 닿지도 않는 주장에는 사실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게 자신의 이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는 한.
그러나 프랑스가 초대형 염전을 만드는 건 영국의 민중들에게는 알 바 아니다. 그리고 베링 해협의 댐 공사로 인해 북극의 얼음이 녹는다는 이야기도 딱히 와 닿는 이야기는 아니다. 21세기에도 화석연료가 지구온난화를 일으킨다며 아무리 강조해도 사람들이 석유를 안 태우는가? 메탄가스가 이산화탄소의 수백 배의 온실효과를 일으키든 말든 사람들은 소고기를 맛있게 먹는다. 환경파괴에 대한 담론은 일단 자기들이 등 따습고 배불러야 나오는 거니까.
대부분의 민중들은 자기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수십 년 뒤의 일에 대해 관심이 없고, 그럴 여력을 가진 이들은 죄다 낙관주의에 빠져 있다.
벨 에포크의 시대, 환경이 아무리 날뛰더라도 인간은 언제나 그걸 정복해나갔다.
기술이 발전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를 당장 무슨 일이 나기라도 할 것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게 우스운 일이지만, 그런 인간이 제법 영향력을 가진 작가라면 제법 귀찮아질 수도 있다.
자칫하다가는 여론을 형성할 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이권을 떼어주면 그 인간도 입 닥치겠지, 어차피 우리 생전에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시끄럽게 굴고 있어.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될 걸세.”
“알겠습니다. 경.”
기술적 문제? 그런 걸 왜 신경쓰는가?
중요한 건 단 하나, 그 계획이 정부 주도로 짜이고, 그 예산이 집행되는 것 뿐이다. 성공적으로 짓든 짓다가 무너지든 그들 알 바는 아니다.
“자네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게, 이런 사소한 문제에 발목잡히면 러시아 정부는 어떻게 설득하려고 그러나?”
“러시아야 뇌물만 먹이면 쉬운 일이죠, 하지만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인간들은 몇 배로 귀찮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영향력은 하늘과 땅 차이 아닌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완벽한 걸 원하신다면 그렇다 이 말입니다.”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순교자 되기 십상인 상대, 차라리 무시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만, 영향력이 은근히 있으니 전혀 신경쓰지 않을 수도 없다.
가장 좋은 건 역시 회유하는 것이다.
어차피 돈은 많으니까 말이다.
***
육군 주둔지에서, 나는 뜻밖에도 연대장의 부름을 받았다.
“에드워드 젠티안 소위, 맞나?”
“예, 맞습니다만.”
“자네 아버지가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웰즐리 공작님 휘하로 참전하셨지 않나?”
모를 리가.
거기서 전사하셨는데.
“맞습니다.”
“나는 거기서 자네 아버지 전우였네.”
“예?”
명예 육군 대령이라는 나이 지긋한 귀족은 껄껄 웃었다.
“자네 아버지와 서로 등을 맡길 수 있을 만큼 신뢰했던 전우지, 자네 아버지는..... 제법 유능한 장교였다네. 솔직히 말하면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장교들은 적당한 구릉에 잡아서 그냥 병사들 정렬시키고 사격 명령을 내리는 것, 그 이상을 기대할 능력이 없었거든, 지금이라고 다르지는 않지만.”
“........”
농담인지 진담인지.
“그런데 자네 아버지는 전황을 읽을 줄 알았네, 그것만으로도 저 닭대가리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기는 충분했지.”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은 대령은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 녀석은 유능해서 희생되었고, 나는 무능해서, 반푼이라서 살아남았네, 그런데 그 녀석의 아들이 내 아래에서 전장에 나가게 되다니, 이것도 참 우연이라면 고약한 우연이란 말야. 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무슨 뜻이신지.”
한숨을 푹 쉰 연대장은 내 어께를 잡았다.
“그래, 이렇게 보니 자네 아버지를 제법 닯았군.”
연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아버지에게는 내가 마음의 빚을 제법 졌네, 돈으로 갚을 수 있는 종류의 빚이 아니었지, 이번 전쟁에서, 자네에게 전부 상환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군.”
나는 조용히 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한 가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뭐든 물어보게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 굳이 말하자면.....”
잠시 추억에 잠긴 표정을 짓던 연대장은 헛기침을 이었다.
“조금 직설적이고, 조금 불편할 수 있는 단어이기는 한데, 이거 이상으로 뭐랄까.... 음..... 다른 단어를 찾기가 힘들군. 그러니 불편히 여기지는 말게나.”
“........?”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미친놈이었지. 긍정적인 의미로도, 부정적인 의미로도.”
“.......예?”
“남들은 긍정적인 의미로든 부정적인 의미로든 상상도 하지 못하는 짓을 태연하게 저질러놓는 놈, 외모부터가 보통은 아니긴 했지? 아, 이건 순수하게 긍정적인 의미일세, 괜한 오해는 말게나.”
“아무튼 간에, 그 녀석과 가장 가까운 단어는 여럿 후보를 꼽아 볼 수 있겠지만, 가장 거리가 먼 단어는 하나뿐이었다고 단언하겠네, 평범.”
“..... 그렇습니까.”
“그냥, 뭐랄까, 가치관 자체가 다르다? 그런 느낌이 좀 들기도 했네.”
“........”
뭐 미래인이신가.
“아무튼.... 그런 녀석이 전사했지, 다행히 신의 도우심 덕에 시신을 수습해서 무덤까진 세워줄 수 있었네.”
“그랬습니까.”
“우리 군이 어디로 파병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베리아였으면 좋겠군.”
이유를 묻자, 대령은 공허하게 웃었다.
“그냥, 그 친구를 못 찾아간 지도 제법 됐으니까, 자네와 함께 그 친구를 찾는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으니.....”
영국군은 특유의 문화가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파병 도중 사망한 인물은 영국 본토에 있는 국립묘지가 아닌, 파병지에 무덤을 만든다. 만일 누가 해상에서 사망할 경우에는 수장된다.
그 원칙을 지키지 않은 몇 안 되는 경우가 호레이쇼 넬슨이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전사한 넬슨은 본래대로라면 수장되어야 했지만, 부하들이 시신을 럼주에 담가놓는 수단까지 동원해 가면서 시신을 수습해 왔다.
“어찌되었든, 함께하게 되어 기쁘네, 소위.”
“영광입니다, 대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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