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몰락귀족-15화 (15/60)

달 아래 은방울꽃(1)

“그런 일이 있었다고?”

“예.”

“그럼 어머니는 왜 나한테 말을 안 해주셨지?”

“이미 이야기 다 된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이제 와서 일이 꼬였다고 하면 그것도 체면 상하는 일이잖아요. 어떻게 윽박지르면 결혼식장까지 끌고 가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기신 것도 같고......”

부르주아 가문이라고 해도 주지사씩이나 하는 집안은 쉬운 상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의 차이에 더해 영지는 잃었어도 그들이 재산이 없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가 셜록 홈즈 시리즈를 최초로 집필하기 전에는 귀족의 체면을 지키면서 지낼 수 있을지 진지하게 걱정해야 할 정도까지 몰리기도 했지만, 그것도 소설들이 대박을 치면서 들어온 원고료들로 단숨에 메워버렸다.

게다가 어머님이 평생 동안 고생을 하면서 만들어놓은 사교계 인맥을 총동원하면 먼저 잘못한 게 있으니 상당히 괴로워질 거다. 조금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라면 딸을 묶어서라도 결혼식장으로 끌고 갈 정도는 골치아프게 만들어줄 수 있었다.

‘당장 어머니 쪽 인맥이 없는 것 같아도 은근히 깊은 곳에 많이 퍼져 있었단 말이지.’

물론 사실상 강제결혼을 하면 부부관계는 최악이겠지만, 대부분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중요한 건 형식이고 부부싸움이 나서 별거를 하든 바람을 피우든 간에 흔해 빠진 일이고, 명예에 직결되는 문제도 아니니까.

‘처녀 때 가문의 약혼자랑은 결혼하기 싫으니 좋아하는 남자와 연애결혼하겠다고 하는 건 결투할 일이고 유부남이나 유부녀가 바람피우는 건 그러려니 할 일이란 말이지, 웃기게도.’

이것에 대해 모순적이고 위선적이라는 표현 외에는 쓸 말이 있을까. 거짓말쟁이 한 마디에 죽자고 달려들면서 자기 친구와 배우자가 바람피우는 건 결혼이라는 형식만 유지되면 눈곱만큼도 신경을 안 쓰는데.

물론 이 비합리적인 세상에서 합리적으로 굴다가는 제명에 못 산다는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21세기 감성이 아직 조금은 남은 내게 있어서는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된 거군.”

‘체면이 뭔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라일라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윌리엄 나이팅게일 주지사도 어떻게든 딸을 설득해보겠다고 했어요.”

“아마 안 될 걸.”

나는 솔직히 말해서 상대 집안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라일라의 설명을 들은 순간, 상대를 눈치챘다.

아니, 모르면 이상한 거였다.

“밤꾀꼬리(Nightingale)의 선서.”

“예?”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나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생명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며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비밀을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내가 외울 필요는 없었지만, 내 위치상 여러 번 들은 기억이 있는 선서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여성.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이 여자가 지금 사람이었구만.’

솔직히 말하자면 결혼 여부를 떠나 미래에서 온 영혼을 가진 입장으로써 한 번쯤 만나보고 싶었다.

“한 번 만나볼 수 있으려나.”

“............”

“........?”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고개를 돌리자, 라일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왜 그래?”

“.....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잠시......”

“몸이 안 좋아?”

“아니,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별로 안 믿기는데. 그러고 보면 빅토리아 시대에 고용인들은 아프다고 하면 쫓겨날까 봐 아파도 멀쩡한 척 하면서 일했다지.

‘라일라 얘는 하루이틀 우리 집에 있었나.’

어머니는 하녀가 아프다고 하면 쫓아내는 게 아니라 약값하라면서 돈을 쥐어주는 사람인데 말이지.

“가만 있어 봐.”

손으로 짚어 봤지만, 약간 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전생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내가 감기 기운이 있나 싶으면, 전생의 엄마는 날 잡아놓고 이마에 한쪽 눈이 가게 했다.

손보다는 손목이, 손목보다는 눈이 더 정확하게 체온을 느낄 수 있다나. 외숙모였나 이모였나가 가르쳐줬다고 했는데.

어머니가 어떻게 했는지를 기억하며 몸을 깊숙이 기울이자, 라일라의 이마와 접촉한 눈두덩에 열이 확 느껴졌다.

“열 나네.”

나는 곧장 라일라를 눌러 앉히고 그대로 침대에 눕혔다.

“좀 자둬, 감기에는 약 안 먹는 게 더 낫다.”

오늘날의 아방가르디스트 의사들은 의술은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진부한 상식을 전위의학적으로 탈피해 저항정신을 뽐내며 21세기 굳건이네 군대에서 감기기운 있다고 의무 선임하사를 찾아가면 얻을 수 있는 빨간약과 하얀 알약을 이용해 조제된, 환각증세라는 부작용이 있으나 모든 감기를 8시간 컷 내는 약 세트메뉴나 그냥 일반 병원에서 처방해주는 싸제약 먹으면 간단히 나을 병도 죽을병으로 만드는 의학계의 혁신과 기적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니 감기약을 아편에 모르핀을 섞어서 처방하고, 아편중독자에게 헤로인을 주는 파격에 파격을 거듭하는 유사의학의 비전을 선보이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기성의학이라는 틀에 사로잡혀 유사과학을 배척하고 있었다면 어찌 이러한 전위의료계의 새 지평을 여는 기적적인 발상의 전환이 가능했겠는가.

진지하게 말하자면 그게 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합리적으로, 나름 최선을 다해서 행동한다는 건 안다. 그 최선을 다한 행동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게 문제지.

그 체계를 개선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내가 그 체계를 바꿀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 거 같고 말이지. 당장 선구자인 이그나츠 제멜바이스가 원 역사에서 당한 수모를 생각해 봐라.

난 그런 식으로 시스템에 들이받아 가면서 뭔가를 바꿀 힘도 없다. 나 자신이랑 내 주변 사람들이나 챙기면 그만이지.....

나도 병원 어지간해서는 안 간다. 내가 처방받는 약에 아편, 코카인, 모르핀, 헤로인 따위가 안 들어갈 리가 있겠냐, 차라리 집에서 자가치료하고 말겠다. 내가 야매로 치료하거나 동방의 신비에 기대는 게 이 시대의 양의학에 기대는 것보다는 생존 확률이 높을 테니까.

차라리 쌍화탕이 있다먼 그걸 먹였겠지만, 안타깝게도 여긴 편의점이 없었다. 근데 편의점에서 쌍화탕을 팔던가? 맨날 감기기운 있으면 종합감기약이나 먹지 쌍화탕을 사먹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열이 많이 나는지, 귀끝이 빨개진 라일라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쯧.”

자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네. 물수건이라도 얹어 줘야지.

몸을 일으키자 라일라가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물수건을 이마에 얹어 주자 금방 얌전해졌다.

나는 물수건을 올려놓은 채로 계속해서 글을 썼다.

원래는 원고하다가 피곤하면 바로 자려고 침실에서 글을 쓰는 거지만, 그냥 오늘은 밤 좀 새워 볼 셈이다.

어차피 내일 누구 만나러 갈 것도 아닌데 뭐.

사각거리는 종이 소리가 내 귓전에서 속삭였다.

어두운 방 안에서 등잔 하나만이 호박색 불빛을 비추며 내 원고를 비추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창 밖을 내다보았다.

밝다 못해 푸른 달과, 그 아래 정원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난 은방울꽃들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

런던에 드물게 맑은 날씨였다.

일출과 함께 쏟아져내려온 밝은 햇살은 그들의 밝은 미래를 축복하듯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지나 은촛대를 반짝이게 만들었고, 안에서는 행복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가득했다.

하객들은 즐거움에 차서 이야기를 나누고, 축복을 빌어주는 기도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들 모두가 눈부신 미소를 지니고 있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소녀는 그들의 가운데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신께 나직한 감사 기도를 올렸다.

평온하게 살짝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주님.”

알면 알수록 감정은 깊어진다.

덧없이 사라지는 한 송이의 눈처럼, 희미한 목소리가 소녀의 입술 사이로 새 나왔다.

그 마음이 전해지기를.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찬바람이 강하게 휘몰아치며 소녀가 쓴 면사포를 휘날리게 했다.

어느새 그녀는 홀로 버려져 얼어붙은 숲 한가운데에 버려져 있었다.

저 멀리, 숲의 출구 끝자락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마님.”

라일라는 자신도 모르게 불렀다.

베일로 얼굴을 가린 귀부인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이 야속하기도 했고, 감사하기도 했다.

그녀가 웃고 있을지, 화를 내고 계실지 모르겠으니까.

그걸 마주하는 것보다는 도피하는 게 나았다.

그분의 기쁨은 자신의 기쁨이어야 한다. 그분의 슬픔은 자신의 슬픔이어야 했다. 그분의 분노는 자신의 분노여야만 했다.

마님께는 정말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 인간이라면, 갚아야만 했다.

그러나 마음 속 거울을 바라봤을 때, 그녀의 마음에 과연 한 점 흠결도 없는가.

그가 돌아오는 기척만 나면 누구보다도 빠르게 현관으로 달려가고, 그가 일에 열중하는 것만 봐도 행복하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다른 하녀가 개입할 틈도 없이 그가 바라는 모든 일을 한다.

사람의 행동은 진정한 마음 속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주인님께 난 무엇일까.’

그냥 마님 탓에 옆에 두었을 뿐인 존재인 건 아닐까.

그저 함께 있고 싶은데. 그것만으로도 행복한데. 내 가슴 속 깊이 이미 자리잡고 있고, 그래서 어떤 일도 힘겹지 않았는데. 죽을 만큼 아파도 아프지 않은데,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외롭지 않았는데.

마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소녀의 마음속은 번잡했다.

이것도, 마땅히 회개해야 할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장통을 앓는 소녀의 심장은 그걸 거부하고 있었다

천천히, 라일라는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비어 있는 의자와, 저 바깥, 발코니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마음 속 깊숙이 새겨진 그 실루엣대로.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문의 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 주인님.’

라일라는 저 멀리 있는 남자를 향해 한 마디를 속삭였다.

신체 접촉에는 별다른 거리낌이 없지만, 그것이 남녀 간의 관계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신을 이성으로 보지 않는 것인가. 그저 그에게는 자신은 누이와 같은 존재에 불과한 것인가. 알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마음 속의 뭔가가 흩어질 것만 같았다. 무너질 것만 같았다. 부서져버릴 것 같았다.

결코 나란히 설 수 없다고 해도,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아무도 모르게, 내 마음 안까지 보시는 주만이 보시는 곳에서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이 지나버려 한 자락의 추억으로만 남게 된다고 해도, 분명히 영원토록 그리워하게 될 테니까. 그리워하다 못해 영원히 과거에서 살게 될 테니까.

할 수 없는 말, 너무나 하고 싶은 말, 해서는 안 되는 말.

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결코 외칠 수 없는 말.

할 수만 있다면 목이 쉬어버릴 때까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외치고 싶은 말.

결코, 말할 수 없었다. 언젠가, 지금이 아니라 다른 세상 속 어디선가 또다시 만난다면 모를까. 지금의 그녀는 끝내 말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는 그 한 마디를,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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