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아래 은방울꽃(2)
항상 생각하는 일이지만, 역시 모든 문제의 원인은 내가 나서서 뭘 하려고 한 것인 거 같다.
이번에도, 그놈의 소설 때문에 마냥 꿀만 빨 수가 없게 됐다. 망할.
“그냥 놔두면 그 멍청이들이 세상을 완전히 조져버리게 생겼단 말이다.”
나는 한탄하듯이 라일라에게 말했고, 라일라는 우물쭈물하며 뭐라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라일라, 바닷물이 마르면 뭐가 남겠냐?”
“소금이 남겠죠.”
“그럼 소금으로 덮인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없을까?”
“당연히 못 짓지 않나요?”
“그걸 왜 유럽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인간들이 이해를 못 하는 걸까?”
“...........”
“난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아니, 애초에 소설은 소설로 봐야지, 아주 그냥 별겜이 나오면 하이브 마인드에게 통제되는 곤충형 외계인들이랑 모든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는 초능력을 쓰고 광선검을 들고 다니거나 아니면 가호를 받아서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투명해져서 암살하고 다니는 3m짜리 외계인 대비하겠다고 난리 칠 인간들이야 아주.
“애초에 내가 정계에 나가서 저지할 마음을 품어야 할 정도로 돌아갈 일이 아니었다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끝나야지, 대체 왜?
“아무튼, 그래서 여기 온 거지.”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린 소녀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제법 예쁘다고 한 이유를 알겠군.’
앳되고 귀엽다. 자라면 분명 미인이 되겠지.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남자의 목소리에 소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20대의 나이에 귀족이라는 걸 증명하듯이 창백한 피부, 검은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
객관적으로 제법 잘생겼다.
“만나뵙게 되어 저 역시 영광이에요, 자작님.”
그러나, 그녀는 작은 손을 단단히 쥐었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먼저 무례에 대해 사과드리겠어요, 하지만 저는 자작님과 결혼하지 않을 거에요.”
“이유를 듣고 싶군요.”
“제게는 사명이 있어요.”
“그 사명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홍차에는 입도 대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꼭 미혼의 몸으로 수행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그..... 21세기 일이기는 한데, 내 사촌누님 두 사람이 간호사였거든? 두 분 다 결혼 멀쩡히 하셨다.
“제가 결혼해서 집안에 붙잡혀 버리면, 주님이 제게 주신 사명을 수행할 수 없어요.”
“당신의 남편이 당신의 사명에 대해 이해해주지 않으려 하는 인물이거나, 아니면 여자는 집안에서 애나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렇겠죠. 뭐, 저는 다릅니다만. 간호사는 결코 천한 직업이 아니죠, 오히려 성스럽다고까지 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재능이 있습니다.”
모든 간호사가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기 전 최소한 한 번은 낭독하는 나이팅게일 선서가 괜히 나이팅게일 선서인가. 그녀의 이름이 괜히 붙었는가.
간호사를 간호사이게 만든 것이, 간호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린 것이 나이팅게일이다. 그 전에도 간호사는 있었지만, 나이팅게일의 손을 거치고서야 우리가 아는 간호사가 만들어졌다.
‘의료계 내부의 관료제부터 시작해서 근현대 의료의 체계 자체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병원에서 신세를 한 번이라도 진 사람이라면 마땅히 존경해야 할 상대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제가 상당히 골치아픈 처지에 놓였다는 건 이해해주셔야 할 겁니다.”
나는 진지하게 정치에 개입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 내가 지명도가 제법 있는 인물이고, 딱히 결격 사유도 없다. 무엇보다 그 미친 계획을 저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건 가능해도, 적어도 내가 인류를 조져버린 원흉 소리를 듣는 건 피해야 했다.
‘시발, 지중해를 통째로 막고 거길 간척하겠다니, 이 상식 없는 인간들아. 바닷물이 마르면 뭐가 남는데.’
바닷물이 마르면 소금이 남는다.
프랑스 놈들의 계획대로 한다면, 지중해는 아주 크고 아름다운 소금 사막이 될 거고, 지중해성 기후는 아예 끝장이 나서 남프랑스,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등등은 사하라의 싸대기를 양쪽으로 후려갈길 초대형 사막지대가 될 거다.
아니, 아프리카의 사막들도 거기 흡수될 가능성이 높다. 지구 최악의 사막지대가 형성되고, 유럽은 사람 살 곳이 못 될 거다.
그것뿐인가?
‘시베리아 개척도 마찬가지, 베링해협을 막아버리면 시베리아도 녹지만, 북극도 녹아.’
북극에 한해서라지만 평균 기온이 10도 가까이 올라 북극의 빙하가 모조리 녹는다면 무슨 일이 터질지는 안 봐도 MP4 아닌가.
그런 꼴을 내가 가만히 구경해야겠는가. 물론 내가 죽고 한참 지난 뒤에나 일어날 일이긴 하지만, 내가 죽어서 다시 환생할지 또 어떻게 알고?
당장 막아야 한다. 그래서 신문에 사설도 많이 썼지만, 뭔가 방해하는 세력이라도 있는 마냥 기묘하게 모조리 다 씹히고 있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인데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어설프게 날뛰니 돌아버릴 지경이다.
그래서 정계에 진출해야 했다. 하원의원 자리라도 얻으면-법적으로는 난 평민이다-뭔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라도 파악해야지.
그런데 이런 식이면 곤란해진다. 정치인이 뭔가, 이름 팔아먹고 사는 사람 아닌가.
그런데 이 시대에 내 명예가 훼손되는데 ‘그냥 그러려니 하자’ 하고 넘어가기는 매우, 심각하게 어렵다. 이건 보상의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선거에 나갈 생각이 있으면 무조건 저지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관계로, 제 입장도 상당히 곤란하다는 걸 알아주십시오. 대신, 제안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뜻과, 내 뜻이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의 타협은 가능하다.
“플로렌스 양은 지금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신 거죠, 저는 괜한 추문이 돌지 않게끔 해서 제 명예를 지켜야만 하는 상황이고 말입니다.”
그러자, 나이팅게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돕겠습니다. 대신 당신 역시 저를 도와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이팅게일 가문의 힘은 명백히 탐나는 힘이다.
인맥.
21세기라고 딱히 다른 건 아니지만, 19세기는 학연, 지연, 혈연 등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했다.
그런데 난 그게 없었다. 돈으로 쉽게 메울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리고 나이팅게일 가(家)는 그걸 내게 제공해줄 수 있다.
“당신이 부담없이 일을 할 수 있게끔, 제가 간호학교 하나를 설립하겠습니다. 부속 병원도요.”
어차피, 돈은 많다.
그리고 가문만이 아니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개인의 행정적 능력만 해도 역사적으로도 손꼽힐 만한 수준이라는 걸 감안하면,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 아닌가.
“제 명예가 지켜지고, 아가씨의 부모님과 제 어머님이 만족하실 수 있도록 결혼식까지는 올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제가 금전적 후원을 해 드리고, 아가씨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제가 정계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면 그건 그것대로 그 사명을 다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거고 말이죠.”
“.........”
좋아, 흔들렸다.
“저는.......”
“지금 당장 답을 달라는 게 아닙니다.”
‘지금 답을 주면 되려 곤란하지.’
왜? 지금 저 아가씨가 답을 주면 낙장불입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 어머니, 언니 등등에게 시달릴 텐데, 그러고도 심지가 굳을까?
물론 원 역사에서는 그 갈굼을 다 견뎌내고, 오히려 언니의 경우는 역으로 설득하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언니 부부는 그녀의 후원자가 되었고.
그렇지만 그때는 나라는 퇴로가 없었다.
내 요구와 타협하면 충분히 가족들과 충돌을 피하면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데, 가족과 싸우는 걸 누가 좋아한다고? 상식적으로 말이지.
결국 가족들에게 압박을 받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요구를 받아들이는 게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게 될 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지금 답을 주면 되려 곤란하다.
“그저 차분히, 충분한 시간을 들여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게 진짜로 당신의 사명을 이루는 데에 도움이 될지. 그리고 결심이 서면 연락해주십시오.”
뭐, 어차피 결론은 하나밖에 없겠지만.
역사적 위인과 결혼한다거나 그런 타이틀에 집착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와의 결혼이 내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이상, 쓸 수 있는 수단은 전부 써야 할 내 입장에서는 선택이 아니었다.
‘내 손으로 저지른 짓이라면.’
내 손으로 거두어야 한다.
그게 결자해지다.
때로는.
내가 저지른 짓을 내 손으로 되돌릴 수 없을 때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되돌릴 수 있을 때 되돌려야 했다.
아직은 너무 늦지 않았으니까.
아직은.
***
그는 알지 못했지만, 소설은 그저 방아쇠일 뿐이었다.
이미 모든 건 준비되어 있었다.
멜서스 트랩의 이론은 이미 준비된 지 오래였고, 스스로를 현명하다 주장하는 이들이 인류의 어두운 미래를 주장했다.
그리고, 정치인들이 이를 양지로 끌어내었다.
프랑스의 노동자들에게 주어지는 비참하기까지 한 대우에 불만이 쌓인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고 혁명의 불길을 모면하기 위해 루이필리프가 굴린 눈덩이는 커질 대로 커져 전쟁이란 나비효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정치인들과 결탁한 자본가들은 여기에서 돈 냄새를 맡았다.
댐의 건설은 이제 정치적인 문제이자, 자본가들의 문제였다.
여기에 얽힌 이권이 한 사람의 움직임만으로 사라지기에는 너무나 커진 것이었다.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 도미노를 무너트리는 건 한 사람의 전혀 의도치 않은 행동으로 충분했지만, 이를 막는 건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지는 한 회합은 그 증거였다.
“마들렌 선생, 이번 계약 건에서 우리 측을 배려해줘서 감사하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의원님, 일자리가 크게 늘게 되었으니 저희야말로 좋은 일이지요.”
“참, 마들렌 씨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오.”
자선사업가로 유명한 노인을 여러 의미가 담긴 시선으로 바라본 의원은 입을 열었다.
“문제는, 최근 들어 불충한 이들의 수가 크게 늘었다는 게 문제요, 당신네들 공장에서도 단속 잘 하시오, 어설프게 경도된 놈들이 무지렁이들을 선동한다고 하니까.”
“물론입니다. 저희 도시의 직공들은 대부분 성실하고, 데모나 시위 등이 일어나지 않은 지가 벌써 3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월급만 제때 받을 수 있으면 만족하는 이들이니, 파업 등으로 시멘트의 공급이 지장을 빚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수송 문제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지라..... 그 부분은 양해해주십시오. 수송 쪽에서 파업을 해버리면 그건 제 손 밖의 일입니다.”
루이필리프에 대한 여론은 가면 갈수록 바닥을 치고 있었다.
전쟁 전 상황을 수습할 마지막 발악으로 보나파르트주의자들과 타협을 시도한 루이필리프는 세인트헬레나에 있는 나폴레옹의 무덤을 팡테옹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동시에 파리 외의 지역에는 아예 나폴레옹의 관을 접근시키지도 않는데다 마차 안에 관을 숨겨서 들어오는 식으로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 우발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는 걸 막고자 했으나, 역효과만 나왔다.
파리에만 40만에 달하는 군중이 밀집해 그들의 황제에게 무례를 저지르는 왕정에게 분노를 토해냈고, 나폴레옹의 이장은 공화주의자들과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 뭉치는 계기만을 제공하는 최악의 자충수로 돌변해 버린 것이었다. 차라리 나폴레옹의 장례를 공식적으로 주요 도시를 통과시키고 파리에서 제대로 거행하거나, 반대로 나폴레옹의 관을 세인트헬레나에 그대로 버려둔 것만 못한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루이필리프의 지위를 가장 위협하는 사회 계층은 의원이 우려했듯이 노동자들이었다. 애초에 영국과의 국민감정은 외형뿐이고, 진짜 문제는 루이필리프의 개혁 문제였으니까.
민중들은 자신들의 입에 들어갈 빵 한 조각을 원하고 있었지만, 부르주아들을 주 지지층으로 하고 있는 루이필리프는 뭔가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취할 수 없었다.
이미 루이필리프의 입장에서도 이는 외발자전거 위에 올라탄 채 접시로 저글링을 하는 꼴이었으니, 위태로울 뿐이었다.
뭔가 단 하나라도 꼬투리를 잡히면 그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루이필리프는 자신이 정치적 공격을 당할 여지를 막기 위해서, 단 하나의 꼬투리도 내줄 수 없었다.
당연하지만, 지금 밀어붙이고 있는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철회하는 순간 공화주의자들과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이 일제히 혁명을 일으킬 게 너무나도 뻔했기에, 도버 해협 건너에서 날아오는 어느 작가의 비명은 프랑스 국내에는 퍼질 수 없었다.
아무리 작가 한 명이 영향력이 크더라도, 외국에 있는 작가의 발언이 퍼지지 않도록 프랑스라는 강국의 국가원수가 목숨을 걸고 달려든다면 적어도 자국 내에서는 그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는 걸 막을 수는 있다.
당연하지만 루이필리프도 그 정도 능력은 갖추고 있었다. 애초에 그 정도 능력도 없었더라면 진작 쫓겨났을 터, 아니, 그 이전에 전 유럽의 왕실에게 욕을 얻어먹어 가면서라도 국왕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는 초점을 잘못 잡았다.
자신이 영국에서 소설을 출판했으니 당연히 영국 정부 차원에서 일을 수습하면 될 거라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영국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를 수습할 의지가 없어서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는 거라고만 믿었다.
실제로 댐 건설이 절실했던 것은 뭔가 국민들의 시선을 돌릴 건수가 절실했던 프랑스의 루이필리프였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애초에 돈만 꼬박꼬박 들어오면 자기 소설이 몇 개국에 수출되었는지도 신경을 끄고 지냈던 본인 잘못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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