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열음(3)
-부디 용서해주세요. 제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저는 지옥에서 죄인이 신을 찾듯이 당신을 찾습니다.
-제 마음은 눈이 멀고 추위에 얼어버렸습니다. 제 심장은 외로움에 박동조차 희미해지고, 당신이 없다는 것이 저를 약해지게 합니다.
-매일 밤 고통받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보낸 글자들을 읽는 것 뿐이죠.
-제가 당신의 입술이 제 입술에 닿는 순간을 얼마나 갈망하는지.
-그 약속이 아직 깨지지 않았다고 믿기에,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사랑의 이름으로 내일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만일 그 무엇도 당신을 데려올 수 없다면, 제 인생은 그림자처럼 어두워질 겁니다. 운명이여, 부디 제게 자비를 배풀어 일어날 일을 일어나게 하소서.
펜을 내려놓은 나는 다 된 원고를 치워놓고, 글을 더 적어내렸다.
-인구압의 해소는 이민으로 해소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신대륙의 개척은 빈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유럽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세상을 둘러보면 빈 땅은 아직도 많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도 많다.
당장 호주만 해도 텅텅 빈 동네인데 말이지.
아니, 이게 그 유럽 중심주의 그거지? 지들이 세상 전부인 줄 아는 거. 우물 안 개구리라기에는 그 개구리가 너무 잘난 케이스니까 천상천하 유아독존? 비대한 자아?
“주인님?”
“응?”
“마님이 찾으십니다.”
“아우우.......”
온몸에서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디 계셔?”
“안방입니다.”
“알았어.”
계단을 내려가자, 내 뒤를 조용히 따라오는 라일라가 보였다.
‘쟤가 오늘 왜 이러지.’
뭐라고 해야 할지 딱히 모르겠지만 조금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잠깐 앉아 보거라.”
어머니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결혼하거라.”
“......예?”
아니, 아니아니, 잠깐
차분히, 육하원칙. 육하원칙 생각해보자.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무엇을, 결혼.
누가? 언제? 어디서.....는 지금 중요한 건 아니고, 어떻게? 왜......는 생각해 보니 뻔하니 넘기고.
누가, 언제, 어떻게?
결혼은 두 사람이 하는 건데, 누구랑?
그리고 언제? 어떻게?
“저, 어머니, 좀 갑작스러운데...... 아니, 누구랑요? 지금 누구랑이 중요한 거 아닌가요?”
“괜찮은 집안이다. 작위가 있는 귀족 집안은 아니지만 정계에서 힘을 좀 쓰는 집안이지, 부친은 지역 의회의 의원직을 역임했고 이번 주지사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다.”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사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어느 가문이냐가 중요할 뿐.
전임 총리인 찰스 그레이 백작을 예시로 들어보자면, 자기 아내의 친구인 데본셔 공작부인과 불륜을 대놓고 저질러서 자식까지 낳아 대놓고 길렀는데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당연히 분노해야 할 그레이 백작부인은 오히려 계속 공작부인과 친하게 지냈고, 그녀가 낳은 딸을 자기 아이라고 길렀다.
이는 당대 귀족들의 결혼이 결코 사랑으로 맺어진 게 아닌, 가문과 가문 간의 계약에 가까웠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애초에 불륜이고 뭐고 결혼생활 자체가 사랑으로 맺어진 게 아니니 남편이든 아내든 사실상 후계자 하나만 낳으면 서로 신경끄고 지내는 남남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가문 자체는 쇠락했다지만 여백작 역시 한때 노르망디 지역의 백작가의 일원이었다.
그녀 본인은 정작 사랑에 이끌려 평범한 평민과 혼인했지만, 귀족으로써의 상식이 그리 쉽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당연히 신부에게 볼 것은 신부의 가문이 좋은가, 그리고 후계자를 낳을 능력이 있는가, 그 둘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판단에, 가문은 쇠락하고 영지는 잃어버린 상황에서, 그나마 남편이 남긴 돈과 아들이 번 돈을 알뜰하게 투자해 제법 재산을 불렸다지만 그래도 영국의 상류층에 완벽하게 융화하진 못한 상황에서 자신이 구해다 줄 수 있는 최선의 신붓감이었다.
“아들아.”
“예, 어머니.”
“결혼하고, 사교계에도 진출하고, 정계에도 발을 걸쳐라, 넌 작가로만 남을 그릇이 아니다. 네 장인 될 사람과도 이야기는 다 되었다. 네가 정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전심전력으로 돕기로 했으니.”
저 아이가 없었더라면 진작 수녀원에 들어갔으리라.
하지만 남편이 남긴 유일한 혈육이자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이며, 무엇보다 자신이 직접 낳은 자신의 외아들이 있는 한,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은 고생하더라도, 아들은 출세하는 걸 보고 싶다.
오래 전 가문이 누렸던 영광에 못지않은 영광을 누리는 걸 보고 싶었다.
아니, 보지 못하더라도 그 길만이라도 열어주고 싶었다.
“어머니, 전....”
“물론 당장 하라는 건 아니다. 일단 만나보거라. 그 집안의 둘째 딸인데, 어린데도 제법 미색이 고와서 미인이 될 싹이 보이더구나.”
“몇 살인데요.”
“올해 12살인가 그럴 거다. 아마도.”
...... 이보세요. 아니 뭔 띠동갑 애를 약혼녀라고 데려다놔요. 만 12살이면 초등학교 6학년 아냐?
“아니 무슨 라일라보다 어린 애를.....”
“내가 이러는 건, 다른 문제 때문이다.”
어머니는 차분히 말했다.
“소문이 좋지 않더구나.”
“소문이라뇨?”
“전쟁 말이다.”
어머니의 손이 파리하게 떨렸다.
“내 약혼자와,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혁명의 광기 속에서 죽었다. 네 아버지도 웰즐리 휘하에서 용맹하게 싸우시다가 전사하셨었지.”
어머니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난 너마저 그렇게 잃고 싶지 않다.”
전쟁이 난다면, 젊은 귀족 청년이라면 사실상 반강제로 입대해야 한다.
장교로 가기는 하지만, 초급장교는 오히려 병사들보다도 사상률이 높다.
“네 아버지는 소령이었지만 전장에서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셨다. 네가 소위로 전선에 나간다면 필시 네 아버지보다도 위험한 자리에 있을 텐데, 내가 어찌 안심할 수 있겠느냐.”
저 멀리 동양이라면 모를까, 유럽에서는 외아들이라고 빼주고 그런 거 없다.
그래서 1차 대전 당시 대가 끊어진 귀족가문들이 무수히 많았던 이유기도 했다.
가문을 이을 유일한 후계자가 참호 속에서 전사해버리니까. 인재라고 빼주는 것도 없다. 이미 세운 업적만으로 노벨상 수상이 확실시되던 젊은 과학자도 1차대전 중의 갈리폴리에서 전사했으니까.
그렇기에, 나폴레옹 전쟁과 같은 전쟁이 유럽 대륙에서 다시 발발하면, 나 역시 전선에 끌려가게 될 게 뻔한 상황.
어머니가 조바심을 내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
“그래도 나이가........”
“네 아버지와 나도 그 정도 차이였다. 내가 네 아버지를 처음 만난 게 내가 19살일 때였고, 네 아버지가 서른하나였지.”
“..............”
내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기는 한데, 그걸 제치고 봐도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12살이나 많았다는 건 금시초문인데........ 아니 난 많아야 서너 살 차이일 줄 알았지.
“일단 만나보거라, 만나고 나서 이야기하자꾸나, 그것도 반대하진 않을 거 아니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 12살 애랑 상견례를 한다는 그거 자체가 좀 심하게 잘못된 거 같은데요? 이 시대가 원래 그런 건가?
***
얼마 후, 영국, 햄프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주지사는 자신을 찾아온 귀부인을 보며 명백히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큼, 그게.....”
“윌리엄.”
귀부인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당신과 나는 거래를 했어요, 그리고 나는 당신과의 약속을 지켰어요, 그러면 이제 나도 그 보답을 받아야 하지 않나요?”
“부인, 분노하신 건 이해합니다.”
“방금 그 발언으로 당신은 저만 모욕한 게 아니라 우리 가문을, 수백 년을 이어져 온 유서깊은 우리 가문의 명예에 침을 뱉었다는 걸 알아두도록 하세요, 하지만, 한 번 더 기회를 주죠, 방금 들은 말은 내가 늙어서 귀가 잘 안 들린 탓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니,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보세요. 내가 납득 가능하게 말이에요.”
“...... 어려울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부인, 말씀드리지만 이건 절대 제 의도가 아닙니다. 제 부인도 굉장히 당황한 상태입니다.”
“누굽니까.”
“예?”
“어떤 남자입니까?”
사실, 이 시대의 혼인에 사랑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필요한 건 상호호혜적인 관계였으니까.
애초에 결혼을 한다고 인생 전체가 묶이는 것도 아니고, 귀족들은 그냥 식을 올리고 후계구도만 잡히면 아예 별거해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고, 딱히 추문거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집안 간에 이야기가 다 오가고, 심지어 그 결혼에 대한 대가까지 다 지불했는데 입을 싹 씻어버린다는 건 모욕이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모욕.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거대한 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탓이었지만 가문이 자신의 대에 몰락했다는 트라우마가 있는 여백작 샤를로트의 역린을 대패로 긁어버린 꼴이었다.
“저도 그 아이가 남편에 대한 말을 듣기도 전에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난리를 칠 줄은 몰랐습니다. 제 언니까지 가서 설득하는데도 요지부동인지라.....”
여백작은 콧방귀를 뀌었다. 명백한 무례였지만 명목상 신분도 아래에 잘못한 게 있다 보니 윌리엄 주지사는 찍소리 하지 못했다.
보나마나 뻔했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거나 하겠지. 이 남자가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고 그러겠지. 하지만 그건 결혼하고 나서 만나도 된다.
정작 그녀는 연애결혼을 했다지만, 죽은 그녀의 남편은 평민이라지만 제법 가진 재산도 있는 부르주아 축에 드는 인물이었고, 무엇보다 가문이 정해준 약혼자는 혁명 와중에 죽었다. 그의 목이 잘려 장대에 매달린 걸 그녀는 직접 보았다.
즉 그녀는 약혼자를 배신하지 않았다. 약혼 상대가 먼저 죽어버렸는데 뭘 어쩌라는 건가. 그리고 가문의 다른 이들도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으니 그녀는 가문의 뜻을 거부한 적도 없었다.
물론 정작 그녀의 남편도 얼마 가지 못해서 자신을 남겨두고 영국군 소속으로 전장에 나갔다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전사해버렸지만.
그러나 이름없이 피어난 작은 꽃, 용담을 성으로 가졌던 젊은 청년과 보냈던 꿈같은 시간은 산산이 부서져 사라졌고, 영원을 약속했던 행복은, 소녀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평온한 안식처에 몸을 맡기기를 거부하고 전장에 나아갔다. 그리고 그 새벽녘의 전투에서 영원히 잠들게 되었고, 남겨진 건 이루어지지 못한 약속과 슬픔에 잠긴 채 남겨진 소녀, 그리고 남편의 유산과 갓난아기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철없는 아가씨는 자기 감정 때문에 그녀가 홀로 지켜온 가문에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주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욕을 씻을 길은 그녀의 아들이 그 철없는 아가씨를 유혹한 그녀의 남자친구와 결투를 벌이는 것 뿐이다.
겁쟁이란 평판은 치명적이다. 그녀가 눈물을 훔치면서 아들이 전쟁에 나가는 것을 말리려는 말을 꺼내 보지도 못한 이유가 뭔가. 아들이 겁쟁이 취급을 받을까 봐 두려워서 아닌가.
명예는 모든 남성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다. 상대가 어떤 형태로든 모욕을 하는데 결투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공포라는 정념에 휩싸여 이성이 꽁무니를 뺀 것이고, 이런 겁쟁이는 결코 명예로울 수 없다.
그리고 가문 간에 이야기가 다 된 결혼 상대를 빼앗긴 것은 결투의 명분으로는 차고 넘쳤다.
명분이 있으면 결투를 할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명분이 생기면 ‘무조건’ 해야 하는 시대다. 물론 다른 상속자가 없는 외아들이 결투에 말려들면 어느 쪽이 결투를 걸었든 뜯어말리는 것이 상식이고, 그녀라고 자기 아들이 목숨 거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이 정도로 압박을 하면 어떻게든 수습을 하려 들지 않겠는가.
그녀의 생각처럼, 끙끙 앓던 주지사는 한숨을 푹푹 쉬며 입을 열었다.
“부인,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남자 문제가 아닙니다. 그 애는 지금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단 말입니다.”
“...... 뭐라고요?”
“집 밖으로 이야기하기 부끄러워서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만, 그 아이가... 플로렌스는 지금 신께서 자신에게 사명을 주셨다고 이야기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평생 동안 병들고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서 간호사가 되어 봉사하겠다더군요. 그래서 결혼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 뭐라고요?”
“네, 간호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 뭐가 아쉬워서, 아니, 신께서 주신 사명이라 여긴다면 이해 못 할 건 아닌데. 그래도....”
여백작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상류층은 어차피 병원도 가지 않는다. 의사를 부르거나, 아예 주치의를 둔다.
그만큼 병원은 비위생적이고, 간호사들의 노동은 고됐다.
그런데 그런 일을 주지사의 딸이 자청하겠다니, 제정신인가 싶은 일이었다.
그리고, 윌리엄 주지사 역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평소에 여성 교육에 대해 진보적인 태도를 보여오고, 여자에게도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여겨와서 딸들에게 그런 교육을 시켰지만, 주지사 자리에 잠시 눈이 멀어서 책임지지 못할 약속을 덜컥 해버렸다.
사실 객관적으로도 나쁜 혼처는 아니었으니 잘 설득하면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막내딸이 이렇게 드러누워 뻗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저 역시 나름 신앙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지사님이 상당히 곤란한 처지라는 것도 이해하고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줄까요?”
“..........”
근본적인 문제를 여백작이 들고나오자 주지사의 입은 조개처럼 꾹 닫혔다.
이 문제는 누가 결혼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명예의 문제다.
여백작의 외아들인 젠티안 자작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이번 일로 모욕당한 꼴이었으니,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있어서도 안 된다.
여백작은 그걸 지적한 것이었다. 본인도 뭔가 피를 보는 성격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자식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꼴을 보고 물러난다면 어머니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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