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열음(2)
“외무장관님.”
“영광입니다, 공작님.”
“앉아 계십시오.”
“어찌 그 나폴레옹을 꺾은 웰즐리 공작님을 앉아서 맞이하겠습니까.”
“허허, 저는 안 보이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며칠 만에 또 뵙는군요, 총리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펼쳐지는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어찌된 일입니까?”
“어느 입 싼 작자가 물밑에서만 조용히 오간 이야기를 언론사에 흘린 모양이오, 그리고 그놈들이 보도 경쟁을 벌이다가 그 모양이 되었다는 거고.”
그냥 검토였다.
내부적으로 검토만 하던 이야기가 언론에 흘러나갔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이 결혼식 날짜라도 잡은 마냥 이야기되고 있었다.
심지어 윌리엄 4세는 조카딸이 원하지 않는 결혼은 시키지 않겠다고 못박아놓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프랑스가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식은 들으셨을 겁니다.”
“그건 그저 정치적 수사가 아니었습니까?”
“아닙니다, 프랑스인들이 무기를 비축하고, 동원령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아주 확실한 정보가 접수되었습니다.”
“..........”
“동맹이 체결된 것도 아니고, 동맹을 할지 말지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다가 갑자기 대가를 먼저 요구하는 모양새가 되어 민망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 않습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참전입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양쪽 모두 먼저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티를 팍팍 냈고, 결국 어느 쪽도 참전에 대한 확언은 주지 않았다.
이게 혁명 전쟁이라면 몰라도 지브롤터라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할지언정 크기 자체는 얼마 안 되는 조그마한 땅뙈기 한 조각을 위한 전쟁인 데다 상대도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이 아니라 루이필리프다.
만약 영국이 쉽게 이기면 뭔가 얻어먹을 것도 없을 게 뻔하고, 반대로 영국이 쉽게 이기지 못하고 고생하면 영국이 고생하는 동안 유럽 대륙에서 얻어먹을 이득을 최대한 빨아먹어야 했다.
정 위험한 경우는 영국이 탈탈 털려서 아예 본토 공격을 허용한 경우인데, 일단 나폴레옹의 전성기 때도 뚫리지 않은 로열 네이비가 궤멸당하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힘들뿐더러 그렇게 되면 그때 참전하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현재 프랑스는 스페인과 모종의 거래를 맺고 지브롤터를 되찾아주려는 것일 뿐, 자신들은 전혀 영토에 대한 야욕이 없다고 어필한 것도 독일의 두 강자가 신중론을 펴게 하는 데 한 몫을 했다.
게다가 설령 크게 이겨서 뭔가 프랑스에게 크게 뜯어냈다가는 진짜 또 혁명이 터져서 그 지긋지긋한 혁명전쟁을 또 치러야 할 가능성도 없다고만은 못한다.
그 혁명전쟁의 최대 피해자들로써는 신중론을 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우선..... 그러자면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우리 러시아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손에 넣고자 합니다.”
이미 오스만 제국은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게 만천하에 드러난 지 오래고, 러시아 제국은 자신들의 능력을 총동원해서라도 콘스탄티노플을 손에 넣고 싶어했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지정학적으로도 콘스탄티노플의 가치는 도저히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곳이 성지라는 것이다.
노바 로마.
두 번째 로마.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러시아가 국력을 총동원해 쳐들어갈 이유는 되었다.
“오스만과 전쟁을 벌일 때 본국의 지원을 바라시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어차피 프랑스는 오스만의 우방 아닙니까.”
이것이 러시아가 영국과 관계를 개선하고자 한 근본적인 이유였다.
“........”
웰즐리와 총리, 외무장관의 사이에서 복잡한 시선이 교환되었다.
“알겠습니다. 저희 역시 이 건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할 듯 합니다. 조만간 다시 뵙도록 하죠.”
“물론입니다. 어차피 협의가 완료되려면 더 자주 만나야 할 테니 말입니다.”
방을 나오자, 웰즐리는 곧장 입을 열었다.
“어쩔 생각인가?”
“지브롤터는 어떤가. 지킬 수 있겠는가?”
“절대 불가능하네.”
단답이었다.
“그 조그마한 동네에 주둔이 가능한 병력이 몇이나 되겠나? 적이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선전포고를 하고 즉시 국경을 넘는다면 지브롤터 방어병력은 다 죽거나 항복할 뿐이야, 총알보다 적이 더 많을 텐데 아무리 지형이 유리하더라도, 아무리 우리 병사들이 용감하고 뛰어난들 어쩌겠는가, 그리고 지브롤터는 한 번 빼앗기면 되찾기 어려울 걸세. 워낙 요새화된 지역이니 적어도 군사력으로 정면 공격을 하면 군함의 피해도 클 거고 병사들 목숨만 죽이는 일이야. 그게 아니라면 사전에 우리도 병력을 수송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예산은 무한정으로 소모될 걸세.”
지원 없는 요새는 순식간에 함락되겠지만, 배후지를 갖춘 적에게 넘어간 아군의 요새는 그야말로 최악의 방어시설물이 될 터였다.
“육군으로 개구리들과 정면대결하는 것만큼 무식한 짓은 없고, 독일 놈들은 간만 보고 있지. 스칸다나비아 국가들은?”
“그놈들에게 뭘 기대하나? 북방의 사자였던 스웨덴도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이야기야, 덴마크도 마찬가지고, 프랑스를 상대할 힘은 이제 더 이상은 없네, 물론 과거라고 딱히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네덜란드 정도야 이 편에 붙어줄 수 있겠지만, 프랑스 앞에서 그 조그마한 나라가, 심지어 독립전쟁의 은인인 프랑스의 편에 붙을 게 불 보듯 뻔한 벨기에까지 상대하면서 얼마나 의미가 있겠는가.
되려 저지대까지 적에게 무너져서 런던이 프랑스의 사정권에 들어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역시 그렇군.”
한숨을 토해낸 그레이 총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신이시여, 국왕 폐하를 보우하소서.”
정말로, 신의 보우하심이 아주 많이 필요할 터였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총리의 입 안에는 한 가지 가능성이 더 떠돌고 있었다.
‘선제공격.’
예방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선제공격을 가한다면, 프랑스를 충분히 단시간 내에 제압할 수 있을까?
모를 일이었다.
***
“옷.”
정장을 가져온 메이드가 내가 옷을 갈아입고 옷매무새를 다듬는 동안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다주었다.
모자를 쓴 나는 마차로 향했다.
런던 시내로 가는 외출이었다.
‘미세먼지 마시는 날이구만.’
런던의 스모그가 아직 본격화되지 않았다고는 해도, 그 환경오염은 황사철 서울 수준은 가볍게 넘는다.
진짜 심해질 경우는 석탄 난로에서 나온 석탄재와 황 등이 뒤섞이면서 거의 걸쭉한 콩 수프 수준의 누리끼리한 안개가 낀다고 들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은 그 정도가 아니다.
물론 이미 템스 강에서는 내가 태어날 때쯤만 해도 넘쳐났다고 하던 연어가 씨가 말랐을 정도로 오염이 심각했다.
그래서 나도 가급적 런던에 들어가는 건 피하고 있었다. 아무리 런던이 좋아도 오래 살아야 할 거 아닌가. 이 동네는 의사도 개판인데 아파서 누웠다가 의료사고로 골로 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정말로, 루이필리프가 전쟁을 일으키려는 건가.’
나는 아무리 그래도 영불관계가 악화되는 선에서 끝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문이 돌고 있다.
전쟁에 대한 소문이.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명백히 금융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세계 정세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건 역시 금융가, 특히 주식시장이다.
물론 단순한 심리적 요인만으로도 뱅크런이 날 수도, 그리고 특정 주가 떡상하거나 반대로 떡락할 수도 있는 만큼 단지 그런 소문이 돈다는 것만으로도 주가의 동향은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반대로 이 시대에는 각국의 정부보다 기업과 금융가, 유력자들이 더 많은 정보를 얻는 게 이상하지 않은 시대다.
정말 어느 나라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그것도 단순히 식민지 개척 수준이 아닌, 열강과 열강이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규모의 전쟁을.
‘그러니 좀 알아봐야지.’
이 시대에 열강과 열강이 정면대결하는 수준의 전쟁이 있었던가? 빈 회의 이후로는 없었던 거 같은데. 나폴레옹 이후로는 내가 알기로는 큰 규모의 전쟁은 보불전쟁과 보오전쟁, 크림전쟁, 발칸....... 꽤 많네. 젠장.
근데 이 시기에 전쟁이 났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거든.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만에 하나, 그 웃기지도 않는 지브롤터 탈환 주장이 전쟁으로 이어지는 거라면? 내가 전쟁을 유발한 거라면?
설마 소설 하나 가직고 진지하게 전쟁이 나겠냐고 하겠냐마는 한 40년쯤 뒤에 엠스 전보 사건도 국민 여론을 격앙시켜서 전쟁을 나게 만들지 않았던가?
물론 정론직필을 하......지는 않더라도 아무튼 ‘사실’을 전하는 매체인 신문과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고 애초에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한 픽션임을 박아놓고 시작하는 소설이 같기야 하겠냐마는.....
마차가 멈춰서고, 나는 회사에 정문으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더 복잡해 보이는 복도를 한참을 이리저리 헤맨 끝에 브루넬의 사무실을 찾아든 나는 고개를 들이밀었다.
“브루넬! 있나?”
“자작님.”
“회사가 왜 이 모양인가?”
“전쟁 소문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쟁......”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전쟁이 나면 선박은 거의 다 징발되니 말입니다. 선원들도요.”
“빌어먹을, 그거 진짜 나긴 한다던가?”
“아무래도.... 비공식적으로 연일 프랑스에 대한 규탄이 이어진다고도 하고, 아무래도 내각이 전쟁을 결심한 게 아닌가........”
“러시아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만 끼어들면 2차 나폴레옹 전쟁이군.”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안 끼어들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소리다.
프랑스든, 영국이든 진짜 불리해지지 않는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으리라. 그 대신 먼저 상대가 손잡는 쪽의 반대편에 손을 내밀 터.
그래야 상대를 끌어들이기 훨씬 손쉬워지고, 얻어낼 것도 많아지니까.
“프로이센과 손잡으면 오스트리아는 반드시 저쪽에 붙을 거고, 오스트리아와 손잡으면 프로이센이 저쪽에 붙겠지.”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하기 어렵다.
“다만 네덜란드는 이쪽에 붙겠죠, 아무래도 벨기에 독립 전쟁 일이 있지 않습니까.”
이쪽도 만만찮게 영국의 발작버튼이다.
대영제국에게 있어 지브롤터를 뺏기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문제가 저지대를 장악하려 하는 프랑스인들이다.
저지대에서 바람을 잘 타면 순식간에 런던에 닿을 수 있고, 왕립해군이 미쳐 대응하기도 전에 런던이 불탈 수도 있다.
지브롤터를 뺏겨서 지중해 제해권을 상실한다? 물론 치명타다, 영국의 한쪽 팔이 잘려나가는 수준의 치명상이지만,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프랑스가 집어삼키는 것만큼 위험할 리 없었다.
“스페인인들도 지브롤터 돌려받겠다고 하면 싫어할 리 없으니 당연히 프랑스를 지지하겠지.”
21세기에도 그거 가지고 심심찮게 스페인인들이 돌려놓으라고 거품을 무는데 지금이라고 해서 안 그러겠냐.......
‘이러다가 진짜 1차대전 100년 일찍 찍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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